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와장창.
“어머, 실수!”
한쪽 눈을 깜찍하게 찡그린 아미는 진열장 안에 있던 것을 낚아챘다.
벨라와 클라우스도 다른 것들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서재였다. 문학도서만 꽂아 놓은 책장의 세 번째 칸도 확인했다.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제국어를 잘 모르는 벨라와 클라우스는 아미가 서류를 읽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다.
“…요것도 중요한 증거.”
아미가 부러 활짝 웃었다.
아미는 서류들을 챙겨 제 가방 안에 넣었다. 태연하게 굴곤 있지만, 속은 꽤 말이 아니었다.
‘X발, 이 미친 새끼들.’
노아와 중장님이 왜 그렇게 질색했는지 알겠네.
이곳 서재에도 아주 중요한 문서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집무실에서 찾은 증거와 결이 달랐다.
파급력만 따진다면 이쪽이 몇 배나 더 위험했다.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서재에 있던 서류는 바로 디모네 닉스가 보르고 피에타와 전쟁을 어떻게 일으킬지 도모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선왕의 서명까지 적힌 대리 위임장도 있었다.
‘내가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지.’
아미는 가슴을 몇 번이고 몰래 쓸어내렸다. 만약 벨라나 클라우스가 먼저 봤다면 정말, 속된 말로 X될 뻔했다.
당연하게도, 아미는 이걸 구태여 벨라와 클라우스에게 말하지 않았다. 다른 대원들에게도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 역시 7년 전 전쟁의 내막은 영원히 묻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진실이 드러나 봤자 오히려 뒤숭숭해질 뿐이니까.
“그나저나….”
아미가 서재를 나오면서 흥얼거렸다. 주정뱅이의 노래 같은 흥얼거림이었다.
“저쪽은 어쩌고 있으려나.”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닐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심 걱정도 되었고.
“…역시, 살아 계시지는 못한 건지 말입니다.”
벨라 토르 중사가 슬피 중얼거렸다. 클라우스 구베르 상사도 울적한 표정으로 같은 뜻을 내비쳤다.
“그들의 죽음을 함부로 안타까워하지 말자고.”
아미가 성호를 그었다.
***
레토는 페미나가 이끄는 곳으로 계속 움직였다. 뮤트 플라치드 병장이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침실로 보이는 곳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역한 시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지간해서 시가 좀 피운다고 냄새가 이렇게 지독하진 않는데, 그것도 귀족의 저택이 말이다.
‘관리를 아예 안 받았거나.’
청소해도 안 될 정도로 미친 듯이 피웠거나.
시가 냄새를 맡으니 절로 불쾌한 인물 하나가 떠올랐다. 제 어릴 적 기억보다 훨씬 늙었던 생부도 시가를 참 좋아했었다.
그래서 레토는 연초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쪽이군.”
그는 페미나가 격렬히 반응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붉은 느낌의 벽지가 발린 벽이었다. 뮤트가 주먹으로 벽을 쳤다.
퉁퉁.
“…내부가 비어 있습니다.”
“여기에 계시나 보군.”
레토가 허리춤에 찬 페미나를 뽑으며 말했다.
“물러나.”
뮤트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식은땀이 삐죽삐죽 흘렀다.
군인이기 전에 거대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로서, 검에 깃든 날것의 파괴력과 폭력성에 겁을 먹었다.
레토는 오러를 머금은 페미나를 가볍게, 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동작으로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부서지면서 퍼진 먼지가 가라앉으니 그 너머로 비밀 통로가 보였다.
“…….”
놀란 뮤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차피 벨로 대위가 난리 폈잖아.”
이 정도야 뭐.
검을 도로 넣은 레토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중장님도 오러를 쓸 수 있습니까.”
“응.”
노아가 충전해 준 오러를 빌려 쓰는 것이지만, 레토는 그것까진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통로로 들어가기 전에, 둘은 커다란 침대보 하나를 집어 들었다.
“…….”
통로를 걷는 내내 말이 없던 뮤트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따라 우리 병장이 말이 많아서 좋군.”
“죄송합니다.”
“아니야, 사실 나 역시 잘 모르겠어.”
하지만 레토가 잘 모르겠다고 한 건 뮤트와 조금 다른 것이었다.
노아의 속은 당연히 말이 아닐 것이다. 그저 참고 있을 뿐이지. 같이 온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그래야 함이 옳았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내비친 감정의 동요를, 레토는 내심 다행이라고 여겼다.
마냥 참는 것에 익숙하다면, 그건 속이 보통 문드러진 것이 아닐 테니까.
이미 문드러졌대도 적당히 문드러져야지.
다만.
‘검에 적힌 문장.’
시선을 살짝 내리면, 허리춤에 찬 페미나가 보인다. 이 검에도 똑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삿된 것을 베라.
아마 노아의 추측이 맞을 거다. 황실을 위한 충성을 맹세하는 문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삿된 것을 베라는 의지 그 자체겠지.
그리고 이는 피에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데도 노아는 멀쩡했다.
멀쩡하기만 할까, 저 사실을 알아챈 뒤부터 눈에 띄게 안정을 찾기도 했다.
‘그냥 울어 버리지.’
레토는 그마저도 노아가 계속 제 속을 감추고 참는 것 같아 위태로워 보였다.
태연한 척 구는 것도 아니고, 정말 태연해 보이는 것도 걱정이었다.
너도 날 이래서 걱정했을까.
나보다 더 속이 곪았을지 모를 너에게, 나는 참 어리광을 많이 피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비밀 통로를 걷던 중.
“…….”
“…….”
눈앞에, 두 구의 시신이 나타났다.
살점은 전혀 없는 해골 두 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양만 해골이지, 처음에는 보석을 깎아 만든 모형인 줄 알았다.
어둠 속에서도 두 해골은 반짝거렸다. 오러로 변형된 파란색 뼈가 저와 똑같은 뼈로 만들어진 페미나에 반응하는 중이었다.
대신 허리춤에 찬 페미나는 쿵쿵거리던 공명을 멈췄다.
완벽한 파란색으로 물든 해골은 키가 크고 골반이 작았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파란빛이 연하면서 얼룩진 것처럼 흰색이 남아있는 것은 키가 작고 골반이 넓었다.
누가 두 해골을 이곳에 옮겼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호의와 존경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레토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따님과 결혼한 레토 오케아누스입니다.”
그는 처음 뵙는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자기소개를 했다.
“아들라보르 해군 본부에서 근무 중이며, 전공을 쌓아 중장까지 올랐습니다.”
그러곤 대뜸 잘못을 고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따님 속을 참 아프게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나중에 꿈에서라도 뵙게 된다면 제 뺨과 머리통을 세게 때려 달라는 청을 끝으로 인사를 마쳤다.
살짝 떨어진 뒤에서 마찬가지로 무릎 꿇고 있던 뮤트가 챙겨 온 이불보를 반으로 쭉 찢었다.
지이익-.
갈라지는 소리가 비밀 통로를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가지고 있는 장갑 중 가장 깨끗한 것을 손에 꼈다. 정중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조심히 유골을 이불보에 옮겼다.
흘러내리지 않게 꽁꽁 싸매고, 몇 번이나 둘둘 만 뒤에 단단히 매듭을 묶었다.
비밀 통로 밖으로 나오니, 증거를 찾으러 갔던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중장…!”
반갑게 손들고 인사하려던 아미가 멈칫했다.
그들은 레토와 뮤트의 품에 안긴 커다란 보따리를 발견했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라며, 아미가 성호를 긋고 짧게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니 이걸 그대에게 맡기지.”
레토는 들고 있던 유해를 아미에게 넘겼다.
“내 장인어른이시다. 잘 모시도록.”
“아휴, 안녕하세요. 노아 친구입니다. 성녀예요.”
“양아치 같은 성녀지요. 질 나쁜 친구입니다.”
“우리 중장님은 노아의 사관생도 시절 사진을 받기 싫으신가 봅니다. 진짜 희귀한 14살 소녀 노아의….”
“이런 친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믿음직스러운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누가 들으면 중장님이 내 친구인 줄….”
눈썹을 찌푸리며 투덜대던 아미가 빨리 다녀오라고 레토를 재촉했다.
“노아에게 가시는 겁니까?”
“그래. 서둘러야지.”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
노아는 보르고 피에타에 대한 저의 평가를 빠르게 수정했다.
‘저런 놈이 아니었는데.’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아니, 그건 또 아니었다. 노아는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나름 확신했다.
분명 7년 전의 보르고 피에타는 제가 감히 함부로 덤빌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저자의 실력만큼은 확실하게 인정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제 눈앞에서, 오러를 두르지도 않은 평범한 검격을 막느라 필사적으로 허덕이는 이 버러지는 뭐란 말인가.
‘벨리피아도….’
벨리피아에게도 딱 이런 기분을 느꼈었다.
허망함.
고작 이런 것들 때문에 내가, 나와 클라레가 그런 수난을 겪었다니.
우리 가족이 그렇게 어이없이 당했단 말인가.
노아는 검을 휘두르는 중에도 보르고 피에타를 여유롭게 관찰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살짝 튀어나온 배였다. 올봄에 체포했던 플랜시 전 소장도 저런 몸이었다.
몸을 단련해야 할 놈이 술만 퍼마셨단 뜻이었다.
술 마시는 건 죄가 아니래도,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역한 시가 냄새가 났다.
노아는 비흡연자라 시가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도 어지간히 독한 것을 피운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미친 새끼.’
이걸로 확실해졌다.
보르고 피에타도, 멜라니 벨리피아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지난 7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에 안주한 채, 모든 것을 망쳐 놓았음에도 자신들과는 관련 없단 듯이 다 끝난 것처럼 굴었던 거다.
그래서 노아는 오러를 쓰지 않았다.
저런 놈을 상대하는 데 오러를 쓸 필요를 못 느꼈다.
“왜 오러를 쓰지 않는 거냐!”
보르고 피에타는 오기가 생겼는지, 되레 오러를 쓰라고 버럭 소리쳤다. 그래서 노아는 더욱 오러를 쓰지 않았다.
그래도 오랫동안 수련했던 기본기는 탄탄했기 때문에, 노아는 방심하지 않고 집중했다.
“아아악!”
보르고 피에타는 그런 노아에게 밀리는 이 상황을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동작을 크게 했다가 도리어 빈틈을 포착한 노아에게 옆구리를 베였다.
아주 얕고 가늘게, 일부러 상처가 크지 않게끔.
그럴수록 노아는 점점 지루해졌다.
그러다 문득.
“…….”
노아가 대뜸 다리를 길게 뻗었다. 발차기였다.
빈틈이라 생각한 보르고 피에타는 저를 향해 뻗어진 다리에 검을 그대로 찔렀다.
다리에 구멍을 뚫으면 치명상까진 아니어도 더는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크아아악!”
하지만 비명을 지른 건 보르고 피에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