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슬슬 기절한 군인들도 발견되었겠지.”
옷 빼앗기고, 차량 빼앗기고.
제국군들도 자신들을 제압한 정체불명의 무장 집단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켰을 테다.
차를 타고 쉬지 않고 달리면 수도에서 이곳 해안절벽까지 하루 반나절이 걸린다.
그러니 그 사이에 있는 영지에 연락한다면 하루는커녕 반나절 안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면….”
“여길 폭발시켜, 우리 쪽에서 먼저 흔적을 지우겠다는 뜻인 겁니까?”
노아는 그런 의미냐며 레토를 바라봤다. 레토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던 노아가 이내 숨을 짧게 내뱉었다.
“폭발은 상관없는데….”
흔쾌히 오두막 폭발을 허락한 노아가 조건 한 가지를 붙였다.
“이 근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애먼 피해가 돌아갈까 걱정입니다. 괜히 피에타의 후계자를 선동했다는 오해라도 사서….”
말을 하다 멈춘 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국군들이 괜히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붙잡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울까 봐, 노아는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레토 역시, 그 점을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래서 폭발이란 결정을 내렸다.
“괜찮을 거야.”
레토의 미소가 대원들을 안심시켰다.
***
자정을 코앞에 둔 시각.
서부 해안절벽으로 군용차 3대가 들어왔다. 난폭하게 밟은 브레이크 때문에 푸른 잡초가 새까맣게 그을리며 짓밟혔다.
차에서 내린 군인들은 해안절벽 구역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두막 근처에 세워진 또 다른 군용차 2대를 발견했다.
“무슨 안개가….”
군인들을 이끌고 온 상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밤중에 웬 바다 안개가 이렇게나 짙은지, 절벽 너머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피탈된 군용차입니다.”
등록번호를 확인한 군인이 상관에게 보고했다.
조금 더 수색하자, 오두막 지하 창고에서 빼앗겼던 군복들도 나왔다.
수량은 총 23벌. 수도 근방에서 포박된 채 기절했던 군인들의 수와 일치했다.
“군용차에서 또 나온 건 없나?”
“벨리피아 영지에서 피탈된 군용차엔 예비용 군복이 그대로 있으나, 적재했던 무기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무기?”
“기뢰 대형 2발, 소형 10발입니다.”
“X발, 진짜…!”
상관은 보고를 듣자마자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렸다.
하필 동부 해안에 있다가 넘어온 군용차량에서 무기 분실이라니.
기뢰는 바닷속에 설치하는 지뢰 종류였다. 바다 위를 달리는 함선 밑을 터트리는 용도로 쓰이는데, 그만큼 폭발력이 어마어마했다.
“당장 찾아!”
한데 그만큼 위험한 무기를 분실하다니.
탄을 실수로 분실하는 것보다 피 마르는 상황에 군인들은 서둘러 주변을 탐색했다.
그때.
“여기!”
절벽 근처를 살피던 군인 한 명이 동료들을 불렀다.
“이곳에 계단이 있습니다!”
절벽 틈에 숨겨져 있던 녹슨 철제 계단을 발견했다.
가파른 계단 끝은 협곡 사이를 흐르는 강과 이어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온 군인들은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원래 피에타의 가신이 다스리던 영지였지. 근방에 피에타의 별장도 있었고.”
“강줄기를 타고 상류로 잠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피에타 출신이라 이 근방을 잘 알았던 모양이군.”
상관은 피에타의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진짜라고 확신했다.
‘진짜 후계자가 아니면 모를 것들이야.’
상관은 혀를 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때, 군인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뢰를 찾았습니다!”
계단 밑에 기뢰가 매달려 있었다.
군인들은 서둘러 기뢰 해체에 들어갔다. 만약 물속에 설치되었다면 해체가 아주 곤란했을 것이다.
그 말고도 계단에 설치된 기뢰는 총 3개였다.
그럼 나머지는 어디로 갔는가.
“…….”
오만상을 찌푸리던 상관의 얼굴이 일순 새파랗게 질렸다.
그의 시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 하나 없이 시커멓던 하늘에 꽂혀 있었다.
내일 비라도 오려는 건지, 유난히 시커멓던 하늘에….
“저, 저길 봐!”
푸른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신의 옷자락처럼 나풀거리는 푸른 빛이 은은하게, 그러나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우듯 반짝였다.
“설마…!”
그 순간.
콰앙!
땅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절벽에 설치된 계단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툭툭, 녹슨 나사들도 우박처럼 떨어졌다.
이윽고 퍼엉! 하고 엄청난 굉음이 바다 쪽에서 들렸다.
어마어마한 높이의 물보라가 일어나더니, 군인들이 모인 강변의 물줄기가 바다 쪽으로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올라가!”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군인들이 부랴부랴 계단을 밟았다.
“아악!”
“으아아아!”
“안 돼! 어서 빨리…!”
하지만 조금 전 지진으로 약해진 계단은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먼저 올라갔던 군인들은 그대로 추락했다.
쾅! 쾅! 쾅!
이어 들리는 폭발음에 해안절벽이 다시 또 흔들렸다. 잠시 후 절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한 번 더 콰앙-!
내려앉은 절벽과 함께 오두막이 폭발했다. 포탄처럼 높이 솟구친 오두막 지붕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절벽의 들판에 떨어졌다.
지붕 안에는 ‘피에타는 여기서 잠든다’라는 문장이 날카로운 칼날로 새겨져 있었다.
동시에 바다 쪽으로 빠졌던 강물이 순식간에 불어나 다시 협곡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저런.”
그리고 그 광경을 망원경으로 훔쳐보던 레토가 안타까운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이래서 땅에서만 훈련하는 놈들은 안 된다니까.”
저리 무방비하게 내려오면 어쩌자는 건지.
“기뢰가 사라졌단 걸 알았으면 당장 주변 마을에 대피령 내리고 도망시켰어야지. 바다 무서운 줄 모르고 말이야.”
그렇지 않으냐며 뒤돌아보는 레토의 또 다른 손에는 파란색 레이저 빔이 나오는 저격용 소총 포인터가 들려 있었다.
원래는 빨간색이지만, 특수 환경에 따라 파란색으로도 바꿀 수 있었다.
특함 대원 13명은 전원 바다에 나온 상태였다.
제국 군복보다 편안한 개인함선을 착용한 그들의 옆에는 구명보트 2개가 있었다. 두 보트는 단단한 끈으로 나란히 묶였다.
두 보트에는 제국에서 챙겨 온 모든 증거들을 담은 그들의 가방과 피에타 백작 부부의 유해가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아직 몸이 성치 않아 마력 조절이 어려운 노아와, 성력으로 안개를 만들던 아미도 보트에 있었다.
“이쯤 하면 됐어.”
그만해도 좋단 레토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늘 위에 슬렁슬렁 떠 있던 푸른 빛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른 대원들은 손에 쥐고 있던 레이저 포인터를 껐다.
“후우….”
아미도 따라 성력을 거뒀다.
특함의 작전은 간단했다.
우선, 군용차에 있던 기뢰를 해안절벽과 오두막, 계단 곳곳에 설치했다.
가장 큰 대형 기뢰는 보트에 태워 해안절벽 아래 있다는 해안동굴에 숨겨 뒀다.
그리고 오두막 지붕에는 레토가 단검으로 피에타의 후계자가 쓸 법한 문구를 새겼다.
재빨리 준비를 마친 대원들은 개인함선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나사는 굳이 풀지 않았다. 이미 계단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구명보트에 노아와 아미, 나머지 짐과 유해를 챙기고 재빠르게 도망쳤다.
“그나저나 이건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아미가 피스트 준위에게 물었다.
“안개에 파란색 레이저를 쏴서 오러 흉내를 내다니.”
가짜 오러를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미가 성력으로 만든 안개를 해안에 넓게 흩뿌린 뒤, 대원들이 레이저 포인터를 파란색으로 바꾼 뒤에 하늘 위로 쐈다.
그리고 피스트 준위가 주변 공기와 안개를 마력으로 조금씩 뭉치고 움직이면서 다듬었다.
“아드벨로 마탑주의 선견입니다.”
가짜 오러를 만드는 방법을 제시한 피스트 준위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분은 마법이란 자연의 법칙이고, 즉 과학의 산물이라고 늘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마법을 더욱 다양하고 편리하게 발전시키셨습니다.”
“진정한 천재는 죽어서도 무지한 것들을 보살피시는군.”
레토는 짧은 감상에 진심 어린 존경을 담았다.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시스토 제국에서 완전히 벗어난 특함 대원들은 곧장 비레오 호에 연락을 취했다.
[클라시스 소장, 오랜만이야.]
레토는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비레오 호는 난리가 났다. 무려 열흘 만에 특함과 연결된 상황이었다. 그간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선내에 환호가 쏟아졌다.
[아이고 중장님!]
수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제1함대 사령관 클라시스 소장이 거의 우는 목소리로 성을 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이 망할 중장님! 살아는 계셨습니까! 아주 그냥 물에 빠져서 혼이 나야지!]
[불경한 소리 하긴. 13명 전원 무사히 생존했다. 아, 한 명은 미미한 부상을 입었다. 마력 운용이 조금 힘들어.]
[비레오 호가 근처입니다. 저희가 움직이겠습니다.]
[이쪽으로도 신호를 송출하게. 중간에서 접선하지.]
그리고 30분 뒤.
수평선 가까이서, 익숙한 함선 한 대가 조그맣게 보였다. 점을 콕 찍은 것처럼 작던 함선은 점점 커졌다.
비레오 호가 장장 열흘 동안 고생한 특함 대원들을 반겼다.
배에서 내려준 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자, 클라우스 소장을 비롯해 승선한 해병들이 각을 맞춰 줄 서 있었다.
클라시스 소장이 대표로 경례했다.
“무사 귀환을 환영합니다.”
“잠깐 사이에 늙었네, 소장.”
“중장님이 제 아들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신께 기도를 올리느라 바빴습니다.”
가볍게 농을 나눈 레토와 클라시스 소장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묵묵히 서로의 등을 도닥인 둘은 빠르게 떨어졌다.
“집으로 돌아간다!”
클라시스 소장이 커다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곧 비레오 호가 아들라보르 왕국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특함 대원들은 휴식을 위해 선실로 향했다.
노아는 흐트러진 마력 흐름을 진정시키기 위해 의무실로 옮겨졌다. 의무병 출신인 메델라 사나 하사도 함께 갔다.
“중장님.”
클라시스 소장이 레토를 따로 불렀다.
“…대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특함 대원들이 가지고 온 짐을 향했다.
정확히는 동그랗고 꼼꼼하게 모아 묶은 하얀 보따리 두 개를 정중히 응시하고 있었다.
“창고 하나를 급하게나마 청소해서 비워 뒀습니다.”
“고맙네.”
“그리고….”
클라시스 소장은 특함 대원들이 시스토 제국에 잠입했던 동안에 왕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