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금고 문을 열자, 새빨간 벨벳 쿠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살짝만 위로 올리면, 어른 팔뚝만 한 두툼한 쿠션 위에 돌돌 말린 종이가 보였다.
“찾았다…!”
셀린의 금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드디어 자신의 자유를 억압했던 비밀 협약서가 눈앞에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저 망할 종이 쪼가리 때문에 고생해야 했던 지난 7년의 세월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음.’
셀린이 냉정을 되찾았다.
‘종합적으로는 괜찮았네.’
친아버지란 인물은 저에게 단 한 번도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다. 정말 세상에 다신 없을 인간 말종이었다.
제 지지율 상승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또 전쟁을 진정시킬 명목으로 어린 딸을 이용하려고 했으니.
하지만 우습게도, 셀린은 그 덕에 제 생에서 가장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노력한 만큼 인정도 받고, 처음으로 친구들도 사귀어 봤다.
‘나쁜 것만 있지는 않았네….’
홀로 뿌듯해하는 중에.
“너 갑자기 뭐 하냐? 어서 빨리 서류 꺼내.”
“혹시 화장실? 많이 급해?”
그런 셀린의 속을 모르고 친구들이 초를 쳤다.
셀린은 남부에서의 7년이 가장 괜찮았다던 조금 전 제 평가를 철회했다.
“좀 있어 봐.”
셀린은 협약서를 꺼내기 전에 한 번 더 금고를 살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보안이 걸려 있어.”
금고 천장에 마법식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좀 어려운데? 둘 중 읽을 수 있는 사람?”
“나도 마법은 기본만 배워서….”
“나도 성력이랑 치유 마법 쪽만 배워서….”
변명을 마친 셋은 서로를 힐책하듯 노려봤다. 도대체 이런 것도 공부하지 않고 뭐 했느냔 듯이.
그러나 셋 다 군인이었기 때문에, 마법에 대한 지식은 기초를 제외하곤 거의 전무했다.
엄청난 재능을 지닌 마법사 겸 왕녀 겸 성녀 겸 소드 마스터이면서도.
그나마 셀린이 왕녀 시절에 가정교사에게 배웠던 실력을 가까스로 발휘했다.
“외부인이 금고 안에 손을 넣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거 같아.”
“그러면 답은 나왔네.”
아미가 소파에 눕혀 뒀던 멜라니 벨리피아를 가리켰다.
셋은 기절한 여자를 빗자루처럼 끌고 와, 인형 놀이 하듯 팔을 들어 금고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여자의 손으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냈다.
“그래도 이 여자, 도움은 되었네.”
멜라니 벨리피아를 도로 소파에 눕힌 아미가 씩 웃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정색이었다.
“미쳤어? 저 시X X 같은 XXX이 전쟁만 안 일으켰어도 이 고생 안 했어.”
“도움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지금 저 XXX의 머리 가죽을 뜯어다 XX에 처 XXX XX….”
“아, 알았어….”
내가 말실수했어.
황급히 사과한 아미가 성호를 그었다.
셀린은 돌돌 말렸던 종이를 조심히 펼쳤다.
“…맞아. 이거야.”
드디어 비밀 협약서를 확인한 셀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짐 하나를 비로소 덜어냈다.
노아와 아미가 고생했단 의미로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
금고에 가짜 협약서 서류를 넣고, 방 안의 흔적을 지운 세 사람은 나머지 대원들이 숨어 있는 외진 구석 방으로 향했다.
“…성공했군.”
돌아온 세 사람의 표정을 본 레토가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 다른 대원들도 긴장을 풀며 안심한 미소를 지었다.
첫 번째 임무가 무사히 끝났다.
레토가 노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 많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네.”
“무사히 임무를 수행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대수롭지 않단 듯이 대꾸하는 노아는 확연히 조금 전과 다르게 차이가 있었다.
본인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고,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사실 레토를 비롯한 특함 대원들은 노아가 무척 힘들어하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제 부모의 죽음이 머무는 땅인데 어찌 제정신이겠는가.
그런데 그 죽음에 가담한 배신자를 만나고 온 노아는 정작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였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벨라 토르 중사가 아미와 셀린에게 조심히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어휴….”
아미와 셀린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도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노아는 분명 평정심을 다잡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래서 멜라니 벨리피아에게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가했다. 그리고 제 가문의 숨겨진 진실을 알아 버렸다.
‘정말 왜 저러는 거지?’
그래서 둘은 노아의 저 태도가 무서웠다. 차라리 아까 멜라니 벨리피아를 고문하던 모습이 훨씬 인간미가 넘칠 정도였다.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웃는 것도 아니었다.
피에타 가문의 천년을 억압했던 진실은, 피에타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건 노아를 제외한 누구도 모른다.
“벌써 자정이 지났으니….”
아이스 중령이 시계를 확인했다.
“중장님, 민란이 일어날 때까지 하루가 남았습니다.”
“임무도 무사히 끝났으니, 지금 수도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레토가 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편리한 이동 수단을 보고 왔더니 다리가 갑자기 무거워지네.”
“그러나 차로 이동한다면 금방 들킬 겁니다.”
로간 미타스 상사가 반대 의견을 냈다.
사실 레토도 같은 생각이었다.
“맞는 말이야. 저걸 타고 수도까지 가기엔 위험요소가 너무 커. 우린 이 나라의 지형을 확실하게 알지 못해.”
유일한 제국 거주자였던 노아 역시 대략적인 영지 위치만 기억할 뿐, 이후에 만들어진 도로 같은 사정은 잘 모르고 있다.
하지만 저택에 있는 군용 트럭은 정말 탐이 났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기 싫을 정도로 탐나.”
살짝 투정 부리듯 말끝을 흐린 레토가 옆을 슬쩍 보았다.
일찌감치 그를 보고 있었던 노아는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말입니다.”
노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 주기 싫으면, 부숴 버려야지 않겠습니까?”
레토는 바로 그거란 듯이 싱긋 웃었다.
“그러는 김에 무기들도 손 좀 보고.”
우린 정의의 편이잖아.
레토의 제안에 대원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정의 하나만큼은 특함 대원들이 가장 자신하는 분야였다.
***
멜라니 벨리피아가 눈을 뜬 건 다음 날 저녁이었다.
“아악!”
저택이 떠나가라 지르는 비명에 하녀들은 또 지겨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 하루는 그래도 좀 잠잠하나 싶었더니, 다시 광증이 도진 것 같았다.
“누가 들어갈래?”
“난 싫어! 며칠 전에 들어갔다가 머리 터질 뻔했다고!”
“얘, 너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시, 신입입니다….”
혼자 새파란 얼굴로 오돌오돌 떠는 신입을 발견한 하녀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힉!”
결국 강제로 등 떠밀린 신입 하녀가 안으로 홀로 들어갔다.
“부, 부르셨…!”
헉!
하녀는 갑자기 제 어깨를 붙잡으며 눈을 부릅뜬 주인을 보자마자 숨을 헉 들이켰다.
“피에타가! 피에타가 날 죽이려고 해!”
“주, 주인님…!”
“죽이려고 했어! 죽은 여자가…! 내가 죽인 그 여자가 날 죽이려고 했다고!”
멜라니 벨리피아는 애꿎은 하녀를 붙든 채, 자신이 겪은 일을 횡설수설 떠들었다.
그러나 눈이 반쯤 뒤집힌 채로 침까지 튀기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모습은 너무도 기괴해서, 호소력은커녕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기사들 불러와! 어서! 아직 이 저택에 숨어 있을 거야!”
“네, 네에!”
가까스로 풀려난 신입 하녀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선배 하녀들에게 울먹이며 명을 전달했다.
곧 황실 기사들이 올라왔다.
“부르셨습….”
“피에타가 이 저택에 있다고!”
“부인? 그게 무슨….”
“그년이 날 죽이려고 했어! 그 망령이 날 베고 때렸어!”
멜라니 벨리피아는 기사들에게 제 입술과 손, 배를 가리켰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였다.
기사들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피에타는 멸문했다.
살아 있던 3대가 전부 죽었고, 거기에 가담한 것이 눈앞에 있는 저 여자와 남편이었다.
물론 마지막 세대인 후계자와 그 동생의 시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죽었을 거라고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확실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멜라니 벨리피아는 절 믿지 않는 기사들의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더니, 뭔가를 퍼뜩 떠올렸다.
“그래! 여기! 여기야!”
그러고는 대뜸 비밀통로와 연결된 벽을 가리켰다.
“이 안에서 날 고문했어! 날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부인, 일단 진정을…!”
찰싹!
옆으로 돌아간 기사의 뺨이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이 무능한 새끼들이! 침입자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해?”
“…부인.”
기사는 최대한 인내심을 끌어올렸다. 억울하게 맞은 뺨이 아팠지만, 미친 여자와 제대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통로를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비밀통로 안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고문을 당해 피를 흘렸다면서도, 통로엔 피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아, 아니야….”
믿기 어려운 건 멜라니 벨리피아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자신이 여기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고, 군홧발에 짓밟혔다고, 얼굴이 베이고 온몸을 난자당했다며,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그러나 누구도 믿어 주는 사람 없었다.
기사도, 하녀도.
“…….”
“…….”
다들 그녀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바라봤다.
“……!”
처음 겪어 보는 시선이었다. 자신을 동정하면서도 경멸하는 그 이중적인 시선에 당황해하던 멜라니 벨리피아가 퍼뜩 금고로 달려갔다.
“그, 그래! 어쩌면 아들라보르의 간첩일지도 몰라!”
그것들이 날 일부러 골리려고 이렇게 흔적을 지운 거야!
비밀 협약서를 떠올린 멜라니 벨리피아는 액자를 젖히고, 그 뒤에 감춰져 있던 금고를 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둘둘 말린 서류는 그대로였다.
“…하아.”
기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인.”
그러곤 멜라니 벨리피아의 손목을 잡아채 억지로 침실로 끌고 갔다.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잠은 제대로 주무셨습니까?”
“자, 잠깐! 난 멀쩡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주무시면 저택을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무것도 찾지 못하더라도 탓하시진 마십시오.”
노골적인 비아냥에 멜라니 벨리피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