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208화 (208/245)

208.

“피에타를 이용하라니?”

“자랑은 아닙니다만, 피에타의 명성은 지금도 드높습니다. 여전히 정의롭고 선한 가문입니다.”

노아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많이 닮았습니다. 제가 원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멜라니 벨리피아가 착각할지도 모른다고?”

“어떤 식으로든 놀랄 겁니다. 죽은 제 부모님이 살아났다고 착각하든, 행방불명이 되었던 시조카가 다시 나타났든.”

피에타의 생존은 시스토 제국에 경종을 울릴 것이다.

작전을 빠르게 수정한 특함 대원들은 아예 벨리피아 저택에 잠입했다. 굴절마법 마도구는 무척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기감이 좋은 군인들 몇몇은 특함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했다.

잠입한 대원들은 화려한 저택을 샅샅이 뒤졌다.

메델라 사나 하사가 말했던 대로였다. 저택 안에는 커다란 군용 트럭이 무려 3대나 있었다.

그리고 무기도 상당했다. 심지어 불법 개량된 라이플을 봤을 땐 모두가 질려 버렸다.

어쨌거나 모든 건 그들의 예측 대로였다.

이동수단, 무기, 감춰진 병력.

눈앞에 있는 이 모든 것은 멜라니 벨리피아가 누구도 믿지 못하며, 상당히 예민한 상태라는 방증이었다.

저택을 둘러본 특함 대원은 사용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빈방에서 몸을 숨기고, 멜라니 벨리피아의 동선을 살폈다.

그녀는 외출은커녕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저택에 주둔한 병력들도 그녀의 기행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들리는 비명과 물건 깨지는 소리에도 그러려니 했다. 깨진 화병 따위를 치우고 나온 하녀들도 지랄이라고 욕하기 바빴다.

그리고 한밤중이 되었을 때.

노아는 셀린과 아미를 데리고 멜라니 벨리피아의 방으로 잠입했다.

노아가 멜라니 벨리피아를 기절시키고, 아미와 셀린이 방 안을 뒤지는 동안.

“…….”

노아는 기절한 여자를 냉랭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방에 몰래 들어선 순간, 노아는 자신이 레토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죽이게 내버려 둘걸.’

아니, 그냥 저도 디모네 닉스를 죽이는 데 동참할걸.

하지만 간신히 붙잡고 있는 얄팍한 이성이 외치고 있다.

내가 왜 레토를 말렸는지 기억하라고. 여기서 이 여자를 죽였다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는 걸 잊지 말라고.

그래서 노아는 살의를 꾹 짓눌렀다.

‘…아.’

몸을 낮춘 노아가 멜라니 벨리피아의 왼쪽 눈 밑을 손으로 슥 닦았다. 짙은 화장이 살짝 지워지니 희미한 흉 하나가 보였다.

어린 노아가 남긴 추억이었다.

불쾌하던 속이 한결 개운해졌다.

“노아.”

그때, 셀린이 이리 와 보라 불렀다.

한참 벽난로 옆 벽을 만지작거리던 셀린이 몇 군데를 톡톡 두드렸다. 그중 한 곳에서 유난히 텅 빈 소리가 났다.

둘은 그곳에 몸을 기대어 힘을 실었다.

쿵!

그러자 벽이 뒤로 스르륵 밀려났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이 나타났다.

바깥과 통하는 곳인지, 미세한 바람이 불면서 습한 공기가 훅 들어왔다.

“역시 여기도 있었네.”

셀린이 씩 웃었다.

귀족 저택이라면 흔히 있는 비밀통로였다.

노아가 아미를 불렀다.

“아미.”

“잠깐만….”

책상 위에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종이들을 살피던 아미가 곧 뭔가를 가져왔다. 제국어로 쓰인 편지 더미였다.

“욕이 가득 쓰여 있는데, 발신자가 보르고 피에타야.”

“내용은?”

“디모네 닉스가 체포되어서 예민해진 부부의 살벌한 부부싸움. 증거가 될 거 같아.”

“좋아. 챙겨 두자.”

아미가 이를 주섬주섬 가방에 넣는 사이, 노아는 쓰러진 멜라니 벨리피아의 목을 쥐고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손전등을 켠 셀린이 말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바닥에 여자를 내동댕이치는 노아의 살벌한 모습이 불빛에 비쳤다.

셀린은 처음으로 노아가 낯설게 느껴졌다.

“죽이진 마라.”

“안 죽여.”

“우리의 계획은 이 여자가 환시와 환청을 볼 정도로 미치게 만드는 거야.”

“나도 알아!”

노아는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그러다 아차, 하며 셀린을 바라봤다. 셀린은 내 이럴 줄 알았단 듯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노아를 응시했다.

“…미안.”

“예민해진 거 알아. 그래서 조심하란 거야.”

“주의할게.”

“그럼 나도 한마디 해도 되냐?”

아미가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너무 심각한 부상은 안 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최대한 자중해라. 안 그러면 내가 저주에 걸릴 가능성이 커.”

“그거도 주의할게.”

“좋아. 시작하자.”

준비를 마친 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은 미리 챙겨온 수통을 쓰러진 멜라니 벨리피아의 얼굴에 콸콸 쏟아부었다.

“…커헉! 헉!”

찬물 맞고 정신 차린 여자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복부에 남은 둔탁한 통증에 정신을 번뜩 차렸고, 제 눈 앞에 펼쳐진 어둡고 눅눅한 공간에 겁을 먹었다.

그리고 저를 향한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유, 유스티아?”

설마 그 이름을 부를 줄이야.

노아는 언제나 자신이 친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 말을 많이 들었고, 저도 그 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멜라니 벨리피아는 노아에게서 그녀의 친모를 겹쳐 보았다.

‘하긴, 두 분 다 금발에 푸른 눈이었으니까.’

아버지가 조금 더 짙은 금발이었지만, 어쨌건 저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퍽 나쁘진 않았다.

‘나도 어머니를 닮긴 닮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노아는 기꺼이 제 어머니의 흉내를 내기로 했다.

누구보다 우아하고 상냥했던. 그러나 화가 나면 세상 무엇보다 무서웠던 그분을.

“멜라니. 날 알아보겠어요?”

“어, 어떻게! 어떻게 네가 왜…!”

멜라니 벨리피아가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쉿.”

노아가 주의를 주며 손에 쥐고 있던 마스를 휘둘렀다.

픽, 하고 무언가가 빠르게 베어졌다. 멜라니 벨리피아는 제 입가를 따끔하게 베고 간 찰나의 검격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더듬는 입가에 따뜻한 뭔가가 흥건했다.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나요?”

“아, 아아….”

“또 떠들면 다음엔 아예 목구멍을 쑤셔 버릴 거야.”

“…….”

겁을 먹은 건지, 아니면 경고를 알아먹은 건지.

멜라니 벨리피아는 여전히 악몽에 빠진 눈으로 노아를, 아니, 유스티아 피에타를 바라봤다.

유스티아가 말했다.

“그 목걸이가 눈에 익네.”

그 말에 멜라니 벨리피아가 재빨리 목걸이를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는 유스티아의 발치에 부딪혔다. 그걸 심드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망령이 피식 웃었다.

“어머, 날 죽였으면서 그건 또 탐이 났어요? 정말 상종 못 할 사람이었네.”

“…….”

“대답을 안 하니 아주 좋네요. 하지만 이제부턴 내 물음에 대답을 반드시 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푸욱.

“악! 아아악!”

멜라니 벨리피아가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제 손에 꽂힌 검을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 검이 뭘 자를지, 나도 이제 모르겠어요. 죽고 나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네.”

“아, 아아…!”

“왜 우리 가족을 배신한 거죠?”

유스티아가 물었다.

그러나 멜라니 벨리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기로 안 하는 게 아니라, 이 전초 없는 악몽에 너무 겁을 먹어 이지를 어느 정도 상실한 탓이었다.

“…….”

유스티아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또 비명이 튀어나왔고, 짜증이 난 망령은 벌어지는 입을 군화로 짓밟았다.

“야…!”

깜짝 놀란 아미가 황급히 노아를 붙잡았다. 손전등을 비추던 셀린도 충격 어린 시선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너 뭐 하는 거야! 이건 도가 지나친…!”

“고문하는 데 도가 지나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야!”

“…X발! 안다고! 알아!”

쾅!

끝내 터진 분노를 어쩌지 못해, 노아가 벽을 발로 찼다.

발로 찬 그대로 움푹 패인 비밀통로가 살짝 흔들거렸다. 노아가 외쳤던 울분은 메아리쳤다.

“알아! 안다고! 근데 왜 이딴 꼴이냐고!”

노아가 화가 난 건, 제 발밑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여자 때문이었다.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내 부모를 죽이고, 가문을 멸문시키고, 전쟁을 일으킨 공범자가 이렇게 하잘것없는 사람이었다고?

죽은 사람을 무서워하며 이지를 상실해 바들바들 떨면서 고통에 겨워 하는 이 꼴을 보고도, 노아는 속이 편치 않았다.

오히려 가슴에 묵직한 돌이 계속 쌓이는 기분이었다.

“이게 뭐냐고…!”

고작 이런 인간들 때문에.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그렇게 괴로웠다니.

“…그만하자.”

셀린이 말했다.

“이미 충분히 겁을 먹었어. 소변까지 지릴 정도로 겁을 먹었다고. 우리가 했던 말은 기억도 못 할 거야.”

세 사람의 목표는 멜라니 벨리피아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피에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공포감을 조성한 뒤, 기절시켜서 자신이 본 것의 진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그래야 이 저택을 떠날 때 영지민들이 부당하게 피해받지 않게 된다.

“노아, 셀린의 말이 맞아.”

아미도 이 이상은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노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뱉었다. 흥분으로 뜨겁게 끓어오르던 머리가 조금씩 차분해졌다.

“기절시키고 치료해.”

노아는 마스를 허공에 휘두르며 피를 떨어트렸다.

그 틈에 아미가 멜라니 벨리피아를 잠재우고, 그녀의 부상을 치유했다. 치유마법으로 먼저 지혈하고, 성력으로 흉터를 보이지 않게 없앴다.

“저주에 걸릴 것 같다더니?”

셀린이 괜찮으냐며 물었다.

“다행히 부작용은 없을 것 같다.”

“기준이랄 게 있어?”

“성력은 사람을 치유하고 보호하는 게 목적이거든. 근데 우리는 이 여자를 고문하고 괴롭히려고 했잖아.”

그러니 자칫 아미가 이 여자를 치료하는 것이 성력의 근본에 반하는 행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아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아미는 진심으로 이 여자를 치료하고 싶어졌다.

멜라니 벨리피아가 불쌍해서가 아니다.

지금도 가까스로 제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피눈물을 삼키는 제 친구를 위해서였다.

“…이 여자도 결국 ‘삿된 것’이었나 봐.”

“삿된 것?”

“위대한 신께 반하는 것들.”

하늘에 계시는 위대한 어머님은 자비로운 분이라서 많은 생명을 품어 주시고 지켜보신다.

그러나 그런 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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