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지금부터는 속도전이지만, 속도를 내어선 안 됩니다.]
대원들은 노아의 지시에 따라, 우후죽순으로 솟은 바위섬 사이사이를 느린 속도로 통과했다.
바위섬을 반쯤 지나자 거대한 해안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아가 일전에 말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바위섬을 통과하니 가파른 해안 절벽이 더욱 가까워졌다. 높이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지만, 맨몸으로 올라가기엔 무리였다.
[유속이 느리네.]
셀린의 중얼거림에 노아가 대답했다.
[좋은 징조야.]
바위섬 사이를 흐르는 물길은 협곡에서 빠져나오는 강물의 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 이곳의 유속이 느리다는 건, 협곡의 강줄기가 얕아졌단 뜻이었다.
[…다 왔어.]
그렇게 바위섬을 빠져나온 대원들은 절벽 사이에 난 비좁은 틈을 발견했다.
절벽 사이로 파도와 전혀 다른 물소리가 들렸다. 협곡에서 흐르는 강줄기 소리였다.
[좁으니까 일렬로 진입한다.]
특함 대원들은 노아를 선두로 협곡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나무 한 그루조차 없는 협곡 사이는 모습이 노출되기 딱 좋았다. 그런데도 이곳엔 감시하는 흔적 따위가 없었다.
‘짐작했던 바이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허술할 줄이야.
노아는 이 상황을 마냥 안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이다.
그러나 제 고향은 그때와 변함없이, 아니, 오히려 더욱 퇴보한 것만 같았다.
“…….”
서글픔에 빠지려던 노아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다들 이쪽으로.]
강가에 넓은 자갈밭이 있었다. 특함 대원들은 무려 3시간 반 만에 뭍에 발을 디뎠다.
주변을 살피던 노아가 대원들에게 말했다.
“이제 개인함선을 벗어도 됩니다.”
대원들은 그제야 몸을 짓누르던 무거운 개인함선에서 해방되었다.
원래라면 서류 가방처럼 생긴 보관함을 따로 챙겨야 했지만, 이번에 마탑에서 보관함 없이도 휴대 및 이동이 가능하도록 개조했다.
개인 함선은 보호구처럼 분리되어 있다. 머리부터 어깨, 팔꿈치, 손목. 다시 내려와 등, 다리, 무릎, 발.
그중 가장 넓은 부피를 자랑하는 등 보호구 위에 나머지 부품을 차례차례 쌓아 올렸다.
그러자 부품들이 알아서 척척 연결되며 맞물리더니 네모난 가방처럼 변했다.
대원들이 입을 모아 환호했다.
“마탑이 드디어 세금값을 했군!”
“야, 이거 엄청난데?”
하지만 불만도 있었다.
“…개인함선 무게나 경량화해 주지.”
“그러게. 그것만 좀 해결해 줘도 엄청 편할 텐데.”
“중장님은 그 당시에 어떻게 그걸 메고 다녔습니까?”
행군 가방을 등 뒤로 고쳐 메던 레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7년 전 초기 개인함선의 무게는 지금의 두 배인 80kg이었다.
“죽겠단 각오로 하면 뭐든 할 수 있어.”
이제 더는 못 하지만.
그리 대답한 레토는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제 삶에 대한 미련이 가득해 보였고, 노아는 그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럼 대위.”
우린 어디로 가야 하지?
레토의 물음에 노아가 위를 가리켰다.
“곧 계단이 나올 겁니다.”
노아의 말대로, 강변을 조금 걷자 절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사람이 만든 것 같습니다.”
말수 없는 뮤트 플리차트 병장이 조용히 감탄했다.
강바닥에서 절벽 위까지 설치된 계단은 구석진 곳에 위치해서 모습을 감추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인지 계단 난간은 녹슬고 군데군데 부서진 흔적도 있었다.
“늦여름과 가을을 제외하면 이 협곡의 강물은 수위가 높은 편이야.”
절벽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위아래 바위 색이 살짝 다른 것이 그 증거였다.
“그래서 강물에 잠기는 난간은 매해 부식되어서 관리를 받았어. 특히 물이 높이 차오르는 중간 부위가 가장 위험해.”
“그럼 한 명씩 올라가야겠군.”
아이스 중령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위에는 무엇이 있나?”
“관리인의 오두막이 있을 겁니다.”
“관리인?”
“피에타 가문의 별장이 이곳 근처에 있습니다. 그곳을 관리하는 고용인들의 가족이 살던 집입니다.”
위를 올려다보는 노아의 눈빛에 그리움이 감돌았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관리인과 그의 아내는 언제는 웃고 있었다.
망아지처럼 쏘다니는 어린 저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만 보여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럼 제가 가 보겠습니다.”
먼저 나선 건 아미였다.
“아무 일 없으면 이걸 던지겠습니다.”
아미가 바닥에 있던 특이한 모양의 자갈을 주워 대원들에게 보여 줬다.
‘계단이 꽤 가파르네.’
부서지고 녹슨 난간을 조심하며 올라가던 아미는 금세 숨이 찼다.
다행히 절벽이 그렇게 높지 않아서 금방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미는 우선 탐지마법으로 주변을 탐색했다.
“…….”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아미는 가방에서 특수 망원경을 꺼내 절벽 건너를 살폈다.
툭.
“지금부터 한 명씩 올라간다.”
레토는 아미가 위에서 떨어트린 자갈돌을 주우며 말했다.
한 명, 한 명.
모두 숨을 죽이며 순서대로 계단을 올랐다. 레토와 아이스 중령이 마지막까지 남아 강변을 경계했다.
노아는 네 번째 순서로 계단을 올랐다.
노아는 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단 사실을 선명하게 느꼈다. 계단을 오르면서 숨이 가빠진 탓만은 아니었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 잊고 지냈던 바람 냄새.
피부에 닿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마지막 계단을 전부 오르고 드디어 절벽 위 평지에 발을 디딘 순간.
“……!”
노아는 울컥하는 마음을 힘겹게 억누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7년이란 세월에도 변함없는 풍경이 노아의 그리운 추억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제야 비로소.
‘…드디어 온 거야.’
노아는 자신이 고향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
특함의 돌발행동은 해군 본부에 빠르게 전달되었다.
“…과감하게 저질렀군.”
이 새벽까지 자지 않고 근무 중이었던 아드벨로 대장이 한 손으로 잔머리를 넘겨 올리며 전화를 받았다.
“됐어. 알아서 하겠지.”
이제 와서 떠난 놈들 붙잡아서 뭐 하게.
아드벨로 대장은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단 것처럼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특함 대원과 억지로 연락하지 말고, 계획대로 근처 우방국을 중심으로 선회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보름 뒤에는 무조건 제국 해안에 접근해라.”
이것저것 명령을 마친 아드벨로 대장은 그제야 통화를 마치며 한숨을 돌렸다.
“무사히 진입했나 봐.”
“다행입니다….”
옆에 있던 비서실장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눈에 띄게 안도한 그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드벨로 대장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떨리던 어깨는 흠칫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이야.”
“마냥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됩니다.”
비서실장이 제 어깨에 얹어진 대장의 손을 쥐며 말했다.
가늘게 접힌 눈동자엔 각오를 다진 눈빛이 선연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오.’
간만에 오싹해진 아드벨로 대장이 그의 어깨를 꼭 쥐었다.
“그래, 맞아.”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되지.
젊은 것들이 적국에서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데, 자신들이 이곳에서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는 건 어른으로서의 체면이 안 산다.
‘남은 건 디모네 닉스와 신성청, 국왕, 안보국 전 국장….’
안보국 전 국장은 일전에 아드벨로의 성명을 통해 경고를 내렸다. 법무부 쪽에서도 손을 쓸 테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디모네 닉스도 지금은 구치소에서 엄격한 감시하에 수감 중이니.
‘신성청….’
그 노망난 괴물 새끼를 어떻게 족쳐야 할까.
툭, 툭, 툭.
아드벨로 대장은 비서실장의 어깨에 얹었던 제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톡톡 두드렸다.
“…비서실장.”
생각을 마친 아드벨로 대장이 입을 열었다.
“신성청 성왕을 상대로 고소를 해 본 적이 있던가?”
그녀의 말뜻을 알아챈 비서실장이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시도를 하시려는 겁니까?”
“새로운 시도란 응당 소란을 불러일으키지.”
그리고 아드벨로 대장은 그런 걸 아주 좋아했다.
“아침이 되면 국왕한테 전화 연결 좀 하도록. 기밀 회선으로.”
“알겠습니다.”
“나만큼 신앙심 깊은 사람도 없지.”
자리에 앉은 대장이 성호를 그으며 창문 너머 어둑한 밤하늘을 바라봤다.
창가에 비친 그녀의 얼굴엔 정의로운 심술이 가득했다.
“우리의 성왕께서 와병 때문에 욕창 걸리지 마시라고, 이렇게 직접 일어날 기회를 만들어 주잖아.”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물론.”
아드벨로 대장이 씩 웃었다.
그 새끼가 저주에 걸렸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람.’
***
“벨로 대위님 덕분에 시간을 벌었습니다.”
절벽 위에 오르자마자, 피스트 준위는 노아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믿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작전에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준위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고향에 도착했단 울컥한 감동을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노아는 피스트 준위의 인사에 그러지 마시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피스트 준위는 단호했다.
“대위님이 저희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뭘 구했다고….”
“바로 그겁니다.”
고개를 든 피스트 준위의 얼굴엔 정말로 감사하단 진심이 선명하게 드리워 있었다.
“대위님 덕에 누구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제국에 발을 디뎠습니다.”
“…….”
“아시지 않습니까. 제국은 저희가 이곳에 잠입할 것을 예측하고 서부 해안에 엄청난 병력을 배치했다는 것을.”
“하지만 곧 이곳으로도 병력을 이동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시간을 벌었습니다.”
노아의 말이 맞았다. 분명 제국은 이곳에도 병력을 보낼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그것에 대비하고 앞으로를 계획할 시간과 장소를 구할 수 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이건 대위님 덕분입니다!”
“거기다 이렇게 개인함선을 숨길 수 있는 곳도 있지 않습니까.”
절벽 위에는 노아가 말한 대로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집이 하나 있었다.
다만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오두막은 창문이 깨져 있고, 내부가 엉망이었다.
부서진 가구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고, 피처럼 보이는 오래된 흔적도 있었다.
“…….”
노아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살짝 쓸어 만졌다.
묻어나는 것도 없을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핏자국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케 했다.
‘그래….’
우리 자매만 살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