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시커먼 벨벳으로 덮인 관을 발견한 노아는 그대로 두 다리가 굳어 버렸다.
“아….”
멍청한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심장이 멎으면서 전신을 돌던 피가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두 눈이 갑자기 따가워지면서 질끈 감겼다.
분명 심장이 굳은 것 같았는데 귀에서 쾅쾅,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굉음이 이명처럼 울렸다.
‘안 돼. 안 돼….’
내려가게 되면….
겁에 질린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핏기 한 점 없이 차갑게 식어 가던 찰나.
“노아 벨로.”
뒤에 있던 셀린이 단호히 말했다.
“멈추지 마. 걸어.”
네가 여기서 멈칫거리면 피에타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겠어!
매정하기까지 한 친구의 격려에 노아는 다시 발을 움직였다.
걸을 때마다 입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노아의 가슴을 마구 짓밟고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아니야….’
아직은 안 돼.
셀린의 말이 맞았다. 아직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노아는 아직은 아니라는 혼잣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안의 볼을 깨물었다.
드디어 함선에서 내린 특함 대원 13명이 국왕의 앞에 섰다.
“사령부 총원!”
레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우렁찬 호령에 탁탁, 발 구르는 소리가 완벽하게 박자를 맞췄다.
“국왕 전하께 경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뻣뻣한 정복에서 바람 소리가 척척 들렸다. 다만 유해를 품은 아미와 셀린은 경례에서 제외였다.
“특수 함선 사령부 소속 전원, 그대들의 공에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바이네.”
“주어진 소임을 해냈을 뿐입니다.”
“그대들을 향한 나의 이 자랑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가 문제로군.”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국왕은 레토와 가볍게 악수했다.
“그리고….”
국왕의 시선이 노아를 향했다.
“…….”
눈이 마주쳤지만, 국왕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황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뜬 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는 지금 노아에게 먼저 기회를 베푸는 중이었다.
정체를 속이고 한 나라의 군인으로 위장한 것을 따지는 대신, 먼저 제 정체를 밝히고 왕국에 망명과 귀화를 요청하도록 말이다.
“…후우.”
노아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국왕 전….”
입을 여는 순간.
“잠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긴장감으로 가득하던 항구의 분위기가 단번에 깨졌다. 소리가 난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메델라 사나 하사가 송구하다며 카일리코 국왕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나름 무게를 잡고 있었던 국왕은 황급히 손을 올려 입을 가렸다. 그만 풋,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대위님.”
메델라는 따로 챙겨 온 것을 노아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본 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피에타 가문의 휘장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스토 제국에, 아니, 자신이 완전히 무너트린 피에타 저택에 있어야 할 가문의 상징이 어째서 제 두 눈앞에 있느냔 말이다.
그 의문을 담은 채로 고개를 들자, 메델라가 싱긋 웃었다.
“아미 치티아 중위님과 벨라 토르 하사님,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가 가져온 것입니다.”
보르고 피에타의 집무실 진열장엔 내통 증거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가문을 상징하는 다양한 귀중품도 함께였는데, 아미가 그걸 몰래 훔쳐 온 것이다.
“이것의 진짜 주인은 대위님입니다.”
메델라는 제 두 팔에 정중하게 얹은 휘장을 한 번 더 내밀었다.
“…….”
노아는 너무 놀라서, 그래서 차마 그것에 손을 댈 수 없었다.
붉고 파란 두 검이 교차하는 피에타 가문의 문장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붉은 휘장은 낡은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관리는 무척 잘되었는지 되려 그 낡음이 고풍스러웠다.
어린 노빌리아 피에타는 종종 저것을 목에 매고 저택 복도를 달리곤 했었다.
그런 딸을 보며 부모님과 고용인들은 항상 웃음으로 맞이해 줬다.
우리 귀여운 망아지. 달리시다가 넘어져요, 아가씨.
“내 어깨에….”
노아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내 어깨에, 그걸 둘러 줄래?”
“예, 대위님.”
메델라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로간 미타스 상사와 아미레 네고 중사, 벨라 토르 중사,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가 각각 한 면을 잡아 넓게 펼쳤다.
순간, 바람이 크게 불었다.
피에타의 문장이 새겨진 휘장이 펄럭거렸다.
어느새 화창해진 아침 햇살 아래서, 붉은 휘장은 거대한 독수리의 날갯짓처럼 위풍당당했다.
휘장은 마지막 후계자의 어깨에 둘러졌다.
가장 뒤에 있던 호네스 메라 일병이 펄럭이는 휘장의 끝을 잡아 활짝 펼쳐지도록 정리했다.
그리고 뮤트 플리차드 병장이 노아의 앞에 다가왔다.
“대위님.”
뮤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휘장을 망토처럼 걸칠 수 있게 연결하는 황금 체인이 손수건에 싸인 채였다.
이 역시, 피에타 가문의 문장이 끝에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아본 노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메델라는 체인을 받아, 노아의 어깨에 걸쳐진 휘장의 끝을 연결했다.
“…….”
노아는 제 푸른 정복을 감싼 붉은 휘장을 손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묵직함이 기억과 변함없었다.
노아 벨로 대위는 눈을 감았다.
푸른 해군 정복은 잠시 잊기로 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노빌리아 피에타는 오른손으로 휘장을 크게 펄럭거렸다.
“…아들라보르의 위대한 주인 앞에.”
총원! 레토의 외침과 함께, 노아를 제외한 특함 12명이 양옆으로 나뉘어 길을 텄다.
그 속에 홀로 남은 피에타의 마지막 후계자가 한쪽 무릎을 경건하게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시스토 제국의 천년 역사를 지킨 피에타 가문의 마지막 가주, 노빌리아 피에타가 감히 청하옵니다.”
피에타의 가주로서, 그녀는 제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제 가문의 모든 것을 아들라보르에 귀속하게 하시어,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망명을 허락해 주십시오.”
스릉.
날카로운 검을 뽑을 때 나는 서슬 퍼런 소리가 들렸다.
국왕의 옆에 호위처럼 서 있던 아티가 허리춤에 찼던 의례용 은검을 모두에게 보란 듯이 크게 뽑았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은빛 검은 곧 국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국왕은 검날을 옆으로 눕혀, 평평한 검신을 노아의 머리 위에 살짝 띄워 올렸다.
“…이름을 말하라.”
노아가 눈을 감았다.
“아들라보르의 위대한 국왕 전하 앞에, 노빌리아 피에타가 감히 미천한 이름을 밝힙니다.”
“노빌리아 피에타.”
검을 쥔 국왕의 손에 힘이 살짝 실렸다.
바람은커녕 갈매기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아침.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햇살만이 항구에서 치르는 비밀스러운 의식을 지켜보았다.
“하늘에 계시는 위대한 어머님이….”
검은 귀족의 오른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지켜보고 계심이니.”
그리고 검은 왼쪽 어깨로 넘어갔다.
“아들라보르에 오늘과 같은 귀한 인연을 맞이함에 그 영광이 영원할 것을 만국에 선언하노라.”
고요한 항구에 국왕의 지엄한 선언이 울려 퍼졌다.
쿵! 쿵!
모든 것을 지켜본 해군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
“…벨로 대위.”
의례용 은검을 아티에게 넘긴 국왕이 노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금빛 눈동자가 상냥하게 휘었다.
“그간 고생 많았네.”
“…….”
“이제, 그대의 부모님을 모시겠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국왕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두 개의 관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관을 옮긴 정복 차림의 해군들이 그 위에 덮인 검은 벨벳을 절도 있게 벗겼다.
그리고 접고, 또 접어 치운 뒤, 뚜껑을 열었다.
“봉환하라.”
국왕의 명이 내려졌다.
유해를 품은 아미와 셀린이 관을 향해 나아갔다.
“…….”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든 노아는, 제 부모님의 유해가 관을 향해 가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아….”
입에서 나오는 멍청한 소리와 맥없었다.
“아, 아아….”
그리고 부모님의 유해가 관 안에 놓이는 순간.
“…아, 아아! 아아악!”
그대로 고꾸라진 노아가 비명을 지르듯 울음을 터트렸다.
“안 돼! 아니야! 아니…!”
“노아!”
갑자기 쓰러지려는 노아를, 레토가 황급히 붙잡았다.
“이거 놔! 제발! 아니야! 아니라고!”
어느새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이, 관에 들어가는 부모님의 유해를 바라보는 푸른 눈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아니야! 넣지 마! 넣지 마아아!”
“노아, 노아 제발….”
마찬가지로 울상을 지은 레토가 흥분한 그녀를 제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제 어깨를 순식간에 적신 노아의 눈물이 끊어질 새가 없었다.
“넣지 마! 제발, 제발…!”
부모님을 관에 넣지 마!
제발 넣지 마!
“제발, 제발….”
숨이 넘어갈 정도로 끅끅 울던 노아는 기어코 레토의 어깨를 주먹으로 찍어 누르며 비켜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레토는 노아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아버지! 어머니!”
으아아앙!
7년을 홀로 참고 견디어 온 비통한 절규가 항구를 아득히 채웠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참고 억눌렀던 인내가 기어코 끊어지고 말았다.
부모를 잃었던 14살 소녀의 슬픔이 그제야 터져 나온 것이다.
그 울음을 잠자코 듣던 국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그러다가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노아의 처절한 울음이 국왕의 마음도 구슬프게 적시려 했다.
“…적국의 귀족이나, 7년 전 전쟁을 막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숭고한 영웅들이 이곳에 왔다.”
국왕은 관에 눕힌 영웅들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아들라보르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영웅들이여.”
“전군!”
아드벨로 대장이 호령했다.
“묵념!”
항구의 가장 높은 곳에 게양되었던 아들라보르 국기와 해군기가 깃면의 너비만큼 내려졌다.
자리에 모인 모든 해군이 경건한 마음을 담아 영웅들께 조의를 표했다. 해군이 아닌 자들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흑, 흐윽…!”
그 속에 홀로, 노아만이 주저앉아 애처로이 흐느꼈다.
노아는 그제야 부모님의 죽음을 실감했다.
비로소 완성된, 7년 만의 작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