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다행이라면, 레토는 마침 손수건을 두 장 가지고 있었다.
군에서 노아를 챙긴다고 썼던 투박한 것 하나, 그리고 보름 전 해군 본부로 향할 때 옷에 넣어 뒀던 고급품 하나.
“당연히 이게 내 아내만을 위한 손수건이지.”
레토의 능청에 카리나는 역시 형님이시라며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
정작 노아는 눈으로 온갖 욕을 해 댔다. 어처구니없게도, 저 손수건은 노아가 레토에게 선물해 줬던 것 중 하나였다.
애들만 없었으면 저 사슴 같은 남편의 긴 목을 꺾어 버렸을지 모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태워다 줄까?”
화제를 돌릴 겸, 레토가 제안했다.
때마침 카리나를 데리러 온 파란 마동력차가 도착했다.
레토는 그 차에 노아와 클라레, 카리나를 태워 먼저 저택으로 보냈다.
그리고 제 붉은 애마에는 아이스 중령과 나머지 아이들을 태워 각자의 집에 데려다줬다.
아이들은 제집에 들어가 숙제만 챙기고 다시 붉은 애마에 올라탔다.
“그럼 저희 딸 잘 부탁드립니다.”
대신 아이스 중령은 타지 않고 내렸다. 그의 손에는 센샤의 학교 가방이 들려 있었다.
“중령도 푹 쉬게. 정말 고생 많았어.”
“센샤, 잘 다녀와라.”
“응! 아빠 나중에 나 데리러 오면 안 돼?”
“나중에 아저씨가 차로 데려다줄게.”
레토는 붉은 애마를 벨로 저택으로 몰았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뒤에서 자기들끼리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 차창 너머로 보이는 광장의 풍경, 오가는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까지.
“…….”
운전대를 쥔 손가락이 희미한 흥얼거림 따라 까딱까딱 움직였다.
“아저씨, 노래 불러요?”
조수석에 앉았던 리리가 물었다.
“식칼토끼 노래죠? 아저씨도 알아요?”
“이 노래 모르면 간첩이지.”
식칼토끼. 식칼토끼.
정의로운 무적.
입에 익은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도착한 언덕 위 벨로 저택이 붉은 애마를 반겼다.
“작은 부군!”
현관 앞에 있던 아스가 붉은 애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아스 누나, 안녕하세요!”
아이들은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거실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숙제부터 시작했다.
“세상에, 처형.”
레토는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절 향해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아스라니!
그는 서둘러 하늘을 올려다봤다. 두 쪽은커녕 푸른 하늘에 구름 하나 없이 화창했다.
“어서 오세요. 고생 많으셨어요.”
“처형…!”
감동한 레토의 손을 꼭 쥐며, 아스가 말했다.
가까이서 본 아스는 이미 한 번 울었는지, 눈가가 평소 기억하는 것보다 살짝 붉었다. 안 봐도 훤했다.
무사히 돌아온 노아를 끌어안고 안도해 울었겠지. 작전으로 떠날 때도 그리 슬퍼했는데.
‘오늘 벨로 가문 여자들 눈물샘 터지는 날이군.’
그래도 이런 날에 흘리는 눈물은 좋은 것이라고, 레토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저도 그 감동에 한번 빠져 볼까, 싶었는데.
“미안한데 장 좀 봐 주실래요? 두 분 돌아오신다는 연락을 못 받아서, 저녁 식사 때 쓸 재료가 모자라거든요.”
“…제가 드디어 집에 왔군요.”
울 틈을 안 주네.
레토는 어느새 제 손에 들린 쪽지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종이에 적힌 장 볼 것들을 보니 저녁 식사가 무척 기대되었다.
“…처형.”
그래서 레토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제 몫은 안 하셔도 됩니다.”
“설마 심부름 시켰다고 삐치신 건 아니죠?”
“그런 귀여운 이유를 떠올려 주시다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레토는 잠시 머뭇거리고는 대답했다.
“오케아누스 저택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아….”
아스가 조금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얼굴에 선명히 드러났다.
레토는 딱히 그런 게 아니라며 못다 한 말을 이었다.
“가서 후작님께 드릴 말씀도 있고, 저녁은 거기서 먹고 올 생각입니다.”
“그럼 내일 돌아오시나요?”
“아니요, 밤에는 돌아와야지요.”
노아의 상태가 걱정이라서 외박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다.
아마 오늘은 클라레와 잘 것 같았지만, 그래도 옆에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레토에게 ‘집’은 바로 여기였다.
“집 놔두고 외박하면 안 되죠.”
“옳으신 말씀.”
아스는 레토에게 어서 오라며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아스의 부탁대로 장을 보고 온 레토는 노아에게도 말했다.
먼저 도착했던 노아는 씻고 나와서 침대에 누운 채였다. 그간 쌓였던 피로가 집에 오니 졸음으로 터지는 듯했다.
“후작님께 다녀오려고.”
“잘 생각했어.”
노아가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품까지 크게 하며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는 모양새가 어린아이 같아서 레토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고, 완전히 애가 됐네.”
“시끄러….”
절 끌어안으며 입술 도장을 마구 찍는 레토를 손바닥으로 밀쳐 냈지만, 노아는 그게 또 마냥 싫지 않았다.
“…후작님께 말씀드릴 게 있지?”
“응.”
어느새 침대 위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레토가 노아를 제 품에 쏙 안은 채로 말했다.
“나도 이제 슬슬 한 걸음 나아가야지. 그래야 너한테 떳떳한 남편이 되지 않겠어.”
“넌 이미 떳떳하고 멋진 남편이야.”
“네가 날 항상 좋게 봐 주니까 가능한 일이야.”
“자고 올 거야?”
“아니. 저녁만 먹고 올게.”
“자고 와도 괜찮은데….”
그래도 돌아오겠다는 레토의 말에 노아는 내심 기뻤다.
레토는 그런 노아를 제대로 눕히며 잠들 때까지 옆을 지켜 줬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나오니.
“…….”
“…….”
숙제를 다 끝낸 아이들이 방문 앞에 쪼르르 서 있었다.
“…으음?”
레토는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들은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레토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슬쩍 닫힌 문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무슨 일일까, 비밀 조직 대원분들?”
레토가 무릎을 낮춰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우리가 좀 심심하니, 놀아 주세요!”
조직의 우두머리인 클라레가 어린이용 선글라스를 척 끼고는 레토에게 당돌하게 부탁했다.
“그러는 김에 울 언니도 데려와라!”
“쉿. 노아는 자요.”
레토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자, 아이들도 따라서 조그만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뭐 하고 놀아 줄까? 아저씨는 요즘 유행하는 걸 잘 몰라서 놀아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
“재판놀이 할 거예요! 형부도 같이해!”
이미 주제는 다 정해져 있다고 클라레가 말했다.
“오늘은 카리나가 불법추심으로 채무자를 압박한 악덕 사채업자 역할이에요. 채무자는 세레니!”
그리고 채무자를 변호하는 국선 변호사는 리리인데, 이게 또 알고 보니 사채업자에게 뒷돈을 받았다는 설정이 있었다.
보르는 세레니에게 강제로 보증 서게 한 못된 형 역할.
센샤는 이 사건을 취재하는 정의로운 기자 역할.
“그리고 나는 이번 사건에서 채무자의 아내 역할이에요. 형부는 이거 해라요.”
레토는 제게 주어진 역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게 정말 유행이라고?”
그는 사채업자의 오른팔 역할이었다.
설정이 정말 구체적이었다. 사채업자의 행동대장인데, 이명이 무려 ‘피를 머금은 돌망치’였다.
“다행인 줄 아세요.”
지나가던 아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전 예전에 혼자 사는 여자들 등골 빼 먹는 제비 역할도 했어요.”
***
해가 지기 전.
레토는 약속대로 아이들을 붉은 애마에 태워 각자의 집으로 데려다줬다.
그리고 마지막엔 카리나와 함께 오케아누스 저택으로 향했다.
“형님 아까 엄청 멋졌어요!”
조수석에 앉아 야무지게 안전띠를 맨 카리나가 짧은 다리를 동동 흔들며 말했다.
“진짜 사채업자의 오른팔이자 행동대장, 피로 물든 돌망치 같았어요.”
“…….”
레토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린 남동생과 친해진 건 기쁜 일이지만, 사채업자의 오른팔 연기가 훌륭했다는 칭찬을 듣게 되는 건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카리나가 친구들하고 무척 잘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레토는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어때? 재미있어?”
“얼마 전에 받아쓰기도 100점 받았어요. 그리고 친구들하고 문방구에서 파는 과자도 몰래 사 먹었어요.”
근데 어머니한테 들키면 혼난다면서, 카리나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레토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러면 우리 둘만의 비밀이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 레토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치?”
“네!”
카리나는 냉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아이는 제 형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아이트라가 직접 나와 두 아들을 마중했다.
“…….”
아이트라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토는 어디 다친 구석 하나 보이지 않았고, 뭘 숨긴 얼굴도 아니었다.
그때처럼 죽으러 갔던 게 아니라, 살기 위해 가서 돌아왔다.
7년 전과 다르다.
그 사실을 몇 번이고 가슴 속에 새긴 뒤에야, 아이트라는 레토에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어서 오렴. 고생 많았어.”
“다녀왔습니다.”
“카리나, 저녁 먹기 전에 씻는 게 어떨까?”
“형님이랑 조금 더 놀고 싶은데….”
카리나는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레토의 손을 슥 잡았다.
어머, 아이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기는 레토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저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다니. 그것도 레토에게!
늘 조숙한 태도를 유지하던 아이가 저리도 제 나이처럼 굴고 있다. 장족의 발전을 넘어, 집안의 축복과 같은 일이었다.
“그럼 같이 씻을까?”
레토가 카리나의 머리를 벅벅 쓸면서 물었다.
“카리나 네가 가서 목욕물 좀 받아주라. 형제끼린 원래 같이 씻고 그러는 거야. 그렇죠, 어머니?”
“물론이지. 그렇다고 너무 오래 물에서 놀면….”
키득키득 웃던 아이트라가 순간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레토를 돌아봤다.
“그러면 목욕물 준비를 부탁할게.”
괜히 무안해져 시선을 피한 레토가 카리나의 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카리나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불편하셨습니까?”
침묵을 먼저 깬 건 레토였다.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목소리는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그도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수줍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더는 이 쓸모없는 자기 비하를 계속 품고 있을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