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하하!”
다시 안으로 들어온 아드벨로 대장이 기꺼이 몸을 낮췄다.
“이 새끼 말하는 거 보소.”
그러고는 풀루스 대위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제야 마주하게 된 젊은 사내의 얼굴에 아드벨로 대장의 눈이 미묘하게 번뜩였다.
“지금 네놈 새끼가 어떤 얼굴인지 알고는 있냐? 난 어째 네 얼굴이 아주 익숙하고 낯익네.”
그녀는 저 얼굴을 7년 전에 몇 번이나 본 적 있었다.
“전쟁 막바지에, 제국을 비롯한 연합국 군인들이 그런 표정을 자주 했지. 자기 몸에 폭탄을 달고 말이야.”
죽는 건 억울하고 싫다.
하지만 결코 혼자 죽긴 싫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간절함,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겠다는 비열함이 뒤엉킨 역겨운 표정.
풀루스 대위는 그런 놈들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곡을 찔린 것인지, 풀루스 대위는 시선을 피했다.
그 꼴마저 같잖았던 아드벨로 대장은 더러운 것을 만졌단 듯이 머리채를 놓고는 손을 툭툭 털었다.
“…그 녀석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대장이 말했다.
“너와 자기가 닮았다고 말했었지. 기억하냐?”
“오케아누스 중장님 말입니까?”
“목소리가 꽤 띠껍네.”
그나저나 이젠 정말 대답을 곧잘 하는군.
아드벨로 대장은 이번에도 별 같잖은 것이 다 있느냔 시선으로 남자를 내려다봤다.
“근데.”
그러곤 이내 피식거렸다.
“내가 볼 땐 아니야.”
아드벨로 대장도 잠깐이나마 이 두 사람이 닮은 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기구한 인생사도, 최악의 남자를 아버지로 뒀다는 점도.
하지만 다시 보니 아니었다.
레토와 풀루스 대위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 녀석은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노력했어.”
제 처지를 비관할지언정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욕되게 했던 머저리였다.
그러나 그의 처절한 노력은 끝내 빛을 봤다.
이제 레토에겐 그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더는 외로울 일도, 스스로를 욕되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근데 넌 뭐 하냐?”
풀루스 대위는 분명 불쌍한 인생을 살았다. 약물로 세뇌를 당해 자신의 의지조차 없이 이용당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레토보다 힘든 삶이었다.
하나 그런 그에게도 기회는 주어졌다. 세뇌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도 내밀었다.
그런데 하면 뭐하나.
눈앞에 나타난 기회를 이렇게 뿌리쳤는데.
이젠 더 이상 마약으로 세뇌되어서 판단력이 흐려진 탓이란 핑계도 불가능했다.
아드벨로 대장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해군은 국가 수호를 우선시하는 군대지, 재활병동이나 치료원 따위가 아니었다.
“디모네 닉스가 절 닮은 쓰레기를 잘도 찾아냈어.”
결국 같은 쓰레기끼리 끌렸던 거군.
아드벨로 대장의 노골적인 비난에도 풀루스 대위는 덤덤했다. 오히려 닮았다는 말에 은근한 기쁨까지 내비쳤다.
“그렇게 욕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래, 맞아.”
아드벨로 대장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고는, 마지막 선행이라도 하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달라지는 건 없지.”
말을 마친 그녀는 미소를 싹 거뒀다.
냉랭한 무표정을 바라본 풀루스 대위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너는 실수를 저질렀고, 디모네 닉스는 영원한 찌질이야.”
***
아드벨로 대장이 친히 알아낸 정보는 빠르게 비레오 호에 전달되었다.
배가 출항한 지 고작 1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폭풍우가 몰아친다 해도, 전보를 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통신병이었다고 들었는데….”
검은 건물에서 나온 비서실장이 아드벨로 대장에게 물었다.
“왜 저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위 말하는 자충수라는 거 아니겠어?”
아드벨로 대장은 이제 풀루스 대위에 관한 관심을 완전히 끊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조차 못 알아보는 등신에게 연민을 퍼부을 정도로 착하지 못했다.
“안됐긴 했어.”
하지만 미약한 동정은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어른을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인지 판단하지 못했던 거야.”
“그 남자는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 겁니까?”
“아니.”
어쨌거나 풀루스 대위는 협력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는 자신이 원치 않았던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피곤하구만.’
연민은 없는데 동정은 들고, 하필 또 제 손주들 뻘이라 마냥 내버려 두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나도 늙긴 늙었네.’
그때였다.
“…글로리아.”
비서실장이 대뜸 손을 뻗어 대장의 앞을 막았다.
뜬금없이 자신을 가로막는 널찍한 품 안에 아드벨로 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넘겼다.
“무슨 짓이지? 근무 중엔 호칭 주의하기로….”
“이번 일이 끝나면.”
비스가 눈웃음을 싱긋 지으며 물었다.
“유람선 타고 세계 일주나 할까?”
“…….”
생뚱맞은 권유에 글로리아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비스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늙긴 늙었군. 옛날 같았으면 바로 둘러메고 비품실로….”
“늙어서 얌전해지나 했다, 네가.”
어이가 없어진 글로리아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던 비스는 그제야 글로리아를 가로막던 팔을 스르륵 풀었다.
“어쨌든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비서실장이 공손히 말했다.
“이제 대장님이나 저나, 슬슬 서로만 바라보며 즐겁게 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이들은 다 컸고, 재롱만 구경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쁘지 않네.”
아드벨로 대장의 긍정에 비서실장이 기쁘게 웃었다.
“어쨌건 그것도 녀석들이 무사히 돌아온 뒤에나 가능하지.”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그래….”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은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컴컴한 하늘 위로 희미한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럴 거야.”
여름의 마지막 일출이었다.
***
“…….”
클라레는 풀 죽은 표정으로 현관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새벽에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잘못으로 어른들에게 따끔하게 혼이 난 탓이었다.
덕분에 오늘이 바로 자신의 진짜 생일인데도 영 기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이 방학 마지막 날인데도 영 아니올시다였다.
“클라레.”
“아직도 거기 있어?”
밖으로 나온 제니우스와 아메타가 클라레를 찾았다.
“으응….”
힘없이 고개를 든 클라레의 모습에 부모는 웃음을 피식 터트렸다. 이 까불이가 이렇게 기운 없는 것도 참 드문 일이었다.
둘은 클라레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아까 혼난 것 때문에 그래?”
아메타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건 내가 혼날 만한 일이었어.”
야무지게 대답한 클라레가 부모님을 힐끔거렸다.
“있잖아, 언니는 나 낳아 준 부모님 찾으러 간 거지?”
클라레가 물었다.
“나는 엄마랑 아빠가 좋은데, 언니는 아닌 거야? 그래서 낳아 준 부모님 찾으러 간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제니우스가 클라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엄마의 품에 안긴 클라레가 코를 훌쩍였다.
“아가, 네 언니는 그분들과 14년을 살았어. 지금 네 나이보다 훨씬 더 오래 말이야.”
아메타가 다정히 설명했다.
“노아는 낳아 준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추억이 있어. 그래서 바다에 간 것이란다. 그곳은 노아와 네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해.”
“…난,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아이가 아는 것이라곤, 낳아 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과 바다 건너 제국에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클라레에겐 지금의 부모님이 진짜고, 낳아 준 부모님은 어쩐지 가짜 같았다.
다들 낳아 준 부모님께 고마워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클라레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미안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꼭 큰 잘못인 것 같고, 그 때문에 불편해진 마음은 자연히 낳아 준 부모님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한데 그렇게 생각하면 또 미안해지고.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나는 지금 부모님이 좋아! 낳아 준 부모님 필요 없어!”
거기다 나쁜 말까지 해 버렸으니.
“…나는 못된 아이야.”
또 우울해진 클라레의 입꼬리가 축 내려갔다.
“정말 못된 아이라면 이렇게 미안해하지도 않을걸?”
아메타의 말에 클라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싱긋 웃던 아메타는 아이의 조그만 코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이상하게 부끄러워진 클라레가 손으로 코를 쏙 가렸다.
“왜냐하면 우리 강아지, 아주 잘 알고 있거든.”
“뭘?”
“낳아 준 부모님이 고마운 사람이란 걸.”
“그 정도는 알아!”
“그래, 그 정도만 알아도 충분해.”
제니우스가 클라레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엄마랑 아빠가 너희들이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돌아가신 친부모님들도 클라레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셨단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목숨까지 걸었겠는가.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론 그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평범한 행동이다.
“그러니까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정말…?”
“네가 이렇게 슬퍼하면, 그분들도 슬퍼하실 거야.”
제니우스가 말했다.
“그러니 노아가 낳아 준 부모님을 모셔 오면, 낳아 줘서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자.”
“…….”
정말 그거면 될까?
클라레는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언니는, 언제 올까?”
클라레가 굳게 닫힌 현관문을 보며 말했다.
“빨리 오면 좋겠다….”
노아를 벌써 그리워하는 막내딸을, 제니우스와 아메타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봤다.
***
그 시각.
비레오 호는 점점 거세지는 파도와 비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들라보르가 자랑하는 해군의 군함도 자연 앞에서는 비루한 쇳덩이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씨는 계속 험악해졌고, 덩달아 해군들도 분주해졌다.
갑판병들은 부질없는 비옷을 걸친 채로 갑판 위를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며 점검에 나섰다. 추기병들은 엔진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기계에 문제가 없는지 살폈다.
선내 다른 병사들도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반면, 작전 투입을 이유로 기간제 자유를 얻은 특함 대원들은 선실에서 자유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이 정도 파도면 버틸 만하지.”
아미는 조리실에서 훔쳐 온 과일을 크게 베어 물며 말했다.
“심심한데 카드나 한 판 할까.”
마침 테이블 위에 카드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누구 나랑 카드 할 사람?”
“…….”
“…….”
하지만 누구 한 명 손을 들거나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비통한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거나, 차라리 배멀미를 하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가 기도한 자기 입을 찰싹찰싹 때리는 기행도 벌였다.
“왜 저런담.”
아미가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가 놀아준다는데, 기뻐하진….”
“으아아아!”
“아악! 아아악!”
특함 대원들은 귀를 막으며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