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레토는 이 선택이 강요는 아니라고 말했다.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임무이긴 해. 하지만 분명 임무 중에 수상한 낌새를 눈치챌 대원들이 있을 거야.”
그리고 작전이 끝나면 두 사람의 신분은 자연스럽게 노출될 터였다.
노아는 부모님의 유해를 모시고 직접 장례를 치를 거고.
셀린은 왕궁에 복귀하여 제 존재를 드러내야 했다.
“결국엔 자의로 밝히냐, 타의로 밝혀지느냐의 문제지.”
“…….”
“…….”
곰곰이 생각하던 노아와 셀린은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응?”
노아가 손을 슬쩍 내밀며 묘한 눈짓을 했다.
“…응.”
셀린이 이에 응수했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그러곤 대뜸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악!”
진 사람은 셀린이었다.
셀린은 자신이 낸 주먹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포기에 가까운 한숨을 흘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사실은 말이지….”
그러기를 잠깐.
“내가, 아들라보르의 왕녀야.”
자신의 정체를 고백했다.
“망할 선왕이 7년 전에 평화 종전을 위해서 날 이용하려고 했거든. 그 왜, 정략결혼 같은 거.”
그 내용이 적힌 비밀 협약서가 제국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셀린은 전쟁이 끝난 지금까지도 정체를 숨기고 사는 중이었다.
“…….”
생각지도 못한 친구의 기구한 사연에 노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야. 아니, 중장님.”
너무 놀란 노아는 순간 나온 말실수를 빠르게 정정했다.
“중장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어? 어.”
셀린의 고백에도 심드렁하던 레토가 억지로 비통함을 끌어 올렸다.
당연히 이를 눈치챈 셀린은 몰래 역겨움을 드러냈다.
“국왕에게 전해 들어서 나도 보호에 동참하고 있었어.”
“보호….”
셀린은 보호가 아니라 무관심과 방치에 가까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난 늘 중위가 불쌍했어. 태어나면서 주어진 얼굴도, 말하는 꼬락서니도 국왕을 닮아서….”
레토가 눈물을 훔치는 척했다.
셀린은 어느 때보다 화사한 미소를 띤 채 노아를 불렀다.
“너 나중에 네 남편 사관생도 시절 비밀 알고 싶으면 나한테 와라. 내가 오빠 새끼한테 들은 게 좀 많….”
“나에게 보르 중위는 처제 같은 존재랄까?”
레토가 뒤늦게 아차, 했다.
노아는 그런 남편을 요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레토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깜빡깜빡 움직이며 저의 무고를 주장했다.
그 모습에 노아는 또 마음이 약해졌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셀린은 이제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노아는 일단 궁금한 건 나중에 셀린에게 따로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은 또 다른 중요한 사항이 남아 있으니까.
“난 피에타 가문의 생존자다.”
그래도 요 짧은 사이에 몇 번이나 정체를 밝힌 경험 때문인지, 노아의 고백에 망설임은 없었다.
“뭐!”
하지만 셀린의 표정은 여태 노아가 본 얼굴 중 가장 웃기고 경악스러웠다. 괜히 미안해졌다.
“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토가 물었다.
“그래서, 둘 다 어쩔래?”
***
몇 분 뒤, 선실로 복귀한 노아와 셀린은 대원들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밝혔다.
“피에타 가문의 생존자입니다.”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아들라보르 왕녀입니다.”
이 맥락을 가늠하기 어려운 고백에 대원들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는 헛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해 귀를 만지작거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중장님이 분위기를 풀 겸해서 시킨 거라고 멋대로 판단했다.
즉, 아무도 믿지 않았다.
딱 한 명.
“…….”
모든 것을 아는 아미 혼자서만 입을 꾹 다문 채 어깨를 떨며 웃음을 삼켰다.
“…예, 뭐. 알겠습니다.”
분위기를 살피던 피스트 준위가 대충 정리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중장님. 아까 설명하시다 만 임무 중 나머지 두 가지를….”
“그 두 가지는.”
도로 자리에 앉은 레토가 노아와 셀린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당사자들이 직접 설명토록 하지.”
시작은 앞서 가위바위보에서 진 셀린부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뚱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두 번째 임무는 선대 국왕이 시스토 제국에 넘긴 셀레나 왕녀의 정략혼을 논하는 비밀 협약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대원들이 모두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 사실은 극비 중 극비입니다. 선대 국왕은 7년 전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저를 시스토 제국의 정략혼 상대로 써먹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겨 버렸으니, 선왕의 계략은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비밀 협약서도 갑자시 자취를 감췄다.
“이제 보니, 그 협약서를 제국에 넘긴 개시발, 아니, 용의자가 디모네 닉스였나 봅니다.”
설명을 마친 셀린이 대원들을 쭉 돌아봤다.
시선이 마주친 그들의 눈빛에 이제야 ‘진짜 왕녀야?’라는 의구심이 솔솔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왕녀입니다.”
왕위 계승 서열 2위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덧붙였다.
대원들이 아직 놀란 정신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사이, 노아가 이어 말했다.
“세 번째 임무는….”
제 정체를 밝히는 것처럼 쉬울 줄 알았는데, 노아는 저도 모르게 그만 멈칫거렸다.
제 입으로 부모님의 유해를 찾으러 간다고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찰나였다.
노아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피에타 백작 부부의 유해를 수습하여 그것을 제국으로 이장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셀린이 왕녀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원들 앞에서, 노아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서 푸른 번개 같은 오러가 파지직 나타났다.
“……!”
이를 가장 먼저 알아본 건 마탑 출신인 피스트 준위였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피에타 가문의 생존자입니다.”
오러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한 노아가 말했다.
“저는 피에타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7년 전에 끝맺지 못한 종지부를 찍을 것입니다.”
“저, 저기….”
대원 중 한 명인 메델라 사나 하사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무슨 종지부인지, 그러니까 말씀하신 그 끝맺음이….”
메델라 사나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허둥거렸다.
거의 폭탄 두 개가 연달아 터진 꼴이었다. 엄청난 파장을 감당하지 못하는 대원들은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에게 이해할 시간을 줄 여유가 없었다.
“부모님의 유해를 찾아 왕국으로 돌아가면….”
노아는 7년 전에 차마 해내지 못한 ‘마지막 종지부’를 입에 담았다.
“…피에타 가문은 아들라보르에 망명을 신청하고, 모든 작위를 내려놓을 겁니다.”
노아의 비장함에 덩달아 선실 분위기도 무거워졌다.
이제 대원들은 노아와 셀린의 고백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믿었기 때문에 더욱 큰 충격에 빠졌다.
“중장님.”
아이스 중령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게 가능한 임무입니까?”
두 대원이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밝혀 준 것과 별개로, 아이스 중령을 비롯한 나머지 대원들은 임무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했다.
“협약서는 어디에 있고, 피에타 백작 부부의 유해는 또 어디에….”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레토가 씩 웃었다.
“피에타 백작 부부의 유해는 벨로 대위가 알려 줄 것이다.”
그 말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와 페미나가 이전 주인들의 행방을 알려 줄 것이다.
“그리고 협약서의 행방은 조금 전에 전보가 왔다.”
감금되었던 풀루스 대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고.
***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
비레오 호를 떠나보내기 무섭게, 샤프 영지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본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아드벨로 대장은 비서실장과 함께 검은 건물로 향했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먼저 와 있었던 볼트리아 중장과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가볍게 경례했다. 아드벨로 대장이 손을 살짝 들어 경례를 받았다.
“어때?”
아드벨로 대장은 유리창 너머 감금실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전에 특함 대원들의 출항 소식을 흘렸습니다.”
볼트리아 중장이 말했다.
“소식을 들은 뒤로 계속 저 상태입니다.”
유리창 너머 감금실에 있는 풀루스 대위는 낡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이상은 없는 거지?”
“치티아 중위가 출항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는 이제 완벽한 정상입니다.”
군종실장의 대답을 들은 아드벨로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문짝을 발로 걷어차면서.
문이 쾅! 하고 벽과 부딪혔다.
특수 제작한 경첩이 빠직 소리를 내며 나사가 하나 풀렸다.
“X발 새끼야.”
요란스럽게 들어온 아드벨로 대장은 다짜고짜 풀루스 대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속이 후련하냐?”
위협적인 목소리가 풀루스 대위의 목을 졸랐다.
“컥…!”
풀루스 대위는 까치발이 들린 채로 숨을 꺽꺽거렸다.
“네가 결국 마지막까지 입을 다문 덕에, 애먼 내 부하들만 제국에서 개고생하다가 죽게 생겼어.”
“…….”
“도와준다고 했는데도 네놈 새끼는 이딴 선택을 했군.”
아는 것을 전부 털어내면 모든 것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드벨로 가문에서도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고 아드벨로 대장이 직접 약조까지 했다.
그러나 풀루스 대위가 선택한 건 침묵이었다.
“뒤질 거면 혼자 죽을 것이지…!”
노기가 잔뜩 서린 눈빛은 풀루스 대위의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 노려보기를 한참.
“…젠장!”
대장은 험악하게 일그러진 인상으로 욕을 몇 마디 내뱉고는 풀루스 대위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았다.
바닥에 던져진 풀루스 대위는 사레가 들린 것처럼 한참을 콜록거렸다.
그 모습을 불쾌하게 노려보던 아드벨로 대장이 뒤를 돌아섰다.
“…벨리피아 백작의 저택.”
나가려던 아드벨로 대장의 발걸음이 멈췄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인 풀루스 대위가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아까 아드벨로 대장이 홧김에 너무 힘을 준 탓에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거기에, 비밀 협약서가 있습니다.”
“너 지금 나한테 장난 거냐?”
돌아선 아드벨로 대장은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뭐? 배는 이미 떠났는데 이제 와서 왜 말하는데? 그냥 교수형으로 뒤질 때까지 평생 품고 있지.”
“다음 부대를 또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별일 아니지 않으냔 어투로 말하는 꼬락서니에, 아드벨로 대장의 관자놀이에 핏줄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