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사람들은 신성청을 인간의 정치가 간섭할 수 없는 성역으로 여겼다.
위대한 어머님 신을 모시는, 범인 따위가 감히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불가침 영역.
하나 이번 압수수색과 성왕 소환은 신을 모신다는 이유로 모든 잘못이 면죄되지 않음을 확고히 했다.
신성청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낙원이 아니었다.
어머님을 모시는 성직자 역시 땅에 발붙이고 사는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역시 아드벨로.”
고급 마동력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카일리코 국왕이 입꼬리를 비틀듯 올렸다.
그는 아티의 성명 발표가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감미로운 음악이라도 듣는 것처럼 눈을 감고 감상했다.
“같은 편이면 이렇게 든든하다니까.”
이번 성왕 소환은 아드벨로 측에서 먼저 제안했다.
천하의 카일리코 국왕도 성왕을 소환하는 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신성청이 오랜 세월 동안 만든 편견과 세뇌가 두터웠단 뜻이었다.
하지만 아드벨로는 보란 듯이 신성청을 인간 세상으로 끌어내렸다.
“프세드 렐리의 1심 결과가 얼마 전에 나왔지?”
운전석에 앉아 있던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다시 들어도 짜릿하군. 한 번 더 말해 보게.”
“프세드 렐리는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습니다.”
“왕후가 날 칭찬해 주는 것만큼 기분이 좋군.”
신성청 자문 변호인단까지 붙어 프세드 렐리를 변호했지만, 결국 변함없이 사형이 선고되었다.
아무리 국내에 유통하지 않았더라도 마약을 제조하고 간첩, 해적단과 접촉한 건 큰 죄였다.
“하지만 항소했습니다.”
“원래 원작이 명작이면 외전은 절로 만들어지는 법이지.”
차에서 내린 국왕은 앞에서 지키고 있던 사복 차림의 경호원들과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디모네 닉스의 또 다른 사건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워낙 지은 죄가 많다 보니, 연관 범죄끼리 묶어 나눠서 재판 중이었다.
오늘 열리는 재판은 군 내에서 저지른 비리 관련 사건이 쟁점이었다.
그리고 국왕은 잠시 틈을 내 재판장에 방문했다.
“아이고, 우리 사형 확정자!”
피고 대기실엔 먼저 와서 재판을 기다리는 디모네 닉스가 있었다.
국왕은 문 앞에 경호원들을 두고 홀로 안에 들어갔다.
그러곤 의자를 끌고 와 친히 디모네 닉스 앞에 앉았다.
“잘 지내는 것 같군.”
보통 수감 생활을 하면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디모네 닉스는 여전히 단정하게 뒤로 넘긴 머리에, 값비싼 양복과 광이 나는 구두 차림이었다.
변호사를 고용하는 대신에 자기변호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차림이었다.
비록 염색하지 못한 머리에서 새치가 힐끔 올라오고, 제대로 깎지 못한 수염 때문에 턱 언저리가 거뭇거뭇한 것이 흠이었지만.
그것만 빼면 디모네 닉스는 육군 소장일 때와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전하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눈동자엔 여유가 전혀 없었다.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여유로운 척 굴지만, 그는 카일리코 국왕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국왕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저 변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슬슬 초조하겠지.’
프세드 렐리의 재판에서 마약 공급책이 신성청 관계자란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 검찰은 신성청을 강하게 쥐고 흔들 것이다. 신성청을 향한 여론도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성왕의 소환에 대한 여론조사가 공개되었어. 무려 7할이 소환에 찬성했지.”
신성청에 대한 분노는 곧 성왕에 대한 분노였다.
대중은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태 어떤 표명도 하지 않는 성왕을 이상하게 여겼다.
범죄에 직접 연루된 것이 아니라면 모습을 드러내어 설명하라는 것이 주된 의견이었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성왕이 저주에 걸려 운신이 어렵다는 사실을.
그리고 디모네 닉스 역시, 같은 이유로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머리를, 아주 잘 썼어.”
국왕은 솔직하게 칭찬했다. 그는 상대가 아무리 최악의 쓰레기여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대인배였다.
“그대와 신성청이 몰래 훈련시켰던 불법 사병들은 이제 전부 죽고 없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돼.”
국왕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어차피 죽고 없는 것들이니.”
하지만 그들의 시체를 찍은 사진 증거와 신상 정보는 전부 이쪽 손에 들어 있다.
이것들은 시스토 제국에서 고군분투 중일 해군 특함이 돌아오면 재판에서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하기에 앞서, 국왕은 디모네 닉스가 한쪽 눈을 찡그리는 것을 똑똑히 봤다.
“베스페라.”
국왕은 디모네 닉스의 또 다른 가명을 불렀다.
“아스포텔은 이제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지. 하늘에 계신 위대한 어머님에게 버림받고 지옥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영겁의 세월을 보낼 걸세.”
“…….”
“그리고 너도 그 옆에서 사이좋게 고통받겠지.”
이제 디모네 닉스는 여유로움을 유지할 수 없었다. 대놓고 적대적인 시선으로 국왕을 노려봤다.
국왕은 그런 디모네 닉스의 눈빛을 보고도 유쾌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쾌하고 진절머리가 났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실소가 절로 터졌다.
“우리 쓰레기가, 정말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하고 똑부러진 존재라고 여겼던 건가?”
카일리코 국왕은 사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따로 있었다.
조금이라도 저놈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정보가 없는지 살피기 위해.
그리고 그의 반응을 떠보는 것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진실 여부를 파악하고자.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망할 것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직도 자신이 이길 것처럼 구는 태도가.
만약 이런 저의 반응을 노린 것이라면, 디모네 닉스는 아주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이제 국왕은 저놈에게 남은 밑천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디모네 닉스의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조금 아니꼽고 불쌍했다.
“…….”
잠시 고민하던 국왕이 입을 열었다.
“…성물을 찾았지.”
“성왕 예하께 받은 선물입니다.”
“미래를 약속한 예물 같은 건가 봐?”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소롭단 듯이 말했다.
“저주받은 것들끼리 사이좋게 말이야.”
“…….”
“허허, 이거 참.”
디모네 닉스를 빤히 보던 국왕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여태 본 네놈 새끼의 표정 중 가장 마음에 드는군.”
디모네 닉스의 앞에까지 다가간 국왕은 그 귀한 무릎 하나를 직접 굽혀 시선을 낮췄다.
“그댄 생각보다 썩 대단하지 않아.”
우린 다 알거든.
그러고는 경외를 표하듯이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피니치 구역에 보냈던 군인들은 전부 성물로 세뇌마법을 걸어 만든 마리오네트였지.”
시체에 남은 세뇌마법의 흔적은 증거 자료 18호 정도쯤 될 거고.
“죄를 뒤집어씌우려던 풀루스 대위는 피아 약물을 중독시켜 세뇌했더군. 이건 증거 자료 24호고.”
툭툭.
국왕은 다소곳하게 모인 디모네 닉스의 손등을 도닥였다.
“패배자.”
몸을 일으키다 만 국왕의 다정한 목소리가 끔찍한 미래를 예언했다.
“이 손으로 네 목을 조를 준비를 하게.”
피고 대기실을 나온 카일리코 국왕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홀로 남은 디모네 닉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과도하게 꿈틀거리며 일순 고통 어린 표정을 짓는 것도.
***
‘저주라….’
농담인 줄 알았는데.
경호원들과 함께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탄 카일리코 국왕은 새삼 아드벨로의 정보력에 감탄했다.
아침 일찍 연락했던 아드벨로 대장은 신성청 성왕을 참고인으로 소환하자는 제의와 함께 엄청난 정보들을 전보로 부쳤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성왕과 디모네 닉스 소장이 성물로 군인들을 세뇌하였고, 그 부작용으로 저주에 걸렸다는 정보였다.
처음에는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저주라는 게 존재하겠느냐고.
아드벨로 특유의 농담거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반응….’
저주를 언급할 때 보였던 디모네 닉스의 변화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고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하.”
기가 막혀서.
국왕은 디모네 닉스가 저주에 걸렸다는 것이, 그리고 성왕도 똑같은 저주에 걸려 드러누웠다는 사실이 아주 못마땅했다.
‘그리 쉽게 죽어 버린다고.’
설명으로 들은 저주의 끝은 분명 잔인했다.
사지가 비틀리고 피부색이 변하면서 마지막에는 제 손으로 목을 조른다고.
하지만 국왕은 그것마저 너무 가벼운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놈들 때문에 고통받고 죽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렇게 허무한 끝을 맞이한다고?
‘어떻게 해야….’
그 오만방자한 것들에게 최대의 수치를 안겨 줄 수 있을까.
국왕이 탄 마동력차는 도로를 빠르게 달리며 왕궁에 도착했다.
“국왕 전하.”
집무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비서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찾았다.
“해군 비밀 회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드벨로인가?”
“예.”
“다들 자리를 비키게.”
응접실에 혼자 남은 국왕은 수화기를 들고, 익숙하게 해군 비밀 회선 번호를 다이얼로 돌렸다.
곧 철컥철컥, 회선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국왕 전하.]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국왕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 X발.’
왕위에 오른 뒤, 많은 전화를 받아 오면서 쌓인 경험들과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예민해진 신경이 직감했다.
뭔가 일이 생길 전화다.
국왕은 여전히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로 애써 태평스레 말했다.
“오늘만큼 아드벨로의 충정을 진하게 느껴 보기는 처음이네. 하루에 두 번이나 문안 인사라니.”
[라디오 방송 들었습니다. 성왕을 참고인 소환한다더군요.]
아드벨로 대장이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참고인 소환이라서 강제성은 없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욕먹을 테지.”
[소환에 응할 것 같습니까?]
“상관없어. 이왕이면 안 나오는 게 나로서는 더 감사하지.”
여론몰이하기 딱 좋으니까.
국왕은 괜한 불안감을 잊기 위해 책상에 올려놓은 액자를 만지작거렸다.
저와 왕후, 어린 왕자 세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장식된 원목 액자였다. 사진은 올여름 휴가지에서 찍은 것이었다.
“…왜 또 전화했나?”
국왕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감이 제발 틀렸으면 좋겠는데. 기분이 싸해. 머리털이 쭈뼛 섰다고.”
[세울 머리칼이 있을 때 쭈뼛 세워야지 않겠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능글맞은 농담이 흘러나왔다.
물론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피에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