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209화 (209/245)

209.

“그거 알아? 오로지 재미로 생명을 해치고 죽이는 건 인간이 유일하다는 거.”

“고양이도 재미 삼아 새를 잡아 죽이기도 해.”

“…내가 예를 잘못 들었네.”

치료를 마친 아미가 으챠, 하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신의 모습을 닮았어.”

신이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빗대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 신화는 유명했다. 아들라보르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위대한 어머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권능 중 일부를 주셨지.”

“마력?”

“쯧쯧쯧.”

이래서 속물들은.

아미는 셀린의 얼굴 앞에까지 손가락을 가져가 가소롭단 듯이 까딱거렸다.

그러곤 대뜸 가슴 앞에 손을 모아 쥐며 눈을 다소곳이 감았다.

“바로 사랑이야.”

“…….”

그 모습이 썩 거북했던 셀린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아끼고, 가진 것을 베풀고.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것 이외의 살생은 하지 말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시라고.”

그러나 이런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피조물들도 존재했다.

“어머님은 이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셔.”

자신의 품에 껴안기에 너무도 멀리 가 버린 것을 눈물로 안타까이 여기신다.

그러나 결단코 품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리는 신의 단호함은 아주 엄격하고 냉혹했다.

“성력만 해도 봐. 어머님의 의지에 반하는 짓을 하면 부작용으로 크게 고통받잖아.”

최악의 경우엔 죽기까지 하고.

설명을 마친 아미는 여전히 쓰러져 기절해 있는 멜라니 벨리피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여자는 분명 죽어서 큰 벌을 받을 거야.”

“신의 뜻에 반하는 삿된 것이라서?”

“수많은 삿됨 중에서 가장 타락하였지.”

그때였다.

“으악!”

느닷없이 어깨를 붙잡혀 돌려세워진 아미가 또 한 번 비명을 질렀다.

“끼아아악!”

“너 방금, 그거 무슨 소리야?”

노아가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놀랐잖아, X발! 애 떨어질 뻔했다고!”

“넌 무슨 성녀가 애 떨어진다는 말을 쓰냐….”

셀린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아미를 바라봤다. 이런 걸 신실한 딸로 삼은 신의 의도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삿된 것이 그런 뜻이라고?”

“그런 뜻이고 뭐고 간에, 갑자기 왜 이래?”

아미는 제 어깨를 부러질 것처럼 쥔 노아의 손을 가까스로 떨어트리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어깨에 열이 오를 지경이었다.

“보통은 내가 말한 종교적인 의미로 많이 쓰지 않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일상에서 흔히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말하는 중에 눈앞으로 검이 쑥 들어왔다.

“이거 좀 봐.”

노아가 마스를 내보였다. 셀린이 손전등으로 검을 비추니, 음각으로 새겨진 문장 하나가 보였다.

“…‘삿된 것을 베라’?”

아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좀 의미심장한데? 언제 새겨진 건데?”

“가문의 시조가 새겼다고 전승되고 있어.”

“무슨 의미로? 너희 가문 신앙심 깊었냐?”

“제국에 충성하는 마음이라면, 어지간한 신앙심보다 더 깊었지.”

피에타 가문의 모든 계승자는 이 문장을 제국에 충성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조가 직접 새겼다고 하는데,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 삿된 것은, 아마 제국을 위협하는 존재를 뜻하는 거겠지?”

“응. 일종의 충성 맹세인데….”

레토에게 페미나를 줄 때도 그런 의미로 설명했었다.

“그래서 제국에 충성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어.”

그것이 삶의 목적이고, 피에타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아미가 했던 말을 듣고 나니, 그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의문점이 떠올랐다.

“…이 검, 제국에선 전혀 쓰질 못했어.”

“하지만 피니치 구역에서 작전을 수행했을 때는 썼잖아.”

“그리고 지금도.”

아미와 셀린이 노아가 쥔 마스를 보며 말했다.

보기만 해도 파괴적인 기운이 선연한 검이었다.

조금 전에 노아가 분노했을 때는 검날에서 푸른 오러가 파직파직 튀어나왔을 정도로 난폭한 성질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노아가 말을 조금 더 수정했다.

“제국에선 100년 가까이 쓰이지 못했어. 황명을 받아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마다 부부검이 오러를 흡수하지 않았다고.”

“역시, 마스와 페미나는 오러를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오러를 아예 모르는 상황까지 왔어. 거의 전설로 치부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어머님과 그이는 여전히 오러를 만들 수 있잖아요.”

“그래. 나나 유스티아도 당신들이 검에 담은 오러를 쓸 수 있어. 그러니 마스와 페미나는 오러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어렸을 적.

그러니까, 제국이 전쟁을 선포하기 2년 전.

12살의 어린 노아는 어른들의 대화를 우연히 훔쳐 들었다. 그리고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피에타의 어린 망아지에게 그런 머리 아픈 이야기는 아직 남의 일이었다.

“…마스와 페미나는 오러를 거부하는 게 아니었어.”

노아는 비로소 알아챘다.

“이 검들은 처음부터 제국에 충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 거야!”

그리고 노아는 이것을 예전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제국은 곧 망할 거야.”

“이젠 제국이 ‘삿된 것’이 되어 버렸다는 걸.”

“내 목표는 선조들의 의지를 이어 피에타의 보검으로 삿된 것을 베는 거야.”

저만이 아니다. 부모님도 그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아들라보르로 망명할 준비를 했었다.

“마스와 페미나는 오러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노아는 할아버지가 했던 마지막 말의 뒷부분을 드디어 떠올렸다.

“…우리가 검을 잘못 쓰고 있었던 거야.”

부부검은, 피에타의 상징인 마스와 페미나는 애초부터 제국을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놓인 삿된 것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보검이었다.

“…으악.”

영문을 몰라 멀뚱히 있던 아미가 뒤늦게 저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너무 놀라서 굳은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는데, 셀린도 저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이건 정말….”

“…….”

모든 것이 잘못된 거였다.

최악의 진실이 드러났다.

피에타 가문은 처음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들이 검의 쓰임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려 천년이란 긴 시간 동안 충정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가늠도 되지 않는 긴 역사와 명예가 단숨에 무너져내렸다.

모두가 칭송하는 명예와 충정이 왜곡된 전승으로 인한 개고생이었다니.

‘천년이란 세월이 단숨에 허송세월이 되어 버렸잖아….’

셀린은 노아를 힐끔거렸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던 노아는 마스를 도로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희미한 떨림조차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얘들아.”

그러곤 옆에 있던 친구들을 불렀다. 괜히 눈치 보고 있던 아미와 셀린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노아는 그런 둘을 잠시 바라보다니 피식 웃더니, 바닥에 쓰러진 멜라니 벨리피아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슬슬 치우자.”

***

먼저 나선 아미가 비밀통로 문을 열어 방 안을 살폈다.

“아무도 없어.”

확인을 받은 노아와 셀린이 기절한 멜라니 벨리피아의 팔을 한 쪽씩 붙잡아 일으킨 뒤,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몸을 닦았다.

“내가 이 여자 몸을 닦는 날이 올 줄이야….”

천국 가신 부모님이 울겠네.

노아는 젖은 수건으로 멜라니 벨리피아의 몸을 닦는 제 처지를 한탄하듯 읊조렸다.

“야, 너 진짜 대꾸하기 곤란한 말만 할래?”

멜라니 벨리피아가 걸었던 목걸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던 아미가 투덜거렸다.

노아는 또 피식거리며 보란 듯이 대꾸 못 할 말을 골라서 했다.

“그럼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 내 부모를 죽이는 데 가담한 사람인데.”

“이것 봐. 또 대꾸 못 할 말만 골라서 하잖아!”

“그전에 주머니에 넣은 장신구는 도로 꺼내 놔라.”

셀린의 지적에 아미가 콧김을 툴툴거렸다.

“훔친 게 아니고, 주운 거야.”

그래도 결국엔 멜라니 벨리피아의 목에 다시 걸어 줬다.

이런 인간이 몸에 착용한 보석은 군용 트럭에 가득 담아 준다고 하면 받겠지만, 그래도 일단 사양할 마음은 있었다.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힌 뒤, 셋은 본격적으로 방을 뒤적였다. 비밀통로를 다시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동한 흔적을 발견할까?”

“바닥에 긁힌 자국이 생겼네.”

이걸 어쩌지, 하고 노아와 아미가 고민하던 중.

“…찾았어.”

벽에 걸린 명화를 살피던 셀린이 외쳤다.

“아까는 비밀통로도 찾아내더니! 좀도둑의 재능이 있었구나!”

아미가 잘했다며 셀린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이 자식이 왕녀한테 좀도둑 소리를 하네.”

“성녀한테 그런 소리 듣는 걸 영광으로 알아.”

“조용히 좀 하자, 고귀한 여인들아.”

또 다른 고귀한 여인인 노아가 액자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뒤에 조그마한 붙박이 금고가 있었다.

금고를 빤히 보던 세 사람이 서로를 힐끔거렸다.

“딸 수 있는 사람?”

노아가 물었다.

당연히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와 아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셀린에게 향했다.

빤히 응시하는 시선을 느낀 셀린이 어처구니없단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왜? 좀도둑 같아서 딸 수 있을 것 같냐?”

“아니면 아닌 거지, 뭘 예민하게 반응해.”

“X발, 진짜 딸 수 있으니까 짜증 나는 거야.”

셀린은 미리 챙겨 온 청진기를 꺼내 귀에 꽂은 뒤, 금고 가까이 달라붙어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술 마시고 도박하는 성녀에, 도둑질하는 왕녀라니.”

노아가 탄식했다.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응?”

“도박은 안 해!”

가만히 있다 욕먹은 아미가 억울하단 듯이 투덜거렸다.

“난 그냥 술 좋아하고 돈 내기를 좋아할 뿐이지.”

“성녀로서의 자각은 없냐.”

“성녀에 대한 편견을 지워. 나도 사람이라고. 난 뭐 밥 먹으면 진주보석 싸는 줄 아냐? 똥오줌 싸.”

“비유 진짜 참….”

“나도 마찬가지거든?”

얌전히 금고 따던 셀린이 저의 억울함을 항변했다.

“오빠 새끼가 만날 내 장난감이며 보석을 금고에 넣어 뒀단 말이야. 나라고 좋아서 이 기술을 익힌 줄 알아?”

“니네 오빠는 뭐 하는 사람이냐?”

아미가 물었다.

“국왕이다, 왜.”

“이 동네에 멀쩡한 오빠는 없는 거야? 노아네 오빠도 그러더만….”

“멀쩡한 오빠는 유니콘에 비견되는 상상의 짐승이지.”

셀린이 살짝 격양된 어조로 대답했다.

그때, 금고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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