234.
나는 모든 것을 망쳤다.
레토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저 때문에 오케아누스 가문에 비극이 도졌고, 순진무구했던 친모는 제 앞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어린아이는 늘 눈치를 보며 살았고, 조금 더 자라 제 친부에 대한 끔찍한 진실을 알았을 때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무얼 하나.
저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이 계속 상처를 입었는데.
죄책감은 기다란 족쇄처럼 그의 발에 항상 따라붙었고, 그의 양심은 늘 죽지 못해 사는 자신을 힐난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저는 정말로 제가 살아서는 안 되는 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레토는 그 모든 것을 이제 그만하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제 속마음을 아이트라에게 털어놓았다.
아이트라는 레토가 저런 말을 하거나 속마음을 내비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묵묵히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도 달랐다.
오늘이 7년 전과 달랐던 것처럼.
그래서 아이트라는 차오르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기서 울어 버린다면, 가까스로 용기를 내는 제 아들에게 못 할 짓을 저지르는 꼴이었다.
“제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아마 앞으로 평생 마음에 지고 살겠죠.”
“네, 잘못이 아니야.”
“예.”
조금 전에 했던 말과 달리, 레토는 순순히 인정했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인정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었다.
“제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잘못….”
끝맺지 못한 말 대신, 여태껏 꾹 참고 억눌렀던 감정이 눈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레토는 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다가온 아이트라가, 어느샌가 다 커 버린 아들의 얼굴을 대신 닦아 줬기 때문이다.
레토는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눈을 감았다.
“속 썩여서, 죄송했습니다.”
“그래….”
눈물에 젖어 흐느끼는 목소리가 가볍게 탓했다.
“네가, 이 어미의 속을 보통 썩인 게 아니지.”
“자식이, 부모님 속도 좀 썩이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정말….”
젖은 눈을 가볍게 샐그러트린 아이트라가 실소하듯 한숨을 흘렸다.
“누굴 닮아 이리 내 마음에 들어왔는지….”
그녀는 이제 제 두 팔에 다 안기지도 않는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여전히 그녀 눈에, 제 품에 순순히 안겨 소리 죽여 우는 아들은 그때처럼 작고 어렸다.
“어머니.”
하지만 그 아이는 이제 자신을 어머니라고 불러 주고 있었다.
“내 아들….”
모두가 마음속 짐을 하나씩 덜어내는 날이었다.
***
마음의 짐을 던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를 쥐어 짜내기 위해선 수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운이 나쁘면 시행착오도 반복하게 된다.
굳이 이런 고생할 필요 없이, 그냥 마음의 짐을 계속 품고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다.
“…하지만 우리가 짊어졌던 건 꼭 털어놔야 했었던 거지.”
아이트라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벨로 저택으로 돌아가는 레토를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 아쉽게도 알버스는 이 기쁜 날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특함이 가져온 증거들은 하나 같이 심각하고 위험했다. 공개했다간 정말로 2차 전쟁이 발발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 해군 본부에서 국왕, 아드벨로 대장과 함께 증거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논의하는 중이라고.
“아마 며칠은 못 돌아오실 거야.”
“무리하시면 안 될 텐데.”
“이젠 슬슬 본인 연세를 생각하셨으면 좋겠는데.”
하여튼 아버지나 아들이나.
“말을 오지게 안 들어.”
“…….”
“안 그러니?”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하는 모습에, 레토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단 듯이 빠르게 굳어졌다.
“세상에, 어머니.”
하지만 이내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항상 점잖던 사람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단어 선택이었다. 웃음이 절로 났다.
“…전 할아버지를 닮은 모양입니다.”
“널 가르친 사람이 누군데.”
그런 당연한 소리 말라는 아이트라의 농담에 레토가 크게 웃었다. 아이트라도 따라 피식거렸다.
“나중에 할아버지한테 전화라도 드리렴. 좋아하실 거야.”
“그래도 이왕이면, 직접 얼굴을 보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간단한 안부 정도만 전해 주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게 분명했다.
아이트라의 말에 레토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자가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전화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아주 당연하고 행복한 일이란다.”
온화한 아이트라의 얼굴 위로 수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 모든 감정들의 나열을, 감회가 새롭다는 문장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나 마지막에 남은 감정은 슬픔이었다.
“사실….”
아이트라에겐 아직 마음의 짐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너만 그런 미안함을 지닌 건 아니란다.”
“…….”
레토는 지금 그녀가 제 죽은 첫아이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았다. 손발에 절로 힘이 들어갔고, 다물린 잇새 사이로 긴장 어린 숨이 흘러나왔다.
“사람은 모두 나름의 사정이 있지.”
“…….”
“그리고 난 너희들에겐 늘 죄인이었고. 특히….”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아이트라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어떤….”
아이? 아니면 동생?
레토도 입을 다물고 호칭을 고민했다. 그에게도 아이트라의 죽은 친자식은 상당히 어려운 존재였다.
그저 아는 것이라곤 저보다 어리다는 것뿐이었다. 언젠가 알버스가 제게 그 아이가 너보다 두 살 더 어렸다고 말해 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많은 가능성을 품었던 아이란다.”
아이트라가 젖은 눈을 동글게 휘었다.
“너무 어릴 때 떠나 버렸으니까, 분명 뭐든 해 볼 수 있는 아이였을 거야.”
“어머니의 아들이니까요.”
“내 아들들은 다 잘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떠났지만, 유일한 위안이라면 제 아비의 끔찍한 면을 모르는 채로 떠났다는 점이었다.
“몸이, 많이 약했었습니까?”
“아기였을 때는 괜찮았단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말을 머뭇거리던 아이트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뭔가를 떠올린 그녀는 떨리는 숨을 깊이 내뱉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생각을 부정했다.
“…몸은 원래 약했던 걸지도 모르겠구나.”
레토는 지금 아이트라가 디모네 닉스를 의심했단 것을 빠르게 눈치챘고, 끔찍한 가정을 부정한 것도 알아챘다.
건강했던 아기가 갑자기 아파 죽었다니.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 영유아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거의 없는 수준에 가까웠다.
‘저주의 영향인가?’
하지만 레토도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디모네 닉스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괴물의 손에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죽은 아이를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레토.”
부르는 음성에 레토가 심각하게 굳었던 표정을 재빨리 풀었다.
아무 생각 안 했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웃는 모습에 아이트라가 어처구니없단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쓸데없이 효자야.”
“칭찬 감사합니다.”
“능글맞은 건 아드벨로 대장님께 배운 거니?”
방금 그분이랑 똑같았다는 말에 레토가 인상을 팍 썼다.
아이트라는 킥킥 웃으며 하다 만 말을 했다.
“들리니?”
그 말에 레토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했다.
그러나 들리는 것이라곤 저택 안에서 부산히 움직이는 사용인들의 희미한 인기척과 부드러운 바람 소리가 전부였다.
“숨이 꺽꺽 넘어가는 마지막 단말마….”
아이트라는 눈을 감으며 찬찬히 숨을 들이마시더니, 더욱 느린 속도로 숨을 뱉었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황홀한 섬뜩함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 괴물이 제 목을 죄며 죽어 가는 소리가 말이야.”
레토도 따라 눈을 감았다.
곧 그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아름다운 소리네요.”
***
그날 밤. 해군 본부 참모총장실은 밤새도록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으어어….”
카일리코 국왕은 뻑뻑해진 눈을 질끈 감으며 앓는 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내가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지….”
소파에 늘어진 그의 차림새는 썩 깔끔하지 못했다.
아침에는 멀쩡했던 어두운 정장이 여기저기 주름졌고, 타이를 맨 목깃은 헝클어지다 못해 단추가 세 개나 풀어져 있었다.
단정했던 머리도 신경질적으로 벅벅 만지다 보니 너저분해진 지가 오래였다.
“그냥 다 공개해 버릴까….”
“이제 와서 무슨.”
마찬가지로 몰골이 엉망인 아드벨로 대장이 빈정거렸다.
“늙은이들 붙잡고 이 밤까지 부려먹었으면서 잘도 서운한 소리를 내뱉으십니다.”
“그래도 이제 다 끝났습니다.”
알버스가 백발을 다시 정리해 묶으며 말했다. 체력으로는 한 번도 지친 적 없던 백사자조차 드물게 피로한 기색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히 테이블 위를 향했다.
여태 이들이 붙들고 괴로워했던 건, 특함 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증거들이었다.
멜라니 벨리피아의 저택에 있었던 비밀 협약서, 보르고 피에타가 숨겨 뒀던 내통 증거, 사람을 재료로 만든 마약 등.
공개했다간 큰 파란을 일으킬, 어떤 의미로는 현재 존재하는 것 중 가장 파괴력 높은 위험 물질이었다.
그것도 전쟁이 다시 발발하기 딱 좋은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이들 셋은 이 증거들을 어떻게 써먹을지 밤새 고민하고, 의논하고, 이따금 소리도 지르다가 지치면 뭐 좀 먹으면서 다시 머리를 맞부딪혔다.
그리고 지금 막, 그 논의를 끝마쳤다.
“이젠 이견이 없는 것이지?”
국왕이 퀭한 시선으로 아드벨로 대장과 오케아누스 장군을 바라봤다. 드물게 지친 기색이 완연한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난 이만 가지.”
“수도로 곧장 가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스가 물었다. 국왕은 일어나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그를 배웅하려고 몸을 일으키려던 알버스는 사양하지 않고 도로 앉았다.
아드벨로 대장은 처음부터 일어날 생각이 없었는지, 그냥 입을 쩍 벌리며 하품하기 바빴다.
“다음에는 조금 더 좋은 일로 만나자고.”
“그 전에 장례식 있습니다.”
아드벨로 대장이 잊지 말라며 졸음이 진득하게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잊었네. 그것도 나중에 전화로 논하지.”
문을 열고 나가니,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티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크게 하고 있었다.
그 할머니에 그 손자군.
국왕은 짧은 감상을 마치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건, 종장에 마침표를 찍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