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우리 없는 동안 나라가 참 재미나게 돌아갔군.”
레토의 붉은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중 레토의 귀에 가장 분명하게 꽂힌 건, 성왕이 참고인 소환에 응했다는 소식이었다.
“신성청에 대한 민심이 심각할 정도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반전을 꾀하기 위해 그 귀한 몸을 행차하신다?”
“실제로도 여론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습니다. 당당하니까 성왕 본인이 저렇게 움직이는 거 아니냐고.”
“…….”
하지만 그런 염려와 다르게, 레토는 이 상황이 마냥 신기하고 궁금했다. 이제 와서 무슨 반전을 꾀하려는 건지.
“그래 봐야 늦었는데.”
“증거를 찾으셨습니까?”
“아주 완벽하게.”
멜라니 벨리피아가 숨겨 뒀던 비밀 협약서.
거기엔 셀레나 왕녀를 제국과 정략 결혼시키겠다는 내용이 적혔는데, 그 밑에 협약에 참여한 사람들의 서명도 있었다.
그 서명 중에 스켈레로 3세의 것도 있었다.
그리고 보르고 피에타가 감췄던 내통 증거에도 신성청과 성왕의 흔적이 확실히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분명 성왕은 저주에 걸려 와병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움직인다니.
“…….”
잠시 고민하던 레토가 일단 명령했다.
“의무실에 있는 치티아 중위를 불러주게. 그리고 30분 뒤에 회의에 들어가지.”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장님의 연락을 받은 사람은 몇이나 되지?”
“저를 포함해 다섯입니다.”
“그렇게만 모이도록 하게. 회의 전에 대장님과 연락 먼저 하도록 연결해 주고.”
클라시스 소장이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아미가 들어왔다.
“중장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벨로 대위는 어떻지?”
“조금씩 진정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나 하사가 지켜보고 있는데, 내일이면 원래 상태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후우….”
레토는 그제야 안도의 기색을 내보였다.
대원들 보는 눈이 있어서 티 내지 않았을 뿐, 사실 그는 노아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지금도 당장 의무실에 가서 노아의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 있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러지도 못했다.
못마땅한 속을 삼키며, 레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주가 풀릴 수 있나?”
“…저희만 아는 그것 말씀입니까?”
그거라면, 이라고 운을 띄운 아미가 단호히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한 번도 저주가 풀린 사람을 본 적 없습니다.”
“검찰이 성왕을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했는데, 성왕이 응했다고 하는군.”
“예?”
무슨 개소리냔 듯이 인상을 찌푸리던 아미가 반사적으로 ‘잘 못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려던 찰나.
“…아 X발.”
아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어떤 것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으나, 아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움찔거리는 어깨를 보니 상당히 역겨운 생각인 것 같았다.
“역시, 그런 모양이군.”
레토도 얼추 비슷한 예상을 했다.
“예전에 중위 그대가 했던 말이 떠올랐거든. 그 변태 새끼가 그래도 꼴에 성왕이라고, 성력으로 저주를 억눌렀다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방대한 양의 성력을, 성왕은 제 증손녀뻘인 성녀에게서 빼앗았었다.
저주는 풀 수 없다.
하지만 성력으로 잠시 억누를 수는 있다.
“…당장 본부에 알려야 합니다.”
아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력을 지닌 인간을 제물로 쓰려는 겁니다. 서둘러 이를 알린다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겁니다.”
성력을 빼앗아 운신에 쓰려는 거라면, 소환 날짜와 최대한 가까운 시기에 성력을 빼앗을 것이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
“마력의 흐름이 점점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메델라 사나 하사가 노아의 손을 붙잡은 채로 말했다.
그녀는 노아의 몸속에 흐르는 마력이 눈에 띄게 얌전해졌음을 확인했다.
그러곤 염려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난폭하게 움직이는 마력은 처음 느꼈습니다. 안 아프셨습니까?”
“원래는 다스릴 수 있는데, 좀 무리했더니 아프긴 아프더라.”
“이젠 조심하셔야 합니다.”
“잔소리는 이제 그만.”
의무실의 좁은 침대에 기대앉듯이 누운 노아가 물었다.
“다른 대원들은 뭐 하고 있어?”
“선실에서 쉬고 있습니다. 전부 다 씻고 싶다고 난리도 아니었지 말입니다.”
이번 임무는 힘들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상당히 쉽고 편안한 여정이었다.
여관에서 밥도 먹고, 물로 씻기도 했다. 거기다 옷도 멀끔한 것으로 몇 번이나 갈아입기까지 했다.
그래도 노숙한 날이 훨씬 더 많았고, 아무리 쉽고 편안한 여정이었다고 한들 힘들지 않았단 의미는 아니었다.
“너도 이제 가서 쉬어.”
“그래도 조금 더 살피는 게….”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
이해 좀 해 달라는 듯이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내려 보이니, 메델라는 괜히 머쓱한 표정으로 어쩌지도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면 꼭 부르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중장님을 부르겠다며 먹히지도 않을 위협을 끝으로 메델라가 떠났다.
“…후우.”
홀로 남은 노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오니 마침 지나가던 함상병 두 명이 노아를 보자마자 벽에 몸을 붙이며 길을 비켜섰다. 해군만의 문화인 ‘길차렷’이었다.
노아는 그들에게 고개를 가볍게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노아의 발걸음이 어딘가에서 멈췄다. 팻말조차 붙어 있지 않은 낡은 문 앞이었다.
문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던 노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문과 달리 깨끗하게 청소된 빈 창고였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한가운데 나란히 놓인 부모님의 유해가 있었다.
“…….”
그 앞에 앉아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 노아는 눈만 힐끔 빼내어 부모님을 말없이 지켜봤다.
‘거짓말 같다….’
부모님의 유해를 보게 되면 무너질 줄 알았다.
펑펑 울 거라 생각했고, 그제야 비로소 부모님의 죽음을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노아는 오히려 이 모든 게 꿈 같았다.
‘정말 죽은 게 맞을까?’
살아 계시는 거 아냐?
대원들이 혹시 다른 사람의 유해를 잘못 가지고 온 거 아닐까? 피에타 백작 부부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는데.
저 보따리에 사실 아미가 훔친 보석 장신구만 가득 있는 걸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들라보르에 숨어….’
희망을 계속 부풀리던 노아가 대뜸 버석하게 마른 웃음을 힘겹게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살아 계셨으면, 벌써 나랑 클라레를 찾으러 왔지.’
우릴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거셨던 부모님인데, 절대 숨어 사실 분들이 아니었다.
‘이거, 정말 현실성이 없구나.’
작전 전만 해도 외롭다니 뭐니 하면서 엉엉 울었었다.
다시 생각하니 조금 창피하긴 한데, 오히려 그때가 훨씬 정상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고요했다.
망상이 끝난 머리는 작동을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노아는 살면서 이렇게 잡생각 없이 평화로운 순간을 처음 경험해서 살짝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멍하니, 고장 난 인형처럼 한참을 우두커니.
저조차 깨닫지 못한 불안한 시선은 채 풀어 보지도 못한 부모님의 유해를 향한 채로.
“…여태 이러고 있었어?”
흠칫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니.
“뭐라도 깔고 앉아 있지. 맨바닥에서 뭐 하는 거야.”
레토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아를 바라보더니, 도로 밖으로 나갔다. 그의 손에 담요 몇 장이 들려 있었다.
레토는 노아를 한 팔로 번쩍 안아 들고는, 바닥에 담요를 대충 펼치고 다시 앉혔다. 남은 담요로는 노아의 등을 덮었다.
“…나 안 아픈데?”
노아는 등을 덮은 담요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개인함선 운항 못 할 정도면 아픈 거야.”
“그냥 좀 피곤해서….”
“여기에 얼마나 있었어?”
“몰라. 몇 분 안 있었던 거 같은데.”
“나 방금 회의 끝나고 나온 길이었어. 회의 2시간 걸렸다.”
심지어 씻고 옷까지 갈아입었는지, 레토의 내려온 앞머리가 살짝 젖은 채였다.
까맣게 물들었던 머리도 은발로 돌아온 상태였다.
“…….”
할 말이 없어진 노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레토는 그런 노아를 조금 답답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제발 자기 몸을 좀 챙겼으면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저 고집쟁이가 잔소리 좀 한다고 들을 리가 없으니, 레토는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옆에 있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전해 줄 말도 있었다.
“…도착하면.”
레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국왕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왜?”
노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물었다.
“부모님 때문에?”
“아마도.”
“그래….”
“아마, 너의 망명과 관련 있지 않을까?”
“망명….”
부모님이 생의 마지막에 준비했던 망명이, 두 사람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된다니.
“…인생 다 부질없다.”
“…….”
무어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레토는 애먼 제 목덜미만 벅벅 쓸었다.
“잠, 여기서 잘 거야?”
“아직 몰라. 잠은 안 오는데….”
“잘 거면 이불하고 매트 가져올게. 나도 같이 자.”
“넌 침대에서 자.”
“역시 여기서 잘 생각이었네.”
“아이씨….”
레토의 유도 심문에 걸린 노아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건 말건, 레토는 얄미울 정도로 입꼬리를 만족스레 올렸다.
그러곤 능청스럽게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자랑했다.
“두 분 다 보셨지요? 제가 이렇게 노아를 살뜰히 챙깁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늘 애지중지합니다.”
“야, 날아갈 몸은 아니야.”
“보세요, 노아도 저의 사랑을 굳게 믿네요. 정말 이렇게 되기까지 제가 얼마나 고생을….”
“고생은 내가 했지!”
이게 뚫린 입이라고 진짜!
억울해진 노아가 벌떡 일어나선 레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버지! 믿으면 안 돼요! 이 새끼가 내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알아요? 나랑 할 거 다 해 놓고는 고백 한 번 안 하고…!”
“하지만 청혼은 제가 먼저 했습니다. 꽃다발까지 들고요.”
“그것도 네가 내 진급을 방해하고, 마스랑 페미나까지 훔치면서 수작 부린 거잖아!”
“그래도 좋다고 결혼했으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가 예전에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했던 귀족 영식이랑 약혼이라도 할걸!”
“앗, 장모님. 예, 아아, 그렇죠. 제가 그놈보다 훨씬 잘생기고 몸 좋고, 밤일도 잘하고….”
“우리 어머니는 정숙해서 그런 단어 안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