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오빠 언제 왔어? 할머니한테 또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도 이 집에서 나 걱정해 주는 사람은 너뿐이구나.”
클라레가 집 나갔던 오빠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
아스는 갑작스레 나타난 아티를 한 대 못 패서 안달 난 사람처럼 노려봤다. 시선에 담긴 적의가 노골적이었다.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지금 이 남자는 여기에 나타나선 안 되었다.
“…바쁜 거 아니에요?”
“바빠서 여기에 내려온 거야.”
아티는 저를 향한 단검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날카로운 날 부분을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자, 아스도 천천히 팔을 내렸다.
“호위차 온 거거든.”
그 호위의 대상이 카일리코 국왕이란 사실은 감춘 채, 아티가 단검에 베여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오빠, 아스는 검날에 독 발라서 빨아먹으면 안 돼.”
“괜찮아. 어지간한 독에 내성 있거든.”
“내성이 뭔데?”
“독이 안 통한다는 뜻이에요.”
역시 마취제를 써야 했나, 아스는 투덜거리면서도 해독제를 탄 주스를 아티에게 따라 줬다.
그리고 물었다.
“왜 왔어요?”
“말했잖아. 호위 때문이라고.”
“큰 주인님한테 들키면 또 처맞을….”
“이제 돌아오려는 모양이야.”
“…….”
크게 뜬 눈을 느리게 깜뻑거리던 아스가 입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곧 굳게 다물고 옆을 힐끔거렸다.
그새 어른들 대화에 흥미를 잃은 클라레는 다시 라디오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알아요, 그걸?”
아스가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새벽에 신호가 잡혔다가 끊겼거든.”
“신호?”
“우리 똥강아지 호신용 마도구.”
“아….”
식칼토끼 인형.
아드벨로 어른들이 직접 만든 마도구는 아드벨로와 마탑의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만든 최강의 무기였다.
아스 역시 올여름에 마도구가 보낸 위치 정보를 이용하여 간첩들을 추적했었다. 그 신호가 제국에서 잡힌 모양이었다.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어. 제국 방향에서 신호가 미약하게 잡혔다고. 하지만 한 시간도 안 돼서 끊겼다더라.”
“…….”
“그 녀석들 실력에 무슨 일이 생기는 게 더 이상하지.”
걱정하는 얼굴의 아스에게 아티가 염려하지 말란 듯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아스는 저 망할 놈에게 위로받았단 사실이 조금 떨떠름했다. 그래도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그럼 이제 가시나요? 이왕 오신 거, 식사는 하고 가시죠?”
“잠깐 짬 내서 온 거라 금방 가야 해.”
자리에서 일어난 아티가 아차차, 하면서 겉옷 주머니를 뒤졌다.
아스는 그제야 아티가 웬일로 수더분하던 머리를 멀끔히 뒤로 넘겨 정리하고, 상당히 비싸 보이는 정장 차림이란 것을 알았다.
“전해 줄 소식이 두 개 있어.”
“뭔데요?”
“원작을 비틀면 생기는 일, 네가 좋아하는 그 소설.”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너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지. 어쨌건 그 작가가 곧 다시 연재에 들어간다더라. 못해도 내년 초?”
“어, 그래요?”
아스는 내심 기뻐했다. 1부만 연재하고 오래 중단한 상태라 언제 연재할지 계속 기다리던 중이었으니 나름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스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꺼낸 조그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네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건 아는데,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안 내키면 버려.”
“뭔데요?”
“네 친부모님 주소.”
별생각 없이 쪽지를 펼치려던 아스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
특함 대원들은 마지막으로 점검에 들어갔다.
무기를 장전하고, 몸을 풀고 다시 시커먼 잠입복으로 입었다. 13명 전원 마법약을 마셔 머리칼을 어둡게 물들였다.
그리고 중요한 증거들은 물에 젖지 않게 꼼꼼하게 방수 처리한 뒤에 가방 안에 넣어뒀다.
“구명정은 어디에 있지?”
“절벽 아래에 조그만 해안동굴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미리 옮겨 뒀습니다.”
“모터가 달려서 처음부터 곧장 쓰는 건 어렵습니다. 해안을 빠져나가서 시야에 잡히지 않을 즈음에….”
레토가 아이스 중령, 피스트 준위와 탈출 계획을 짜는 동안.
“…….”
노아는 개인함선을 숨겨 둔 오두막 지하 창고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구석에 깔아둔 제국 군복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진 부모님의 유해를 향하고 있었다.
“…괜찮냐?”
아미와 셀린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니.”
노아가 가슴이 확연하게 오르내릴 정도로 숨을 깊이 내뱉었다.
“이젠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이 안 나와.”
“그게 원래 정상이야.”
노아의 옆에 앉은 셀린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제 이야기를 꺼냈다. 셀린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음, 나도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슬펐지. 너랑 비교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런 게 어딨어. 돌아가시면 다 슬프지.”
“난 늘 기뻤는데.”
아미는 자신이 겪은 죽음을 떠올렸다.
“신관 놈들이랑 성기사 새끼들 뒤졌단 소식 들으면 내 마음 언제나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랑살랑….”
“…너 그 성질머리로 어떻게 성녀를 했던 거야?”
“군인이 된 것도 용하지.”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한 노아가 한 번 더 숨을 느리고 깊이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거지?”
노아는 이 둘이 왜 저를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행동과 태도가 이해가 안 될 테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뭐, 그렇다기보다는….”
“그래도 일단은 걱정이 돼서 온 거야.”
아미와 셀린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근데, 솔직히 좀 의아하긴 했어.”
먼저 운을 띄운 건 아미였다.
“벨리피아 영지에서, 그, 성검에 적힌 문장이 잘못 해석된 탓에 피에타 가문이 천년이나 묶여 있었던 걸 알아냈잖아.”
“그랬지. 내 추측일 뿐이지만.”
“아니야. 그게 정답이었을 거야.”
아미는 피에타 저택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었던 노아의 오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거, 분명 성물이야.”
“음….”
“엄청난 거라니까? 평범한 성물이 아니야! 분명 신의 힘이 어느 정도 깃든….”
하지만 아미가 아무리 대단한 성물이라고 옆에서 떠들어도, 노아에겐 소 귀에 성경 읽는 것에 불과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천년을 그렇게 오해로 묶였으니까, 이젠 자유로워질 시간이야. 모두가 우러러보던 명예로운 가문은 드디어 안식을 찾은 거지.”
거기다 피에타의 천년이 마냥 헛된 것이 아니었다.
노아는 분명 들었다. 피에타의 존재를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존중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래서 마음 편히 피에타의 종말을 외칠 수 있었다.
피에타 가문은 이제 끝났다. 노아는 자신의 이름에 ‘피에타’를 붙이지 않을 것이고, 클라레는 아드벨로의 후계자로 자랄 예정이다.
그러니 보검의 쓰임 역시.
“…….”
음.
이번이 마지막이 되어야 할 터인데, 노아는 어째선지 그 결심을 쉬이 내릴 수가 없었다.
피에타에 대한 미련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 노아 본인조차 조금 놀라서 ‘이래도 괜찮은가?’라고 걱정이 될 정도로.
하지만 검에 대한 미련은 조금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야.”
아미는 그런 친구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셀린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복귀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노아 넌 계속 군에 있을 거야?”
“일단 그럴 생각이야. 너희는?”
“나도 전에 말했던 것처럼, 연금 타 먹을 때까진 버텨야지.”
군에 남기로 한 두 사람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셀린을 향했다.
“나도 남을 거야.”
셀린은 저에게도 나름의 계획이 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왕실 직계가 기사나 군 고위 관계자가 된 적은 있어도, 해군은 아직 섭렵하지 못했거든.”
“오오, 미래의 참모총장! 보르 대장님!”
휘파람 불며 아첨하던 아미가 멈칫했다.
“어라? 근데 네 오빠가 군 통수권자지 않아?”
“통수권자면 뭐하냐. 군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 고작해야 생도 졸업생이라고.”
자신이 해군을 장악하면 왕위 찬탈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셀린이 드물게 농담을 툭 던졌다.
셋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거기, 아가씨들.”
부르는 소리에 셋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레토가 서 있었다.
“그중 가운데에 앉아 계시는 아가씨가 마음에 드는데, 데이트 신청 좀 해도 되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결혼했습니다. 사슴 같은 남편이 있습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아미가 모두가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총대 메어 물었다.
“네 눈에는 중장님이 진짜 사슴처럼 보이냐? 옛날부터? 저 산만 한 덩치랑 사람 허파 뒤집는 주둥이가 사슴 같냐고.”
“귀엽잖아.”
노아가 뭐 문제 있느냔 듯이 친구들을 바라봤다.
“…진짜였어?”
“웩….”
믿을 수 없단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헛말을 중얼거리던 아미가 닭살이 쫙 돋은 팔을 미친 듯이 긁었다.
셀린은 입에 손가락을 넣으며 역겨운 제 심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음, 질투하기는.”
반면 혼자 들뜬 레토는 태연할 뿐이었다.
“어쨌건 이제 준비하지.”
곧 작전이 시작될 거란 레토의 말에 노아와 아미, 셀린의 표정이 동시에 진지해졌다.
“작전 중에 의견을 물어야 할 게 있어서 말이야. 회의가 끝나면 곧장 진행할 거니 채비들 해 둬.”
“그럼 이번에는 어머님 모시고 가 볼까….”
“아버님은 제가 들겠습니다.”
아미와 셀린이 친구의 부모님을 한 품에 안고 계단을 먼저 걸어 올라갔다.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노아는 입술을 희미하게 달싹거렸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듯했다.
“대위.”
레토는 그걸 못 본 척하며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다른 의도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어.”
“뭡니까?”
“여기를 폭발시키고 싶은데.”
“…예?”
노아는 놀라 휘둥그레진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는, 곧 오두막에서 진행된 마지막 임무를 위한 작전 회의에서 알게 됐다.
“병력 대다수는 현재 수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을 거다. 그리고 상당히 어수선한 상태겠지.”
군의 실질적인 권력자인 보르고 피에타가 사망했고, 피에타의 후계자가 나타나 본의 아니게 황제를 위협했다.
“벨로 대위가 황성을 일시나마 정지시켰지만, 그 때문에라도 피에타의 후계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거다.”
“저희의 존재를 파악했단 말씀이십니까?”
피스트 준위의 물음에 레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간첩이 있단 사실은 모를 거야. 하지만 피에타의 후계자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까진 알아챘겠지.”
황실 첩보원 살해.
군용차 탈취.
군인 피습.
피에타의 진정한 힘을 목도한 황제와 귀족들은 제정신이 아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