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마지막?”
보르고 피에타의 한쪽 볼이 움찔거렸다.
“네가 마지막 후계자라고?”
그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로 노아를 노려봤다.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입에서 침이 튀어나올 만큼 거칠게 소리쳤다.
“마지막이 아니다! 피에타는 아직 살아 있어!”
“가문을 이 지경까지 만든 새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살아 있어! 이 내가! 보르고 피에타가!”
제 가슴을 두들기던 보르고 피에타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피에타의 후계자라며, 경기에 가까운 발악을 보였다.
“내가 있는 한, 피에타는 영원할 것이다!”
“…….”
진짜 후계자도 아닌 주제에.
노아는 저 말이 목구멍을 넘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젠 열등감이란 단어도 귀여울 지경이었다. 수많은 인간군상 중에서도 보르고 피에타는 단연코 최악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다 못해 현실감각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과거의 헛된 명예로 제 두 눈을 가리고, 모든 것을 멈춰 버렸다.
만약 조금이라도 제 부덕을 직면하고, 계속 극복하고자 노력했다면 피에타 가문을 정말로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노아는 빠르게 제 생각을 정정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이었다면 일찌감치 가주가 됐겠지.’
노아는 새삼, 피에타 가문에 이런 참상이 얼마나 많이 반복됐을지 상상해 봤다.
천년이다.
어지간한 나라도 그렇게 오래 유지되기 어렵건만, 피에타 가문은 무려 천년이나 한 나라를 수호하고 지켜 왔다.
한 나라를 수호한 가문을 향한 칭송과 명예는 타국에까지 퍼졌고, 만인이 우러러보는 이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마냥 값진 것일까.
값지다면 값진 것일 테지만, 보이는 것만큼 아름답고 찬란하지만은 않았다.
고귀한 가문의 명예로운 역사는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갈 맹독이었을 거다.
피에타 가문이라고 늘 대쪽 같았을까.
곧은 절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안에선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것이다. 당장 저만 해도 지금 그 피해자이지 않은가.
하지만.
“난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노아는 저 말을 지껄이는 남자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가문을 이어받았어야 했어. 제국에 계속 반대하는, 황실을 수호하지 못하는 피에타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고, 군인들을 마약으로 세뇌시키고, 형제와 가족을 죽였어?”
“…대의를 위해서다.”
쾅-!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보르고 피에타의 코앞까지 접근한 노아가 검을 휘두르는 소리였다.
오러를 두르지 않았음에도, 노아의 검격은 숨을 조이는 위압감을 자아냈다.
눈으로 따라오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까지 더해지는, 검을 짓누르는 무게감이 대형 마동력차에 몸이 부딪치는 것과 똑같았다.
“…윽!”
보르고 피에타가 이를 바드득 갈며 두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가 선 바닥이 쩍쩍 금이 쩍, 쩍 가기 사직했다.
먼저 물러선 건 노아였다.
일부러 검을 크게 휘두르며 몸을 내빼는 순간에 보르고 피에타가 가까이 파고들었다.
탕!
노아는 그 찰나에 총구를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보르고 피에타는 아슬아슬하게 총알을 피하며 검을 움직였다.
“비겁하게 총 따위를 들고 싸우다니!”
보르고 피에타가 거리를 더욱 벌리며 외쳤다. 그러면서 등 뒤를 힐끔거렸다. 벽과의 사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
반면 노아는 어느샌가 방 중앙을 보란 듯이 차지했다.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은,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자신이란 듯이.
“…기어코.”
시간을 끌듯, 보르고 피에타가 말했다.
“아들라보르의 개가 된 거냐.”
“시스토의 개였던 적도 없어.”
노아는 그 점 하나만큼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시스토 제국에 제대로 된 충성심을 가지지 못한 것.
‘어쩌면 부모님도….’
부모님도 그 점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딸을 자유롭게 키웠던 게 아닐까.
만약 저까지 보검에 적힌 문장에 사로잡혔다면 부모님과 함께 이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마스를 쥔 노아의 손에 힘이 가득 실렸다.
“그럼 넌 뭔데?”
힘이 실린 손과 정반대로, 노아의 가라앉은 눈빛이 얼핏 차분하다 못해 무감하기까지 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단 듯이.
그냥, 길에 흔히 널린 돌멩이 하나 보듯.
“조국과 가문을 말아먹고, 제 가족을 죽인 넌….”
“…….”
“넌 뭔데?”
시스토의 개라도 되나?
노아의 물었다.
“개라도 되어서 결국, 원하는 대로 제국을 위해 피에타의 명예를 드높였나?”
“…….”
보르고 피에타는 침묵했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자격이 없는 탓이 아니라, 대답할 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노아는.
“…마냥 버러지인 줄 알았는데.”
그 뻔뻔한 침묵이, 본인조차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데도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이.
아주 불쾌했다.
“그냥 쓰레기였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노아는 마스를 빠르게 휘둘렀다.
발돋움한 자리에 커다란 홈이 파였다.
캉! 캉! 검날이 부딪힐 때마다 노아는 계속 전진했고, 막느라 급급한 보르고 피에타는 점점 뒤로 밀려났다.
이제 그의 입술에서 피가 한 줄기 또르르 흘렀다. 버티느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탓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든 반격의 틈을 찾으려고 해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훈련받은 거지?’
보르고 피에타는 제 조카가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가르치고 이끌어 줄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오러를 지닌 자의 검술은 아무나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라보르에 이 녀석을 훈련시킬 만한 실력자는 없다.
‘기껏해야 아드벨로와 오케아누스 정도일 텐데.’
그러나 피에타와 비교하면 격이 너무 떨어졌다.
오러를 쓸 줄 모르는 타국의 미개한 가문 따위가 어찌 피에타를 가르친다고.
그래서 얕잡아봤다.
“…지금이라도!”
검과 검을 사이에 둔 채, 코앞까지 다가온 노아에게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무슨 개소리를 또 지껄이려고, 노아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보르고 피에타에게서 나온 말은 정말 예상을 뛰어넘었다.
“피에타를 다시 일으키자.”
“…….”
검에 실렸던 힘이 눈에 띄게 빠졌다.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이해한 보르고 피에타가 어색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노아는 조용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내가 조금 실수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제국을 위해서였다. 황실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서!”
“…….”
“노빌리아, 네겐 미안하다. 그러나 너도 피에타이지 않으냐.”
입술을 어떻게든 올리며 눈꼬리를 휘는 모습이 비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노아는 여전히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내 연륜과 너의 실력만 있다면, 피에타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어쩌면 또 다른 명예와 역사를….”
보르고 피에타의 말은 요컨대, 자신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너는 아직 어리고 제대로 된 경험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대외적으로는 자신이 나서겠다고. 즉, 노아 너는 뒤에서 자신의 지원군이 되어 달라고.
“…….”
노아는 대답하는 대신에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기를 세 번 정도 반복했다.
허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빈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저 무방비한 모습에 방심해서 기습을 시도했다간 도리어 목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잠시 고민한 후.
“…너.”
노아가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왜 오러를 쓰지 않지?”
“……!”
보르고 피에타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 그게 무슨….”
“아, 내가 질문을 잘못했네.”
노아가 다시 질문을 정정했다.
“왜 오러를 못 쓰는 거지?”
보르고 피에타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역시, 이상하다 했지.”
저택에 발을 디뎠을 때, 죽은 부모님의 오러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스와 페미나가 그들의 흔적을 느끼고 공명한 탓도 있지만 분명 존재감을 느꼈다.
한데 정작 살아 있는 보르고 피에타의 오러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 예측이 맞았네.”
노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가볍게 나온 혼잣말은 왕국어였다.
이젠 제국어보다 더 익숙해서, 꿈을 꿀 때도 왕국어가 나왔다.
그래서 보르고 피에타는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알아들었다.
“무슨 소리지.”
“별거 아니고.”
노아가 내리뜬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아까도 말했잖아.”
눈앞에는 삿된 것 하나, 그것만이 있었다.
“끝을 내겠다고.”
***
아미와 벨라 토르 중사,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는 작전대로 집무실부터 향했다.
노아가 화려하게 난동을 부린 탓에 저택은 조용했다. 고용인들도 전부 도망쳤는지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딱 하나.
자신들의 발밑에서 느껴지는 난폭한 기운만 빼고.
“…새삼스럽지만.”
벨라가 마른침을 괜히 꿀꺽 삼켰다.
“중장님, 정말 안 죽은 게 용하지 말입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내 말이 말이다.”
아미가 혀를 내둘렀다.
노아가 건물을 부수면서 흘렸던 오러의 잔재가 아직도 선명했다.
본연의 힘도 아닌 잔재만 남아있는데, 당장이라도 미쳐 날뛸 것처럼 그렇게 거칠고 사나운 기운은 태어나 처음 느껴 봤다.
‘이게 오러….’
전설이나 다름없던 피에타의 상징.
그런 피에타에게 허구한 날 까불고 능글거렸던 제 상관.
“그게 사랑이란 거 아니겠냐.”
잡담을 마친 셋은 집무실을 살피기 시작했다. 우선 노아가 앞서 말한 책상부터 살폈다.
집무실 책상 두 번째 서랍은 잠겨 있었다.
황금색 열쇠 구멍이 눈에 띄었지만, 벨라가 힘을 살짝 주어 서랍을 여니 가볍게 부러졌다.
안에는 수십 통의 편지와 서류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빠르게 훑어보던 아미가 곧 한쪽 입꼬리를 사악하게 끌어올렸다.
“찾았어.”
보르고 피에타가 디모네 닉스와 내통하고 연락한 증거들이었다. 심지어 군 관련 기밀을 포함하고 있었다.
노아가 정답이었다.
드디어 임무가 끝난 순간이었다.
“중위님! 중사님!”
그때,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가 아미와 벨라 토르 중위를 불렀다.
“이것 좀 보십시오.”
“뭐야, 또 증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는 진열장에 장식된 무언가를 가리켰다.
“…….”
그걸 본 아미가 에잇, 하면서 주먹으로 유리창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