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아드벨로 대장은 언젠가 한 번, 클라레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클라레의 나이는 고작 4살이었다.
“어느 날엔가, 유치원 다녀와서는 나한테 제국에 대해 물어보는 거야.”
“할미, 제국이 뭐야?”
“제국?”
유치원에 갓 입학한 4살짜리가 어디서 뭘 들은 모양이다, 싶어서 대충 간단하게 설명해 줬었다.
“시스토 제국이라고, 바다 건너에 있는 또 다른 나라야.”
“거기는, 나빠?”
“다 나쁘진 않아.”
“언니는 울었는데….”
“어? 네 언니가 울었다고?”
“나 아기였을 때, 언니가 울었어.”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겨우 4살짜리가, 그때도 어렸던 클라레는 훨씬 더 어렸을 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노아가 밤마다 저를 안고 미안하다고 울었다더라.”
“…….”
그리고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제니우스는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난 전혀 몰랐는데….”
“자책하지 마. 나도 몰랐으니까.”
아드벨로 대장이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녹는 사탕이 쓸데없이 달았다.
한참 동안 사탕을 굴린 뒤에야 대장이 말을 이었다.
“죄책감이 얼마나 심했겠어, 노아가.”
가문이 사라지고, 부모가 죽었다.
품에 남은 것이라곤 젖먹이 여동생뿐.
고작 열네 살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겁기만 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언니를 늘 지켜봤을 클라레는 얼마나 불안했을꼬.”
노아는 클라레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로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클라레는 아기였을 때부터 노아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다들 종종 까먹는데, 클라레도 7년 전에 죽을 고비를 넘겼던 피해자였어.”
글로리아가 제국에서 피에타 자매를 발견했을 때, 가장 걱정했던 건 클라레의 상태였다.
씩씩하고 건강한 지금과 달리, 생후 1개월의 클라레는 제대로 먹지도 못해 울 힘조차 없었다.
기저귀도 제때 갈지 못해 엉덩이가 짓무르고 발진까지 올라왔었다.
속된 말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었다.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클라레의 마음속에 선명한 낙인을 찍은 거지.”
아이의 기저에 깔린 제국을 향한 불신, 언니를 향한 이상할 정도의 집착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클라레가 가장 불안할 거야.”
노아는 적어도 알고 있다. 자신의 불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클레라는 아무것도 모른다.
왜 자신이 이렇게 불안한지, 왜 자신이 그토록 제국을 싫어하고, 왜 언니는 저렇게나 화가 나 있고 불안한지.
“…둘 다 딱해.”
누가 더 불쌍하고 안타까운지는 따질 수 없었다.
결국, 두 자매 모두 7년 전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안타까운 사실만이 중요했다.
“이러니까 7년 전에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었어야 했어.”
퉤.
아드벨로 대장이 바닥에 사탕을 뱉으며 투덜거렸다.
바닥에 떨어진 사탕은 대장의 딱딱한 구두에 와그작 밟혀 으깨졌다.
“하필 그때 그 X발 새끼가 갑자기 뒤지는 바람에….”
“선왕 말이야?”
두 딸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던 제니우스도 덩달아 불쾌감을 내비쳤다.
“그 새끼, 진짜 때맞춰 죽었었지?”
“전쟁 끝나고 진상 파악하려는 찰나에 뒤졌지.”
“그때 그것도 말이 많았잖아.”
다시 생각해도 선왕의 마지막 행보는 너무 기이했다.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고, 고생한 군인들의 공로도 제대로 치하하지 않았었다.
특히 전쟁의 승기를 잡게 해 준 젊은 영웅, 레토 오케아누스는 아예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죽음마저 이상했다.
원래도 몸이 약한 국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에 갑자기 식사 중 급사해 버렸다.
이 때문에 한때 왕태자가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거, 사인은 심장마비였잖아.”
“…그거 말인데.”
아드벨로 대장이 제니우스 귀에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자살이야.”
그 새끼, 도망친 거야.
“…….”
속삭이는 목소리에 제니우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엄마.”
제니우스가 물었다.
“전부터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뭔데?”
“전쟁의 원흉이 그 세 사람인 건 확실한 사실이잖아. 영원히 감춰져야 할 비밀이지만.”
“그래. 절대 드러나선 안 될 사실이지.”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선대 국왕, 신성청 성왕, 디모네 닉스.
이 악마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킬 흉모를 꾸몄다.
그리고 시스토 제국을 비롯한 연합국을 부추겨 자신들의 나라를 먼저 선공하게 했다.
“선대 국왕과 신성청은 자신들의 세력과 기득을 더욱 굳건히 하려는 거였겠지. 전쟁 특수도 노렸었고.”
그래, 여기까지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정말로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이유로 이런 미친 짓을 벌였구나, 하고 넘길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디모네 닉스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추측할 수 없었다.
“미친놈 머릿속은 이해를 못 하겠어. 그 새끼는 아티보다 더 미친 새끼잖아.”
“미친놈 머릿속을 뭐 하러 이해해.”
아드벨로 대장이 냉정히 대꾸했다.
“미친놈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더 미쳐야 해.”
그리고 그건 결코 이득 없는 짓이었다.
***
비레오 호는 예상보다 빠르게 출항했고, 그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출항 날짜가 연기됐겠군.”
조타실에서 상황을 보고받던 레토가 중얼거렸다.
함선이 항구를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샤프 영지에 강한 돌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지금도 바다 날씨는 심상치 않습니다만, 이대로라면 예상대로 사흘 안팎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클라시스 소장이 말했다.
제1함대 함대장인 그는 이번 작전에서 비레오 호의 선장 자격으로 함께하는 중이었다.
늘 호쾌한 인상이던 클라시스 소장도 오늘만큼은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대위는 괜찮습니까?”
클라시스 소장이 조심히 물었다.
“괜찮아야지.”
레토가 안타까이 웃었다.
노아는 딱히 울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도 대원들과 함께 선실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고.
하지만 속은 분명 말이 아닐 게 분명했다.
“벨로 대위의 여동생은 워낙 유명 인사이지 않습니까. 해군의 전설을 그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언니에게 가지 말라며 엉엉 울던 아이의 모습이, 가볍게 웃어넘기기엔 조금 안타까웠다.
“저도 처자식이 있는 몸인지라,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 말입니다.”
“새벽부터 시끌벅적하게 했군.”
“그게 아이들이 할 일 아니겠습니까. 사고치고, 어른들한테 걱정 끼치면서 무언가를 배워 나가고.”
“클라시스 소장은 좋은 아버지였겠어.”
“저도 시행착오 많이 겪었습니다. 특히 큰딸과 많이 다퉜었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싶은 레토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조타실을 나온 레토는 특함 대원들이 머무는 선실로 이동했다.
레토가 들어가자 쉬고 있던 대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토는 되었다면서 손짓으로 그들을 다시 앉혔다.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레토가 넌지시 한 마디 했다.
“…너무 좁은데?”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아이스 중령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가장 넓은 선실입니다.”
여느 군함이 그러하듯, 동력 엔진과 기계 부품, 무기 등 다양한 장치로 가득한 선함 내부에서 사람에게 배정된 활동 구역은 무척 작았다.
그나마 작전 수행원인 특함은 이 중에서 가장 넓은 선실 두 곳을 배정받았다.
그중 상대적으로 큰 이곳 선실은 특함 대원들의 임시 회의실로도 쓸 예정이었다.
“한데 중장님.”
아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희가 이번 작전에서 해내야 할 임무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
레토가 눈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랬나?”
말한 줄 알았는데.
레토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12명 대원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종종 기밀 엄수를 이유로 작전 임무 내용을 당일까지 비밀로 할 때도 있다.
대원들은 이번 작전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망할 사령관이 정말로 그냥 까먹고 잊었던 것이었다.
“아니, 까먹어서 그런 건 아니고.”
대원들의 속마음을 읽은 레토가 한 손을 휘저으며 넉살 좋게 웃어넘겼다.
믿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어쨌건 말이 나온 김이니까.”
레토가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수행할 작전명은….”
설명을 듣던 노아는 일순 레토와 눈이 마주쳤다.
“…귀향이다.”
아.
노아는 속으로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내 눈치를 살폈구나.’
노아는 대충 알 법하단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 이 작전명은 아드벨로 대장이 지은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서 우리가 완수해야 할 임무는 세 가지.”
첫 번째는 한 달 전 새벽에 진행된 긴급회의에서 언급되었던 내용대로, 디모네 닉스와 제국이 내통했다는 증거를 입수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이어 말하려던 찰나.
“…….”
대뜸 입을 닫아 버린 레토가 입가를 한 손으로 매만지다가, 노아와 셀린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밖으로 호출했다.
세 사람은 선실 옆에 비어 있는 아주 좁고 더러운 창고에 몸을 비집으며 들어갔다.
“두 사람은 아마 짐작하고 있을 거야.”
레토의 말에 노아와 셀린이 서로를 바라봤다.
순간 저게 무슨 말인가, 하고 고민하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먼저 물어본 건 노아였다.
“설마 너도 출생의 비밀 같은 거 있어?”
“미친, 너도?”
“그래, 둘 다 비밀이 있지.”
자신이 데려왔지만, 레토는 이게 뭐지 싶었다.
피에타 가문의 생존자와 아들라보르 왕국의 왕녀.
그리고 건너 선실에는 성녀님도 계시고.
‘…이거 정말 뭐지?’
살짝 지끈거리려는 두통을 애써 무시하며, 레토가 말했다.
“짐작하겠지만, 이번 작전의 임무 중 두 가지는 두 사람과 연관되어 있다.”
레토의 말에 노아와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먼저 물어보려고.”
자신의 비밀을 대원들에게 밝힐 각오가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