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피에타 가문은 고용인들에게도 친절했다.
그런 만큼 피에타 백작 부부를 진심으로 따라 모시는 고용인들도 많았다. 이곳 관리인 부부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
파직!
노아가 손을 댄 벽에 금이 갔다.
보르고 피에타, 그 찢어발겨도 시원찮을 배신자가 저지른 죄악의 일부가 바로 이 오두막이었다.
“…관리인이란 사람과, 친했습니까?”
옆에 다가온 메델라 사나 하사가 조심히 물었다.
“이 핏자국처럼 보이는 건, 그 사람의 것입니까?”
“아마도.”
노아는 가까스로 감정을 갈무리하며 애써 침착히 말했다.
“관리인 부부가 여기에 살았었어. 정말 좋은 분들이었지.”
“…….”
메델라는 성호를 그으며 그들의 영면을 기도했다.
다른 대원들도 침묵으로 묵념에 동참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 노아는 반드시 보르고 피에타를 제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또 한 번 다짐했다.
때마침 근처를 살피고 온 레토와 로간 미타스 상사가 오두막으로 복귀했다.
“동이 틀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레토가 대원들을 모았다.
“시스토 제국에 무사히 들어왔지만, 서부 시내 및 수도에 진입하는 게 진짜 목표지.”
“조를 나눠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벨라 토르 중사가 의견을 냈다.
“13명이 뭉쳐 이동하면 의심받기 딱 좋다고 봅니다.”
“토르 중사의 말이 맞군.”
레토는 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부터 확인했다.
제국에서 태어나 이곳의 말을 모국어로 썼던 노아, 교양어로써 제국어를 배운 레토와 셀린이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호네스 메라 일병과 로간 미타스 상사가 생활 회화 정도를 구사했다.
아이스 중령도 7년 전 전장에서 배운 것들을 간단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나머지 대원은 단어 몇 가지와 ‘나는 소년입니다. 당신은 변태입니까?’ 수준의 문장 정도만 말할 수 있었다.
“전 읽고 번역하는 건 잘합니다.”
“저도 읽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아미와 메델라 사나 하사가 차례대로 말했다.
“치티아 중위는 의외로군.”
레토의 솔직한 말에 아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성녀 시절에 여러 국가의 성서를 직접 번역했습니다. 발음은 몰라도 읽고 쓰는 건 자신 있습니다.”
“와! 치티아 중위님 의외로 능력자셨지 말입니다?”
“메델라 너 그 예쁘장한 얼굴로 나한테 시비 거는 거냐? 못생겨지라고 저주 내린다?”
어쨌거나 어휘 실력과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조를 3개로 나눴다.
1조는 노아를 조장으로 아이스 중령, 메델라 사나 하사, 벨라 토르 중사.
2조는 셀린을 조장으로 아미, 로간 미타스 상사, 아미레 네고 중사, 뮤트 플리차트 병장.
3조는 레토를 조장으로 피스트 준위,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 호네스 메라 일병.
시내를 돌아다닐 때는 이렇게 나눠서 활동하기로 했다.
그다음 문제는 옷이었다.
특함 대원들은 전원 시커먼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이 옷차림으로 시내를 활보했다간 바로 간첩으로 신고당할 게 뻔했다.
“참모진은 이런 건 준비 안 하고….”
아미가 혀를 찼다.
그러나 비레오 호에는 대원들이 제국에 잠입했을 때 갈아입을 생활복을 미리 준비해 둔 상태였다.
그 짐을 행군 가방에다 넣기 전에 특함이 이동한 게 문제였지.
“옷을 공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피스트 준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토가 노아에게 물었다.
“근처에 마을이 있나?”
마찬가지로 고민하던 노아가 말했다.
“…수도에서 이곳까지 마차로 사흘이 걸렸습니다.”
시스토 제국은 가로로 긴 영토를 지녔다.
국토를 횡단할 때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 마차로 엿새 정도가 걸리지만, 동에서 서로 이동하면 그 두 배가 걸릴 정도로 넓었다.
‘역시 서부로 잠입한 게 정답이었구나.’
피스트 준위는 또 한 번 가슴을 쓸었다.
만약 동쪽으로 잠입했다면 수도까지 이동하는 데 시간이 몇 배나 걸렸을 거다.
노아는 자신의 추억을 계속 떠올렸다.
“그러니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어머니 언제 도착해요?”
“이제 출발했는데 벌써 물어?”
“아까 나온 여관이 마지막이니까, 세 시간만 더 가면 된다.”
“너무 길어요! 날아가고 싶다!”
“하하하! 사람이 어떻게 날 수 있어!”
“하여튼 우리 예쁜 망아지, 엉뚱하다니까.”
“…….”
저를 예쁜 망아지라 부르던 그들의 따스함을 애써 무시하며, 노아가 말했다.
“마차로 세 시간 거리입니다.”
“행군으로는 다섯 시간 정도 걸리겠군.”
“그런데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제 가문의….”
아니.
노아가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피에타 가문의 별장이 있을 겁니다. 그곳을 수색하면 식량이나 옷가지 따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레토는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다물고,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원들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보름이다.”
법원이 디모네 닉스의 내란죄 1차 공판에서 검찰 측의 증거 보충을 이유로 유예기간을 주었다.
유예기간은 최대 한 달이라는 내용이 법령으로 정해져 있었다.
지금 법원이 유예기간을 내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니 특함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5일뿐이었다.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특함에겐 마냥 짧고 빠듯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대중의 피로도를 간과할 수 없었다.
“보름 안에 수도에 진입해서 증거들을 가져와야 하고, 피에타 백작 부부의 유해도 수습해야 한다.”
“생각보다 빠듯한데….”
아이스 중령이 말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이동 수단인 것 같습니다.”
“7년 전에도 수도의 주요 교통수단은 마차였습니다.”
노아의 말에 다들 적잖게 놀랐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아들라보르와 같은 수준을 기대해선 안 될 겁니다.”
노아가 처음 본 마동력차는 아드벨로 대장이 저와 클라레를 구하기 위해 끌고 왔던 군용차였다.
즉, 제국에선 한 번도 차를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아예 없진 않겠지만, 차를 훔쳐 이동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초에 13명이 전부 탈 만한 차도 없을 테고.
“일단.”
말을 하다 만 레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니, 깨진 유리창 너머로 하늘이 푸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해가 뜨는 것이다.
“…벨로 대위가 말한 피에타 별장을 수색하지. 개인함선은 이곳 오두막에 숨겨 두고 간다. 흔적은 전부 지우도록.”
***
특함 대원들은 출발 준비를 빠르게 마쳤다.
개인함선은 오두막 부엌에 바닥에 숨겨져 있던 지하 창고에 보관해 뒀다.
만일을 대비해 낯선 자들이 건드리면 개인함선을 전부 폭발시키는 함정까지 설치했다.
행군 가방을 점검하고, 수신호를 확인한 뒤.
“이거 받으십시오.”
노아는 따로 챙겨 온 것을 대원들에게 나눠줬다.
“마탑에서 준비해 준 마도구입니다.”
마탑주가 대원들의 무사 복귀를 바라며 준비한 굴절마법이 걸린 마도구였다.
이전에 피니치 구역에 잠입할 적에 아티가 말 안 하고 빌려왔던 것보다 효율적으로 개선되었다.
잠입에 어울리게 화려했던 금색 대신 살짝 녹슨 은색으로 도색 처리했다.
마도구까지 챙긴 뒤, 대원들은 오두막에 자신들이 머물렀던 흔적을 전부 지웠다.
절벽에 난 계단도 다시 내려갔다 올라오면서 눈에 띄는 흔적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미가 탐지 마법으로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생체 반응이 없습니다.”
“그럼 이동한다.”
특함 대원들이 움직였다.
피에타 별장까진 금방 도착했다. 애초에 귀족의 별장이 지어질 정도로 지면이 고르니 이동이 수월했다.
“…….”
“…….”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폐허는 참혹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명색이 피에타 가문이었다.
온 세상이 칭송한 명예로운 가문의 흔적 중 일부를 눈앞에 두는 영광을 맞이했는데도, 누구 한 명 기뻐할 수 없었다.
다들 노아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
정작 노아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어떤 말,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다 허물어지다 못해 흉물스러운 폐허가 된 저의 어린 시절을 묵묵히 눈에 담을 뿐이었다.
무너진 대문과 벽 일부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정원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자랐다.
건물 외벽은 금이 가다 못해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반파된 현관문.
정원까지 내동댕이쳐진 가구 파편.
“…….”
노아에게 말을 걸려던 아미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는 노아의 뒷모습이 어떤 절규보다 서글펐다.
“중장님.”
노아가 레토를 불렀다.
“그래도,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레토는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로 답했다.
처참했던 외관처럼, 내부 역시 엉망이었다.
벽지는 다 찢어져 곰팡이가 폈고, 지붕은 구멍이 뚫려 아침 햇살이 훤히 들어왔다. 깨진 유리창 틈으로 정체 모를 잡초가 뿌리까지 내렸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건.
“…가구가 전부 부서졌거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아미레 네고 중사가 방을 살피며 말했다.
옷장, 책장, 심지어 현관 앞 장식장까지. 서랍이 달린 가구는 전부 열려 있거나 부서진 상태였다.
“마치 누군가가 먼저 와서 헤집어 놓은 것 같습니다.”
“보르고 피에타의 짓일지도 모르겠군.”
셀린이 바닥에 떨어진 낡은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난잡한 그림이었다. 이를 본 셀린과 아미레는 이 그림의 주인이 누구인지 빠르게 짐작했다.
샛노란 머리카락에 푸른 눈.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그림 속 아가씨.
하필 자신들이 들어온 방은, 노아가 어릴 적에 썼던 방이었다.
“세상에….”
아미레 네고 중사가 비통함에 눈을 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진정하자고.”
셀린은 그림을 돌돌 말아 가방 안에 넣었다.
“누구보다 속이 타들어 갈 당사자가 견디고 있잖아.”
“대위님이 어떤 심정일지, 저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지.”
이런 비극은 어지간한 범인은 절대 감당 못 할 일이고, 감히 상상조차 못 할 고통이었을 거다.
수색은 계속 이어졌다.
노아는 익숙한 걸음으로 어느 넓은 방에 도착했다.
“이 녀석! 손 똑바로 못 들어?”
“똑바로 든 건데….”
“뭘 잘했다고 대꾸야! 어서 입술 넣어.”
“…….”
“으이구, 네 어머니가 너 그렇게 사고 치라고 배 아파 낳은 줄 알아?”
“그치만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어머니도 보셨죠? 저 성공할 뻔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쳐서….”
“반성 안 해, 진짜? 더 혼날래?”
“아버지는 만날 화만 내….”
“우리 천방지축 망아지는 언제 얌전해질지, 엄마는 너무 궁금하네.”
그러게요.
노아는 떠오르는 추억에 그만 피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