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피에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마치 눈앞에 통화 대상이 있는 것처럼, 정면을 향해 눈을 휘둥그레 뜨던 국왕은 곧 큰 충격에 빠졌다.
누군가자 자신의 뒤통수를 예고도 없이 후려친 것처럼.
피에타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피에타는 이미 멸문했는데, 설마 행방불명된 자녀들이 살아 있다는 건가?
그러곤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드벨로!”
국왕이 격노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태 침묵하고 숨긴 건가!”
그리고 그걸 이제야 말해?
국왕은 얼굴을 붉힌 채로 계속 수화기에 대고 고성을 질러 댔다.
그는 엄청난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였다.
“지금 그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어떻게 적국의 귀족을! 그것도 왕실의 허락도 없이 숨겨 뒀냔 말이야!”
피에타가 아무리 명예로운 가문이라고 해도, 엄연한 적국 출신의 귀족이었다.
심지어 그 일이 7년 전에 몰래 일어난 것이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전쟁 중에 적국 귀족과 내통하는 건 엄청난 중범죄였다.
‘젠장, 공소시효가 어떻게 되지?’
시효가 지났어야 할 텐데.
아니면 빠져나올 방법은 없나?
카일리코 국왕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는 당장 수화기를 놓고 책장에 꽂힌 장식용 법전을 펼치고 싶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아드벨로 대장이 드물게 진지한 어조로 사과를 내뱉었다.
그래서 국왕은 인내심을 끌어 올려 간신히 참아냈다.
대신 그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후우, 그래.”
그리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대 성격에 평생 비밀로 감춰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 왜 갑자기 고해하는 거지?”
[피에타를 받아주실 수 있습니까?]
“행방불명되었다던 후계자를 보호하고 있나 보군.”
[받아줄 수 있습니까?]
“지금 그 질문 세 번 하는데, 내가 지금 그걸 즉석에서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나?”
[아들라보르에 엄청난 이익이 될 겁니다.]
그 말에 국왕의 머리가 다소 진정되면서 빠르게 굴러갔다.
‘틀린 말은 아니지.’
명예로운 피에타.
멸문한 지 벌써 7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피에타를 칭송한다.
나라 하나가 십 년 만에 패망하는 것도 흔한 역사인데, 무려 천년이나 명맥을 이어 온 명예로운 가문이다.
그런 가문이 망명을 신청한다면 아들라보르의 위상은 그만큼 올라갈 것이다.
“…일단.”
가까스로 진정한 국왕이 가장 근본적인 것을 물었다.
“누구인가?”
피에타의 후계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전하께선 일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만난 적이 있다고?”
[직접 감옥에도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어째선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드벨로 대장의 목소리가 짓궂었다.
[왕실의 유구한 보존을 방해하고 훼손한 죄로, 말입니다.]
“…….”
제 생식기능을 위협했던 금발의 맹랑한 꼬마 아가씨를 떠올린 국왕의 얼굴색이 파리해졌다.
‘하지만 클라레 양은 너무 어린데?’
7년 전에 갓 태어났을 아기가 어떻게 후계자가 될 수 있겠나.
딱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벨로, 대위?”
국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닥을 더듬거리듯 내뱉어졌다.
“벨로 대위가, 피에타의 후계자라고?”
***
특함은 새벽이 되자마자 다시 마을로 돌아가, 수도로 향하는 우차에 올라탔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수염을 제대로 다듬지 않은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수상쩍단 시선으로 특함 대원들을 바라봤다.
“이 마을에 외지인이 이렇게 많았던가?”
“다들 일거리 찾으러 왔다가….”
노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채 맺지 않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우부가 알 것 같단 듯이 싸구려 연초를 입에 물었다.
“여기까지 내려온 걸 보니 꽤 곤궁한가 봐.”
비식거리는 말투가 상당히 아니꼬웠다.
그러나 남자의 주름진 얼굴은 많은 것을 잃고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주름을 당겨 올린 듯한 입꼬리가 안쓰러웠다.
“외국어는 좀 하나?”
“왜요?”
“차라리 아들라보르나 클렌스로 나가서 일하라고. 제국 사람이란 건 숨기고.”
출신이 발목만 잡을 테니까.
우부는 제 나름 진지하게 조언했다.
“제국은 이제 미래가 없어.”
“…….”
“피에타 가문이 사라졌잖아. 이 제국은 그들 덕분에 유지되던 거야. 멍청한 황실과 귀족 새끼들이 그것도 모르고….”
욕설을 중얼거리던 우부는 막 불을 붙였던 연초 끝을 조그만 칼로 잘라 다시 품에 넣었다.
그러곤 소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늙은 소는 다리를 느릿느릿 움직였다.
“피에타 백작은 최선을 다했어.”
이제 우부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통한 심정을 털어놓기 급급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목숨까지 걸었다고…!”
“피에타 가문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레토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
그는 옆을 슬쩍 바라봤다.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듣는 양,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보는 노아가 보였다.
“우리 모두, 그들의 희생을 잊지 못할 겁니다.”
레토는 노아의 주먹을 제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낡은 옷소매로 숨긴 채 바들바들 떨던 주먹이 멈칫했다.
대원들은 벨리피아 영지에서 가까운 숲길에서 내렸다.
“젊은 것들이 목숨 아까운 줄 몰라.”
그 한마디를 끝으로, 우부는 다시 우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
“…….”
“…….”
숲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특함 대원들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우부의 말을 알아들은 대원들은 말을 아꼈고, 못 알아들은 대원들은 또 눈치껏 분위기를 읽었다.
“음.”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레토였다.
“일단, 제국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군.”
그는 우부가 했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황실과 귀족들이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어. 아마 우리가 작전을 수행하는 내내 민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날 거야.”
“그 말인즉, 동부 해안에 주둔했던 병력이….”
피스트 준위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레토는 바로 그거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을 서부로 이동시킬 거야. 그것도 꽤 빠른 시일 내에.”
“그렇다면 벨리피아 영지에서 일어날 민란이 그 시일을 더욱 단축시킬 가능성이 크단 겁니까?”
“가능성이 아니야. 확정된 미래지.”
국경 끝자락 촌구석 마을에서조차 민란 봉기를 도모하는 전단지가 돌고 있다.
심지어 전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제국 귀족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뒤흔드는 그들의 분노를 잠자코 지켜볼 리가 없다.
‘하긴….’
조용히 듣던 노아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 머저리들은 눈앞에 닥친 현실만 중요하니까.’
디모네 닉스가 감금되니까 허둥지둥 병력을 이동시켜 바다를 막았지만, 제국 귀족들은 이미 알고 있다.
비밀 협약서와 내통 증거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그리고 그걸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야, 아들라보르에 협박이든 뭐든 시도하여 자기들 위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도.
‘역시….’
노아는 제 손바닥에 붉게 박힌 손톱 모양의 자국을 내려다봤다.
욱신거리는 통증 덕에 정신머리를 제법 또렷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찬물을 부은 것처럼 시원하기까지 했다.
‘다 죽여야 해.’
“차라리 아들라보르나 클렌스로 나가서 일하라고. 제국 사람이란 건 숨기고.”
“제국은 이제 미래가 없어.”
“피에타 백작은 최선을 다했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목숨까지 걸었다고…!”
우부가 했던 말이 뇌리에서 계속 메아리쳤다.
노아가 다시 고개를 들 즈음, 벨라 토르 중사가 레토에게 물었다.
“그럼 계획대로 가는 겁니까?”
“그래.”
봉기 전날에 벨리피아 저택에 잠입해, 봉기가 일어나는 순간에 도망친다.
대원들은 숲 안으로 들어가 이동했다.
벨리피아 영지 외곽에 도착한 건 이번에도 해가 거의 서쪽으로 기울었을 때였다.
그러나 영지에 바로 들어가진 못했다. 영지로 들어가는 성벽 입구 앞에 칼로 무장한 남자 둘이 감시 중이었다.
특함 대원들은 외곽 후방 쪽으로 빙 둘러 이동했다.
“평범한 병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미레 네고 중사는 아까 보았던 병사들이 찬 검을 떠올렸다. 꽤 상등품의 검 같았다.
“기사 같은데, 시스토 제국은 아직도 사병제도가 유지되고 있습니까?”
“7년 전 전쟁 때 전부 국군으로 강제 흡수되었….”
대답하던 레토가 일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곤 노아를 휙 바라봤다.
“…설마 황실 기사단?”
“아마도.”
노아가 골치 아프게 되었다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마 총도 소지하고 있겠지만, 군인이 검을 허리에 찰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주 미친 XX XX XXX….”
살벌한 욕설을 한참 읊조리던 셀린이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일개 귀족 따위가 기사를 사적으로 이용한다고?”
누구보다 고귀한 혈통을 가진 왕녀로서,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만큼 황실의 기반이 약해졌단 뜻이지.”
아이스 중령이 말했다.
“분명 영지 안에도 여러 병력이 주둔해 있을 거야.”
그리고 무장을 했을 테고.
“민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데려온 건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아가 말했다.
“그런 것이었다면 벌써 영지를 뒤집고 난리를 쳤을 겁니다.”
“그럼 역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데려온 거군.”
제 어깨 위에 툭 얹어진 손을 본 노아가 고개를 올렸다.
어느새 제 뒤에 다가온 레토가 눈을 마주치고는 이내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이게 있지.”
레토는 제 가슴에 달린 낡은 은색의 브로치를 가리켰다. 마탑이 제공한 굴절마법 마도구였다.
***
영지에 잠입하기에 앞서.
노아와 레토는 머리 색을 바꾸는 마법약을 마셨다.
멜라니 벨리피아는 노아를 알고 있고, 7년 전 제국에 패전을 안긴 레토를 기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시기 무섭게 변화가 나타났다. 노아의 금발은 사과처럼 빨갛게 바뀌었고, 레토의 은발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오오오.”
대원들은 신기한 마술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모아 감탄했다.
“흥, 별것도 아니구만.”
아미가 툴툴거렸다. 성녀인 걸 증명하려고 은발로 돌아왔을 때는 다들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지던 것이 떠올랐다.
놀라기는 마법약을 마신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
“…….”
둘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어흠.”
“에헴!”
민망해진 대원들은 괜히 헛기침을 토하며 애먼 땅을 툭툭 발로 찼다.
“야.”
역겹단 듯이 바라보던 아미가, 마찬가지로 역겹게 바라보던 셀린에게 말했다.
“…이러다가 조카 생기겠는데?”
“아이씨.”
셀린은 조카가 생기게 된 과정까진 알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