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216화 (216/245)

216.

황실 첩보원들이 이 누추한 여관에서 만든 마약이, 세뇌용 마약 ‘피아’와 같은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프세드 렐리가 만든 마약이 뜬금없이 여기서 등장한 것도, 그리고 저놈을 지원했던 것이 신성청이란 것도.

그리고 신성청이 디모네 닉스와 결탁해 불법 사병 조직을 운영했단 것까지.

모든 사건이 전부 이어져 있었다. 바다를 건너 바로 이곳 제국에 와서야 비로소 결말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할 거야.”

“후작님의 예측이 옳았습니다.”

아이트라는 시스토가 아들라보르에 무력 폭동을 일으키려는 건, 현재 왕국에서 진행 중인 군 관련 재판 때문이라고 했다.

디모네 닉스.

모든 건 그 남자가 짜 놓은 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판의 끝에 도달했다.

“무력 폭동은 아들라보르의 전쟁 지지론을 키우기 위한 발판이었을 거야.”

“도대체 전쟁을 왜 또….”

답답해진 노아가 붉게 염색된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흩트리던 찰나.

따르릉-.

“…….”

“…….”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가 난 것은 1층 접수처에 설치된 전화기였다.

아들라보르에선 이제 구닥다리 취급받는 낡은 모양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벨을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전화는 홀로 무거운 침묵 속에서 울렸다.

“…….”

잠시 고민하던 레토가 수화기를 들었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상당히 고상한 말투인데, 듣는 사람 성질을 돋우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다들 지하실에 있느라….”

레토는 능청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히죽이는 입꼬리와 달리 싸늘하게 굳은 눈매는 서슬 퍼런 칼날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이번에 새로 발령되어 내려온 신입입니다. 지금 다른 분들은 지하실에 계십니다. 작업 중입니다.”

[마침 잘되었군. 그거 때문에 연락했다.]

레토는 수화기가 놓인 테이블 위를 뒤적거리다, 이내 손으로 뭔가를 적는 시늉을 했다.

벨라 토르 중위가 가지고 있던 장부 뒤 깨끗한 면을 찢어서 펜과 함께 넘겼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통화가 거의 끝나갈 즈음.

“…….”

도중에 한 번, 레토가 눈썹을 불쾌한 듯 찡그렸다.

“…뭡니까?”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노아가 물었다.

레토는 말을 신중히 아꼈다. 노아는 그가 어느새 손가락을 깍지 낀 채 꼭 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레토가 긴장할 때 자주 보이는 습관이었다.

한동안 못 봤던 습관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약을 운반하라더군.”

레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 자정까지, 어느 귀족 나리 집으로 지금까지 만든 모든 마약을 옮기라는 지시였다.”

“어디로 말입니까?”

레토는 아까 전화 중에 받아 적은 주소를 내밀었다.

“이쪽으로 옮기라고 하는데….”

주소를 본 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얼굴은 곧 분에 겨운 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역시.”

내 이럴 줄 알았단 듯이, 레토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대원들에게 설명해 줬다.

“어느 귀족 나리의 집이 피에타 저택, 아니, 백작저라는군.”

대원들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황성에 발을 들이자마자 엄청난 대어를 물었나 싶었더니, 이렇게 빨리 피에타 저택에 입성하게 될 줄이야.

그러니 분명, 그곳에 있을 그 남자 역시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대원들의 모든 관심은 노아에게 쏠려 있었다.

조금 전에 분명하게 비치던 노아의 분노에 다들 눈치만 살피며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적어도 하루 정도는 정보를 모으고 잠입을 준비할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대원들은 전부 같은 생각이었다. 이건 몰래 잠입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적의 방심을 틈탈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그러나 여기서 작전을 끝내 버리게 되면.

또 다른 임무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점을 필사적으로 고심하던 노아가 무겁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다신 안 올 기회입니다.”

“만약 이번 기회로 작전이 성공하면, 유해를 찾을 시간이 사라지게 될 거야.”

지금 피에타 저택에 잠입하게 되면, 십중팔구 보르고 피에타와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디모네 닉스와 내통했단 증거를 찾아내면 곧장 도망쳐야 했다.

직접 마주쳐서 소란을 키울 수도 없고, 설령 마주친다면 반드시 죽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붙잡혀 아들라보르에 악재를 안겨 줄 수 없었다.

“하루 정도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

그래서 레토는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대가 부모님의 유해를 어떻게 찾는지, 그 방법을 몰라. 하지만 그건 분명 시간이 걸리는 일이겠지.”

하루의 여유가 있다면 조금 더 작전을 짜서 안전하게 증거를 가져올 수 있다.

보르고 피에타와 마주칠 가능성도 현저히 줄어든다.

그리고 해안으로 돌아갈 때는 마동력차를 훔쳐서 달아나면 되는 일이다.

황성에는 그래도 차량이 제법 있었다. 훔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중간까지만 차를 타고 가도 돌아가는 길이 마냥 힘들지는 않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노아가 비웃듯 물었다.

“마치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알아.”

레토는 굳은 표정으로, 그러나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아를 붙잡았다.

“포기하려고 하는 거잖아.”

“포기해야 합니다.”

“야, 왜 그래! 그럴 필요 없어.”

듣다 못한 아미가 끼어들었다.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고. 뭘 벌써 그리 비장하게 포기해. 너 부모님 유해 찾으려고 7년을 참고 기다렸다며.”

최악의 경우엔 중장님을 여기 버려 두고 우리끼리 도망치면 된다며 아미가 달래듯이 말했다.

레토는 역시 적은 내부에 있다면서 아미에게 엎드려뻗쳐 10초를 시켰다.

“그렇게 포기하지 마. 다신 안 올 기회라고.”

엎드려뻗친 와중에도 아미는 친구를 걱정했다.

하지만 노아는 이미 각오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예 부모님의 유해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전보다 쉽게 제국에 들어올 수 있어. 우리가 손에 넣은 증거들은 제국을 압박하기 딱 좋으니까.”

그러니 그때 다시 제국에 돌아와서 부모님의 유해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나와 그대들이 더 중요해.”

“대위님….”

벨라 토르 중사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노아는 자신은 정말 괜찮다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나에게도 이건 나쁜 기회가 아니야.”

“당사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레토는 노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리고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전투복을 갖춰 입고, 군화로 바꿔 신는다.”

마지막 임무가 시작되려 했다.

***

시스토 제국의 천년 역사를 함께해 온 피에타 가문의 수도 저택은 서쪽 언덕 위에 있었다.

그리고 야심한 자정.

낡은 트럭 한 대가 조용히 언덕 위로 향했다.

엔진소리도 별로 나지 않는 것이, 애초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개조를 한 것 같았다.

차 안에는 두 남자가 타고 있었다. 트렁크 뒤쪽에도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옆에는 낡은 나무 상자가 대여섯 개 정도 쌓여 있었다.

잠시 후.

트럭은 어느 커다란 저택 앞에서 멈췄다.

여태 지나왔던 귀족 저택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아하고 화려한, 그리고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고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검과 총으로 무장한 사내 두 명이 있었다.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번에 새로 발령받은 신입입니다. 이름은 레….”

“아, 전화 받았던 놈이군.”

신입의 소개를 무시한 남자들이 뒤쪽 차 트렁크로 향했다.

뒤에 있던 사내가 눈치껏 상자를 내렸다. 그리고 지렛대를 이용해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붉은 기가 도는 보라색 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여태 만든 것보다 효능이 강하다고 합니다.”

마약을 운반한 검은 머리의 체격 좋은 미남이 설명했다.

가루를 살피던 남자가 숙였던 상체를 세웠다.

“다른 놈들은? 왜 너희만 여기 온 거지?”

“여관에 계십니다. 마무리 정리를 하신다고 저희만….”

“하여튼 그 늙은 여우, 눈치는 더럽게 빠르군.”

철컥.

등 뒤에서 저를 겨누는 총소리에 운반한 남자들이 반사적으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트렁크에 탔던 남자도 어느새 내려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희를 죽이실 겁니까?”

“우리도 미안하게 생각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총구를 겨눈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이젠 그만해야지. 너희는 너무 많이 죽였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그러니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죽어라.”

나라를 위해서.

그 말에 검은 머리의 남자가 입꼬리를 슥 올렸다.

“…그래.”

그러곤 대뜸 아들라보르 왕국어로 즐겁게 중얼거렸다.

“나라를 위해서, 라.”

“뭐, 뭐야…!”

총을 쥔 남자가 아주 잠깐 멈칫한 사이.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초를 세어 보지. 한 5초면 되나?”

하나.

픽, 픽.

둘.

컥! 윽…!

셋.

털썩, 쿵.

“넷….”

“됐습니다, 이제.”

어느새 레토의 옆에 선 노아가 소음기를 단 권총을 내리며 말했다.

“현관 입구를 막았던 남자 둘, 트럭 뒷길에 숨어 있던 셋. 도합 다섯을 처리했습니다.”

“역시 적의 본진은 위험하네. 어지간하면 살인은 안 하려고 했는데.”

“엄연히 따지자면 정당방위였습니다.”

노아가 주머니에서 복면 두 개를 건네며 말했다.

레토와 그 옆에 있던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가 이를 받아들었다.

“어쩌다 마주친 사람들이 전부 살인마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나 살려고 죽이는 건 아주 합법적인 정당방위입니다.”

“저희 간첩 아닙니까?”

레토의 옆에 서 있었던 클라우스가 복면을 쓰면서 중얼거렸다.

“저 아까 진짜 죽는 줄 알았지 말입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제 등 뒤에 끔찍한 구멍이 생길 뻔했습니다…!”

“우는소리 하지 마.”

노아가 클라우스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마침 트럭 뒤에서 복면 쓴 아미와 벨라 토르 중사가 나타났다. 뮤트 플라치드 병장도 어느새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금부터가 진짜 죽을지도 모르는 임무의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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