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검을 찌르려는 찰나도 없었다.
땅에 두 손을 디딘 노아는 재빨리 몸을 비틀었다.
다리는 아슬아슬하게 절 찌르려는 검을 피했다.
대신 반대쪽 발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보르고 피에타의 가슴을 세게 걷어찼다.
보르고 피에타는 그대로 넘어졌다.
“…….”
몸을 일으킨 노아는 말문이 막혔다.
조금 전 그 발차기는, 검을 찔러 넣을 욕심을 버리고 두 팔로 방어했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오러로 훈련해 신체가 전보다 강해졌다 한들, 피에타 출신의 보르고가 이걸 모를 리가 없다.
“…내가, 그래도.”
웅얼거리는 노아의 목소리에 한심함이 가득 맺혔다.
“그래도 네가….”
피에타의 후계 수업을 받았다고,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대원들에게 말했던 제 입을 때리고 싶어졌다.
‘어쩜 이렇게 한심해진 걸까.’
분명 노아의 어린 기억 속 숙부님은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와 제법 수준 높은 대련을 했었고,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검술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다고 종종 말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노아는 제국에 발을 들였을 때 다졌던 제 각오가 너무 한심해졌다. 진지했던 과거의 제 모습에 분노까지 느껴졌다.
“…….”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뭔가 싶었다.
상대가 너무 한심하니 화도 안 났다. 그냥 허무하고, 피곤할 뿐이었다. 노아는 그냥 쉬고 싶어졌다.
어서 빨리 이 모든 걸 다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복수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노아는 비로소 알았다.
굳이 따지자면 노아는 복수 예찬론자였다.
당한 게 있으면 갚아 줘야지. 이 말은 친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의탁하는 아드벨로의 중요한 가풍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이뤄 낸 복수의 결과가 너무나 부질없었다.
여태 삶의 목표였던 증오의 대상이 얼마나 하찮은지 알아 버린 순간,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내가 고작 이런 놈들을 죽이려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가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복수도 사람을 봐 가면서 해야 하는 거였어.’
수준이 어느 정도 맞고, 나의 보복에 괴로워할 줄 아는 놈들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양심이 있어서 후회도 할 줄 알아야 했다.
한데 그런 걸 할 줄 모르는 놈에게 제 과거의 상처를 보이고 정당한 복수를 위해 괴롭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멜라니 벨리피아와 마찬가지다. 보르고 피에타 또한 영원히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당장 고통을 회피하고자 미안한 척하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뒤통수를 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슬슬 끝내기로 했다.
실체를 드러낸 복수는 참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복수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허무할지언정, 이대로 넘어간다면 평생 후회할 테니.
적어도 공기 질은 좋아질 거다.
공기를 괜히 헛되게 소모하는 버러지들을 죽였으니, 하늘에 계시는 위대한 어머님도 좋아하실 테고.
파직.
파지지직!
귀를 움찔거리게 하던 미세한 소음을 시작으로, 곧 수천 마리의 새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날카롭고 거대한 굉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푸른 번개가 노아의 손끝을 타고 전신을 휘감았다. 오러는 더욱 색을 진하게 입어 갔다.
난폭한 기세는 주변의 공기마저 바꿨다. 자연의 법칙마저 거스르는 노아가 부서트리고 밟으면서 생긴 건물 파편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동시에 마스에 새겨진 음각이 반짝였다.
삿된 것을 베라.
이 문장 하나 때문에, 피에타 가문은 무려 천년이란 세월을 제국에 묶여 살았다.
그리고 노아는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문장에 새겨진 진실한 뜻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자신은 피에타의 진정한 후계자이자, 마지막 피에타로서.
제국을 등지고 제 삶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 피에타의 종말을 이 손으로 완벽하게 끝맺을 것이다.
노아는 오러를 두른 마스를 크게 휘둘렀다.
와장창창-!
창문이 가득 난 외부 벽 쪽으로.
“뭐, 뭐…!”
제게 공격할 줄 알았던 보르고 피에타는 믿을 수 없단 듯이 두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왜 널 상대로 오러를 안 쓰냐고?”
다시 오러를 거둔 노아가 한심하단 듯이 비웃었다.
“격이 안 맞는데 어떻게 쓰겠냐.”
“이, 이익…!”
무시당한 보르고 피에타가 시뻘게진 얼굴로 덤비려는 찰나.
콰앙-!
또 한 번 벽이 무너졌다. 이번엔 노아가 무너트린 창가 쪽 벽이 아닌, 복도 쪽 벽이었다.
그리고 노아가 한 짓이 아니었다.
당황한 보르고 피에타가 무너진 벽 너머를 바라봤다.
노아의 오러였다.
하지만 노아는 제 앞에 있었다.
“으음, 이상한데?”
뿌연 먼지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푸른 오러가 주변의 먼지를 치워 냈다.
장신의 사내가 페미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당황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보르고 피에타를, 마찬가지로 똑같이 응시하던 레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안 닮았잖아.”
그러곤 눈 깜짝할 사이에 보르고 피에타의 옆에 다가왔다.
보르고 피에타가 재빨리 검을 들어 방어하려는 순간.
레토가 페미나를 내동댕이쳤다.
“어?”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단 시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보르고 피에타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 잠깐의 빈틈 한 번에 등을 완전히 빼앗긴 보르고 피에타가 아차,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레토는 검을 쥔 보르고 피에타의 팔을 붙잡아 그의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기다란 검이 보르고 피에타의 턱 밑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넌 빈손으로 죽을 거다.”
그 무엇도 움켜쥐지 못한 채.
노아가 두 팔과 다리 하나로 땅을 디디며, 남은 다리 하나를 힘껏 뻗었다.
푹.
마치 케이크를 빵칼로 자르듯이.
“끅…!”
짧은 단말마와 함께, 보르고 피에타가 입에서 피를 흘렸다.
그리고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채 감지 못한 시체의 눈동자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조차 모르는 눈길이었다.
“…오러는 왜 안 썼어?”
레토가 조금 전에 떨어트렸던 페미나를 도로 주워들며 물었다.
노아는 피가 묻은 얼굴을 팔뚝으로 대충 닦아 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벌레 잡는 데 오러까지 쓸 필요 있어?”
“하긴.”
레토가 싱긋 웃었다.
벼룩 잡는다고 집을 태울 필요는 없었다.
“찾았어?”
이번엔 노아가 물었다. 피가 흥건한 마스를 허공에 가볍게 휘둘렀다.
여기저기 균열이 패인 바닥에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레토는 대답 대신에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그럼 이만 가자.”
노아가 몸을 휙 돌렸다.
***
두 사람은 완전히 무너진 벽을 통해 저택 밖으로 나왔다.
“지원 병력은 안 보이는군.”
“아마 좀 걸릴 겁니다.”
노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택에 있던 자들은 전부 죽였습니다. 동부 해안으로 집중시킨 병력 이동도 한몫했습니다.”
하지만 벨리피아 영지에서 일어난 폭동 때문에 병력은 다시 서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도망친 저택 고용인들도 분명 신고를 했을 터다.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저택 밖으로 나오니, 먼저 나와 있던 대원들이 트럭에 올라타 있었다. 전조등을 켜지 않은 트럭이 조용히 엔진을 돌렸다.
“빨리 타십시오!”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가 소리 죽여 외쳤다.
“그 전에 잠깐.”
저택을 향해 우뚝 선 노아가 레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페미나를 돌려주십시오.”
페미나를 검집째 던진 레토가 물었다.
“얼마나 걸리는 거지?”
“대단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마지막일 테니 똑똑히 지켜보십시오.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
노아는 받아 든 페미나를 땅에 푹 꽂았다. 모래에 나뭇가지가 가볍게 박히는 것처럼 쑥 들어갔다.
그러고는 오러를 전신에 휘감은 상태로 마스를 뽑았다.
순간, 거대한 폭풍우가 노아의 주위로 휘몰아쳤다. 어두운 밤하늘 위로 먹구름이 일더니, 그릉그릉 천둥이 울렸다.
“…오러는.”
“오러는.”
눈앞에 있는 저택 역시, 노아에겐 부모님과의 추억으로 가득한 소중한 곳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훈련하고, 어머니에게 공부를 배우고.
까불거리다 혼나고, 벌서다가 도망치고.
잠들 때면 늘 부모님의 입맞춤과 다정한 자장가 속에서.
“…….”
고개를 살짝 떨군 노아의 다물린 턱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문드러진 속을 한 번 더 참고 견딜 뿐이었다.
이젠 익숙한 인고였다.
“오러의 근본은 인고란다.”
“인고?”
“참고 견디는 괴로움이지.”
“그치만 저는 안 괴롭게 오러를 만드는데요? 봐요!”
“요 망아지 같은 녀석. 그런 거로는 이 아비에게 상처 하나 못 남겨. 이 봐라. 볼에 가져다 대도 흉 하나 안 나잖아.”
“흥, 그거야 아버지는 저보다 강하니까 그런 거죠.”
“…이젠 네가 나보다 강해져야 한다.”
“제가 세계 최고가 될 거예요!”
“그럼 잘 보거라. 하나도 빼먹지 말고, 네 머릿속에 전부 기억해 둬야 한다.”
라우스 피에타는 제 죽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곧 헤어질 딸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오러의 근본은 인고다.
몸속에 흐르는 마력을 강제적으로 변환시킨 것. 폭력적이고 거칠게, 모든 것을 파괴하는 날 것의 잔혹함.
이는 인간의 본성이고, 자연의 강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성질이었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잔혹함을 억누르고, 견디고, 강제로 다스려야 했다. 피에타는 그런 힘을 타고났다.
그리고 언제나 그 힘을 적재적소에 쓰려고 노력했다.
이제 노아는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마지막 후계자였다.
“오러는 인고….”
참고, 견디어야 하는 잔혹함.
그래서 노아는 7년을 참고 버티었다.
쾅!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 속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가까이서 떨어졌는지, 주위가 새하얗게 번쩍였다.
이어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마스를 휘감은 푸른 오러는 점점 커졌다. 파직파직 튀어 오르는 오러는 이제 노아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노아가 상체를 살짝 낮췄다.
어린 시절, 처음 검을 쥐고 기초 훈련을 배우던 그때처럼.
아주 조심히, 신중하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마스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가로베기였다.
고요한 수면에 작은 구슬 하나 떨어트려 잔잔한 파문을 만들어 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움직였는데도 정적인 것 같은 기묘한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쾅! 콰앙!
파지지직!
그러나 천년의 고택이 가로로 길게 베이면서 무너지는 광경은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였다.
빠른 동작을 따라오지 못한 오러의 우렛소리가 뒤늦게나마 세상의 모든 것을 찢을 것처럼 우렁차게 울렸다.
“…….”
반파되어 무너지기 시작한 피에타 저택을 바라보던 노아가 마스를 땅에 꽂고, 반대편에 있던 페미나를 뽑았다.
페미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기 무섭게 저택 위 먹구름에서 심상찮은 기류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