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노아와 셀린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고.
대원들이 저 거짓말 같은 고백이 진짜였단 것을 뒤늦게 실감했을 때.
“아….”
“그게, 그러니까….”
특함 대원들은 도저히 두 사람을 평소처럼 대할 수 없었다.
늘 보고 지내던 동료가 한순간에 감히 범접하지도 못할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들이 지키는 조국의 왕녀와 만인이 칭송한 가문의 후계자라니.
어색해진 동료들의 태도에 노아와 셀린도 살짝 서운하던 찰나.
“에이, 분위기 왜 이래.”
홀로 태연하던 아미가 실망을 감추지 못하겠다며 과장되게 투덜거렸다.
“사람이 비밀 좀 가질 수 있지!”
“그거 좀 알았다고 이렇게 어색해질 거야? 그것도 작전 전에?”
“그동안 같이 싸우고 등을 맞댔던 건 다 거짓이었나?”
“이야, 우리 특함 너무 치졸한데?”
아미의 따끔한 지적에 대원들 모두 깊이 반성했다. 몇몇은 부끄러움에 귀까지 붉히며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아미….”
“너 진짜….”
감동한 노아와 셀린은 눈시울마저 붉혔다.
“그래, 맞아! 두 분은 그냥 두 분인데!”
“죄송합니다.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잠깐 놀란 탓에 중요한 걸 까먹었습니다. 두 분 다 저희의 동료라는 사실을….”
특함 대원들이 훈훈한 분위기로 전우애를 다지려는데.
“사실 말이지.”
아미가 분위기를 타, 자신의 비밀도 털어놨다.
“나 성녀야.”
아미는 갈색 머리칼을 은발로 다시 바꾸고, 성력을 끌어내어 대원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으로 제 정체를 증명했다.
그리고 대원들은 절망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누군가가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치며 절규했다. 로간 미타스 상사였다.
“내 성녀님이! 내 성녀님이!”
“누가 네 성녀님인데, 응?”
로간의 등에 걸터앉은 아미가 슬쩍 엉덩이에 무게를 실었다. 로간은 더욱 크게 울먹거렸다.
“네 머릿속의 나는 어땠냐? 어? 어떤 설정을 지니고 있었냐고.”
“이럴 순 없습니다! 저의 성녀님은 이렇지 않다고요!”
“않다고요? 말이 짧다?”
“성녀님을 돌려주십시오! 그분은 저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여튼 이놈의 인기는….”
이것도 죄다.
어쩔 수 없단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미가 자비로운 미소와 함께 로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을 주어 꾹꾹.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던 로간은 이제 대놓고 엉엉 울었다.
충격에 빠진 건 로간만이 아니었다.
“…….”
“…….”
대원들은 노아와 셀린의 비밀보다, 아미가 성녀란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다들 성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하늘에 계신 위대한 어머님의 사랑을 받는 딸.
고고하고 성스러운 여인.
만인의 추앙을 한 몸에 받는 존재.
반짝이는 은발에 고운 피부, 가녀린 미모와 심금을 울리는 달콤한 목소리, 자비로운 성격까지.
물론 성녀가 신성청 벽에다가 ‘X발, X망해라!’ 라고 썼던 사건이 존재하나, 오랫동안 다져진 환상은 그리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었다.
특함 대원들에게도 성녀는 그런 존재였다.
“노아 너도 카드 할래? 돈은 얼마 걸래?”
“넌 이 상황에서 카드 내기가 하고 싶냐?”
“야, 어차피 내일모레면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데 좀 놀면 어떠냐. 중령님! 술 마셔도 됩니까?”
그런데 현란한 솜씨로 카드를 섞고, 한 손으로 럼주 병을 나발로 들고 마시는 저 걸걸한 군인이 성녀였다니.
자신들의 동료가 성녀였다니.
“…….”
아이스 중령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그는 이제 다시는 제 딸 센샤에게, 성녀님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라고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진짜….”
벨라 토르 중사가 노아를 힐끔거렸다.
“…차라리 벨로 대위님이 성녀였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니까 말이야.”
“중장님과 결혼한 것부터 이미 자기희생이시지.”
다른 대원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했다.
얼떨결에 칭찬 아닌 칭찬을 받은 노아는 괜히 솔직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기쁘지도 않고.
‘하지만….’
내심 다행이었다.
어쨌건 노아는 아미가 일부러 정체를 밝혔단 것을 알았다.
아미의 폭탄 발언 덕분에 저와 셀린의 고백이 부드럽게 넘겨졌다. 대원들도 아까와 같던 어색함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고마운 일이지.’
아미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부담이 상당했을 테니까.
“쟤가 진짜 성녀였다니….”
다만 셀린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선실 침대에 몸을 누인 그녀의 등을, 노아는 다 안다는 듯이 토닥토닥 두드렸다.
“저….”
그때, 아까부터 말이 없던 호네스 메라 일병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침울하기까지 목소리였다.
“치티아 중위님은 이제 신성청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미쳤냐, 거길 내 발로 다시 가게.”
아미가 단호히 말했다.
“신성청이 전 재산을 나에게 준다고 해도 안 가. 변태 새끼들, 다 뒤져버려라, X발….”
“그럼 여전히 특함에서 일하시는 겁니까?”
“배운 게 이것뿐이니까 여기 있어야지. 연금도 꽤 탐나고, 그간 고생해서 쌓은 경력도 아깝고.”
“그렇습니까….”
대놓고 안도하는 호네스를, 대원들이 안타깝게 바라봤다.
‘하필….’
‘아이고, 이 녀석아….’
‘사람 보는 눈이 아무리 없어도, 음, 아닌가?’
‘어쨌거나 지옥길 확정이군.’
모두 막내를 동정하는 사이.
“다들 이야기는 잘 나눴나?”
잠시 밖으로 나갔던 레토와 피스트 준위가 다시 선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노아와 셀린, 아미가 연달아 정체를 드러내자마자 급하게 자리를 비켰다.
“…술 먹었냐?”
레토는 아미의 손에 들린 럼주 병을 발견했다.
아미는 슬그머니 럼주 병을 코르크 마개로 꾹꾹 닫고 구석에 치웠다.
“몇 모금 살짝 마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평소와 변함없다니, 내가 정말 치티아 중위에겐 늘 놀라고 감동해.”
“아휴, 뭘 또 그리 칭찬하십니까.”
“기특하니까 엎드려뻗쳐.”
아미가 엎드려뻗치면서 성력으로 숙취를 깨는 동안.
“무슨 일입니까?”
아이스 중령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심상찮은 기류를 감지한 다른 대원들도 하던 것을 멈추고 레토를 바라봤다.
입구 가까이에 있던 뮤트 플리차드 병장이 눈치껏 문을 잠갔다.
창가에 있던 아미레 네고 중사도 만일을 대비해 창문을 전부 닫았다.
그제야 레토가 말했다.
“작전을 변경할 거다.”
“참모들의….”
“아닙니다.”
피스트 준위가 끼어들었다.
“저의 의견이고, 중장님께서 다른 분들의 찬반을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피스트 준위는 노아의 고백을 듣자마자, 그녀가 말했던 제국 서부에 있다는 해안협곡을 떠올렸다.
반신반의했었던 그녀의 의견이 진실에 가까워진 지금.
“작전을 수정해야 합니다.”
비레오 호는 시스토 제국 동부 해안으로 이동 중이다.
하지만 디모네 닉스가 이 모든 것을 예견해서 제국에 미리 언질해 뒀다면, 동부로 진입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제국 동부는 7년 전 역공전에서 중장님을 비롯해 해군에게 점령당한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가장 많은 병력을 주둔해 뒀을 거야.”
레토가 말했다.
“그렇지만 이걸 참모들이 반영하겠냐고.”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이들만큼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사람들도 없어. 이번 작전만 봐도 7년 전 작전과 지나치게 흡사해.”
참모부들이 짰던 계획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노아란 변수가 없었다면.
“그러면 대위님의 정체를 참모들에게 밝히는 건….”
클라우스 구베르 하사가 슬쩍 물어봤다.
“그건 위험해.”
빠르게 반박한 아이스 중령이 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위, 이런 표현 조심스럽지만….”
“괜찮습니다. 저도 아니까.”
노아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제 신분은 간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적국 출신의 귀족이 아들라보르에 숨어 사는 꼴이니까.”
“그렇게까지 말씀 안 하셔도…!”
메델라 사나 하사가 서둘러 끼어들었지만, 노아는 씁쓸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건 맞아.”
레토도 동의했다.
상관이자 남편인 그까지 그렇게 말하자, 대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노아가 자신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비밀을 밝혔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레토가 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벨로 대위를 비롯한 세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그대들에게 밝힌 건, 그만큼 믿고 신뢰한다는 증거야.”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 번 더 강조했다.
“세 사람의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그건 이번 작전이 끝난 후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논할 작전 변경은 아주 중요했다.
“여길 봐.”
레토가 말하는 동시에 피스트 준위가 바닥에 해도를 펼쳤다. 테이블도 없는 이 좁은 선실에 장정 13명이 쪼르르 모여 뭉쳤다.
“현재 배는 이곳 동부로 향하는 중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도 낭비고, 위험도 커.”
레토는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니 여기.”
배가 제국 서부와 가까워지는 지점.
“…무풍의 바다 근처란 말입니까?”
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스토 제국의 서쪽은 하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풍의 바다가 인접해 있었다.
‘그렇다면 노아가 했던 말이 맞아.’
셀린이 놀라움에 살짝 커진 눈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7년 전에 레토가 동부 해안을 통해 제국으로 진입했던 이유도 저것이었다.
무풍의 바다는 커다란 동력을 지닌 배가 아니면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제국 역시, 이번에도 왕국이 동부로 잠입할 것이라 예상하고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예측할 수밖에 없었다.
“벨로 대위.”
레토가 노아를 불렀다.
“그대의 기억은 확실한가?”
노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깎아내린 것처럼 가파른 해안 절벽, 그 앞에 무수히 솟은 바위 섬들, 비좁은 협곡 너비 등.
모든 사항을 고려해 볼 때.
“서부 해안으로 잠입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입니다.”
***
같은 시간.
폭우가 쏟아지는 남부와 반대로, 수도는 바깥 나들이하기 딱 좋은 햇살이 내리쬐고,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땡땡이치고 싶다….’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면서, 아티는 구치소로 차를 몰았다.
이젠 낯이 익은 구치소 직원에게 방문증을 보여 준 뒤, 그는 어느 수감 인물과의 면회를 신청했다.
그가 면회를 신청한 사람은 나비 칼루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