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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203화 (203/245)

203.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 노아의 눈에는 그 시절의 아름답고 멀끔하던 별장이 아직도 선연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가족들의 모습도.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망아지처럼 쏘다니던 저.

외동딸이 저지르는 사고를 볼 때마다 기가 막히면서도, 마지막엔 어쩔 수 없단 듯이 웃어 버리는 아버지.

그리고 항상 철부지 딸을 보듬어 주는 상냥한 어머니.

이런 가족을 보며 즐겁게 웃는 고용인들.

화사한 여름 정원과 아름다운 꽃.

이따금 내리던 여름비와 푸른 잎에 붙어 있던 달팽이.

‘망아지 키우느라 그 고생을 했는데….’

조금쯤 의젓해진 제 모습은 보고 가셨어야지.

“…….”

분하고 애달픈 감정이 다시 복받치려고 했다.

아무리 허름해졌어도 노아의 기억 속엔 여전히 멀끔하고 깨끗한 별장이었고, 그곳에서의 추억 역시 선명했다.

그 괴리감이 노아를 괴롭게 했다.

막상 각오를 다지고 왔는데, 현실은 그마저 비웃는 듯했다.

노아는 결국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변해 버린 고향을 바라보며 제 감정을 억지로 삼킬 뿐이었다.

이미 문드러진 속은 몇 번이고 다시 문드러졌다.

‘괜찮아….’

아직은 견딜 수 있다.

여기서 감정을 드러냈다간 작전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여기 있었군.”

감정을 갈무리하는 사이, 어느새 뒤에 나타난 레토가 노아의 옆에 서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방들보다 훨씬 넓네.”

“이곳은 거실입니다. 여기도 이미 누가 한 번 크게 뒤진 것 같습니다.”

“뭘 찾으려는 걸까?”

이쯤 되니 레토는 별장을 이 지경으로 만든 범인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뻔하지 않습니까.”

노아는 레토의 허리춤에 찬 검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

반사적으로 페미나를 쥔 레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부부검을 찾는 건가?”

“그 검이야말로 피에타 가문의 상징이고, 가주란 사실을 증명하는 보물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역시 보르고 피에타의 작품이군.”

“그 인간이 아니면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노아도 제 허리춤에 있는 마스를 만지작거리며 깊이 생각했다.

‘언제 이곳을 수색한 걸까?’

흔적들을 보면 최소 몇 년은 되었다.

‘부모님의 사망은 확인했지만, 시신은 못 찾았어. 나와 클라레도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고….’

보르고 피에타는 이전부터 그의 남동생에게 자격지심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가문을 멸문시켰으면서 피에타란 성을 여전히 쓰고 있고.

피에타와 관련된 곳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가문의 상징인 부부검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하지만 저와 클라레는 아직 살아 있다.

부부검은 저와 남편의 손에 쥐여 있다.

동생 부부의 시신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노아가 레토를 불렀다.

“중장님, 어쩌면….”

***

수색을 마친 대원들은 현관 홀에 모였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지붕 아래로 화창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잡초와 넝쿨이 자라는 폐허에서 그나마 멀쩡한 곳이었다.

“통조림 몇 개를 찾았습니다.”

부엌을 살폈던 메델라 사나 하사와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가 오래된 통조림 몇 개를 가져왔다.

“견과류와 파운드케이크 통조림입니다.”

“전투식량 같은데, 왜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나 때문이야.”

노아가 통조림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내가 이걸 좋아했거든.”

“넌 어릴 때부터 군인 체질이었구나.”

지독한 녀석.

아미의 농담에 노아가 피식거리며 통조림을 내려놓았다.

“부엌에 식료품 창고가 있을 텐데, 거긴 못 봤어?”

노아의 물음에 메델라와 클라우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참했습니다.”

“이것들도 그나마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멀쩡했습니다.”

식료품 창고는 안에 들어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음식물을 아예 못 먹게 할 심상으로 전부 터트리고 방치한 탓에 창고 내부가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사람 심보 참.”

음식 아까운 줄 모르고.

레토가 혀를 찼다.

“저는 신문을 발견했습니다.”

호네스 메라 일병이 색이 누런 신문을 내보였다.

“제국어는 잘 모르지만,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7년 전에 발행된 신문입니다.”

“뭐라고 적힌 거지?”

로간 미타스 상사의 혼잣말에 아미가 신문 기사 제목을 읽었다.

“…‘피에타 가문의 몰락’이라고 적혀 있어.”

그 말에 다들 노아를 힐끔거렸다.

“저기.”

노아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 눈치 안 봐도 돼. 이러면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해져.”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잖아.”

레토가 끼어들었다.

“임무가 끝날 때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될 텐데, 그때마다 벨로 대위 눈치를 살피고 동정할 건가?”

레토의 일침에 대원들이 뜨끔했다.

“그 때문에 임무에 차질이 생기면 그게 더 미안할 일일 거다.”

임무를 성공하는 것이 노아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레토의 말에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맞았다. 일일이 동정하며 불쌍해한다면 오히려 그게 노아에게 더욱 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레토가 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대위를 위로하는 건 내 몫이지.”

“으으.”

노아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음, 조금 상처 입었어.”

레토가 살짝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노아는 단호했다.

“중장님이야말로 사슴 같은 눈망울로 말씀해도 안 됩니다. 근무 중에는 공사 구분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중장님을 사슴…!”

“아니야! 못 들은 겁니다! 우리는 못 들은 겁니다!”

“치티아 중위님, 저희 귀를 정화해 주실 수 있습니까?”

“기다려 봐. 내 귀 정화가 먼저야.”

“나 토하고 올게….”

대원들은 어지간한 공포영화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쨌거나 대화는 다시 진행되었다.

“메라 일병이 가지고 온 신문을 보건대, 아마 이곳에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짜는 7년 전이겠군.”

“신문 날짜를 보면 전쟁이 끝난 직후 즈음입니다.”

피스트 준위가 말했다.

“…방문한 사람은 보르고 피에타일지도 모릅니다.”

“내 생각도 그래.”

신문에는 피에타 백작 부부의 사망과 자녀의 실종, 그리고 가문의 상징인 부부검의 행방이 적혀 있었다.

보르고 피에타가 이 시골 별장까지 찾아온 이유.

“…….”

레토는 조금 전 노아와 거실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중장님, 어쩌면 보르고 피에타는 마스와 페미나를 찾는 걸지도 모릅니다.”

“왜? 가문의 보물이라서?”

“다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기가 막히네. 자기가 가문을 배신해 멸문시켜 놓고?”

“배신한 건 맞지만, 멸문은 예상치 못한 결과일 겁니다.”

“…….”

“그때 말했잖습니까. 그자는 제 아버지에게 상당한 열등감을 지녔다고.”

동생 부부는 죽었지만 시체는 사라졌다.

진짜 후계자인 조카들은 죽었단 소식조차 없고.

부부검은 행방이 묘연하다.

제국 내 유일한 피에타의 핏줄이 되었지만, 그는 어떤 자격도 갖추지 못해 결국 피에타의 가주가 되지 못했다.

“…벨로 대위.”

레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에타 가문은 보통 어디에서 생활했지? 수도? 아니면 영지?”

“영지에서 지냈습니다. 피에타는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정계와 되도록 멀리 떨어져 지내려고 했습니다.”

“마지막 거처는?”

“…그때도 영지였습니다.”

“그럼 그 새끼는 수도에 있겠군.”

노아의 증언과 기억대로라면, 보르고 피에타는 엄청난 열등감을 품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했다.

‘그게 디모네 닉스와 손을 잡은 이유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가문은 끝내 멸망했다.

강하게 주장했던 전쟁도 패전했다.

“권력에 목을 매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클 거야.”

그런 놈이 수도와 떨어진 피에타 영지에 있을 리가 없다.

열등감의 근원인 동생과 그 가족, 선대 피에타 가주들이 머물렀던 피에타 영지는 그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을 터.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수도군.”

모두의 표정에 비장감이 감돌았다.

***

피에타 별장을 떠나기 전.

다른 대원들도 각자 찾은 것을 내보였다.

낡은 지도와 서책, 그리고 손잡이가 부서진 여행 가방 두 개.

그중에서 단연코 반응이 좋았던 건.

“옷이잖아!”

“중령님! 엄청 중요한 걸 발견하셨지 말입니다!”

바로 아이스 중령이 찾아낸 낡은 옷가지였다.

대원들의 격렬한 반응에 아이스 중령이 멋쩍게 웃었다.

“옷방처럼 보이는 곳 서랍 뒤에 껴 있더라고. 다른 옷들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그 말대로 짓밟힌 흔적도 많고, 좀 먹고 곰팡이가 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것 빼고는 딱히 찢어진 곳 없이 멀쩡했다.

“…사용인들이 입었던 옷 같습니다.”

노아가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이걸 입고 다닌다면 자연스럽게 볼 겁니다.”

“치티아 중위, 정화로 깨끗하게 할 수 있나?”

“중장님, 저는 성녀지 세탁기가 아닙니다.”

투덜거리긴 했으나 아미는 순순히 옷들을 정화했다.

누렇게 바랜 옷감이 조금 깨끗해지니 아까보다 훨씬 멀끔해졌다.

대원들은 옷을 갈아입고, 행군 가방은 아예 버리고 가기로 했다.

행군 가방에 딸린 조그마한 휴대용 가방을 떼어내, 그곳에 식량과 약품, 나이프 등 필요한 것들만 간추려 넣었다.

그리고 무기 등은 분리해서 여행 가방 안이나 옷 속에 숨겨 뒀다.

노아와 레토는 가지고 온 부부검을 따로 챙긴 기다란 천 가방에 넣어 등에 멨다.

나머지 짐은 저택에 버리고 가기로 했다.

“아마 이곳에 사람이 다시 오진 않을 거야.”

노아는 폐하가 된 별장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며 말했다.

특함 대원들은 그렇게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길이 평탄한 덕에 걷는 건 큰 무리가 아니었다. 곧 나타난 숲속 길도 모습을 감추며 걷기 딱 좋았다.

“노아.”

레토는 가장 앞에서 걷던 노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옷 잘 어울리네.”

“중장님, 임무 중에는 호칭 주의하자고….”

“부모님 옷이지, 이거?”

속삭이는 목소리에 잘 걸어가던 노아의 다리가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곧 아무 일 없었단 듯이 다시 속도를 냈다.

“별장에 사용인의 옷을 그렇게 많이 둘 리가 없잖아. 거기다 오래 내버려 뒀는데도 아직까지 튼튼하고.”

어지간히 좋은 옷감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모르는 척해.”

노아가 조용히 부탁했다.

“괜히 알아 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할 테니까.”

레토는 노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계속 걷고, 중간에 잠깐 쉬기를 반복하면서.

해안가 특유의 공기 냄새가 옅어지고,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지평선에 완전히 사라질 즈음에야.

조그만 마을 외곽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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