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그래.”
뒤늦게 떠올린 레토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스토 제국이 느닷없이 진행한 군 개편안.”
“아아!”
“그거!”
아미와 셀린도 뒤따라 떠올렸다. 그러고는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레토가 개편안 내용을 떠올리면서 노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노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피곤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짜증스러움과 분노도 얼핏 느껴졌다.
“…이때, 제국이 부사관의 수를 줄였었지.”
그것도 전쟁 중에.
“전쟁이 끝나고 알려진 사실인데, 시스토 제국은 원래 전쟁을 치를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야.”
“국책 사업 하나를 거하게 말아 잡쉈거든.”
노아가 비아냥거렸다.
“갑자기 되도 않을 광업에 투자하겠다고 돈을 끌어 모아서 퍼부었더니, 정작 광산 매장량은 몇십 톤밖에 안 되고….”
심지어 매장된 광산도 질이 떨어져 안 캐느니만 못한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토록 반대…!”
생각하다 울컥한 노아가 말을 내지르려던 찰나.
“노아.”
레토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제야 정신 차린 노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샌가 다들 자신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아미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과장되게 씩 웃었다.
“너 많이 안다? 역시 우리 사관생도 동기 중 수석이라니까! 난 그런 거 알지도 못하는데!”
“넌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셀린이 물었다.
“마탑이 7년 전 전쟁을 백서로 집필할 때 참여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레토가 눈치껏 끼어들어 솜씨 좋게 변명했다.
“그래서 장인어른께 들었나 보군.”
“응. 맞아. 아빠한테 들었어.”
노아가 서둘러 덧붙였다.
다행히 셀린은 그러냐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거짓말이 잘 통했는지 의심하는 눈치도 없었다.
이야기는 다시 진행되었다.
“…노아가 말한 대로, 시스토 제국은 국책 사업이 정말 크게 망해서 국고가 텅 빈 상태였어.”
그 상황에서 주변 국가와 연합을 맺어 아들라보르 왕국에 선공을 가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시스토 제국은 돈이 없었지.”
물론 전쟁의 원흉은 아들라보르 국왕과 디모네 닉스, 그리고 신성청의 성왕 세 사람이지만, 결국 전쟁을 시작한 건 시스토 제국을 비롯한 연합군이었다.
그런데 돈은 없다.
그러니 돈을 구해야 했다.
그래서 부사관들을 잘랐다.
“부사관은 어떤 의미론 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야.”
하사부터 시작해 중사, 상사, 원사.
이들은 소대를 관리하고 일반 병사들을 교육 및 훈련시키며, 장관급 장교들의 지시를 받아 여러 임무를 수행하는 군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이 있어야 군내 물자가 들어오고, 전문 기술이 요구되는 임무에서도 원활한 진행이 가능했다.
그런데 시스토 제국은 돈이 필요해지자 느닷없이 부사관 전원을 강제 전역시켰다. 부사관 계급이며 직위도 전부 없애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이들을 일반 병사로 징병한 것이었다.
“서열은 물론이고 소통까지 엉망이 되니, 군 통제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었지.”
그래서 떠올린 대안이, 군 의결기구에 권력을 넣어 군을 통제하는 방법이었다.
“…사관학교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셀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합군의 패전 원인 중에 가장 크게 꼽히는 것이 바로 이 개편안이었다고.”
“맞아. 그리고 아까 노아가 말한 대로 피에타 가문이 이 개편안을 필사적으로 반대했지.”
그러다가 결국 황실의 미움을 사서 멸문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문에서 유일하게 이 개편안을 찬성했던 배신자가 지금도 의결기구의 의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 다음으로 조심해야 할 인물은 누구인가요?”
노아가 치미는 짜증을 억누른 채로 아이트라에게 물었다.
아이트라가 말했다.
“바로 그 개편안을 제안했던 사람이에요.”
“제국은 나라를 망친 간신들을 더욱 챙기는 뭐, 그런 이상한 나라입니까?”
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만큼 제국이 타락했단 뜻이기도 했다.
패전 이후로 황실은 힘을 잃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통제할 힘을 잃었으니,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제 곳간을 채우려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며 폭정했다.
그러다 결국 폭발한 민심이 난을 일으키고.
이런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도 권력을 쥔 또 한 사람.
‘설마….’
노아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빠르게 떠올랐다.
“멜라니 벨리피아.”
아이트라가 이름을 말하는 동시에 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보르고 피에타의 아내야.”
***
노아의 기억 속 보르고 피에타와 멜라니 벨리피아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꺼림칙하고 기분 나쁜 게 똑같았어.”
본부 귀환을 한 시간 남겨둔 새벽 2시.
노아는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원래도 사이가 안 좋았어?”
문밖에서 기다리던 레토가 물었다. 들어보니 단순히 부모님을 죽인 원수라서 싫어한다는 느낌은 아닌 것 같았다.
“날 싫어했지.”
노아는 상의에 들어간 머리칼을 빼내며 피식거렸다.
“나 때문에 자기가 피에타 가문의 가주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놈이거든.”
“이해가 안 가는데?”
문 옆 벽에 기대어 있던 레토가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결혼한 가주의 다음 후계는 직계 자식이 보통 잇잖아. 그 숙부라는 새끼는 애초에 자격이 없는 거 아냐?”
“어머니가 날 임신하셨을 때 좀 위태로웠대.”
유산기가 조금 보였고, 실제로도 위험할 뻔한 순간이 두어 번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무사히 순산하였고, 그렇게 태어난 노아도 별 이상 없이 잘 자랐다.
거기다 이후에 클라레를 임신했을 때는 훨씬 더 몸이 건강해져서 위험한 순간마저 없었다고.
“아하.”
레토가 코웃음을 쳤다.
“안 봐도 뻔하네.”
보아하니 가문을 이끌 능력도,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제힘으로 뭘 해낼 재능도 없는 주제에 애먼 조카딸을 질투하는 찌질이.
“그럼 그 찌질이의 아내라는 사람은?”
“모략가.”
노아가 즉시 답했다.
“솔직히, 그 여자가 더 무서웠어.”
보르고 피에타가 능력은 없는데 욕심만 많은 찌질이라면, 멜라니 벨리피아는 그런 남편을 머리 꼭대기 위에서 가지고 노는 인형술사 같은 사람이었다.
멋모르는 어린 시절에는 왜 저런 예쁘고 똑똑한 사람이 숙부 같은 남자와 결혼했는지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본색을 드러낸 건 시간문제였다.
끼익, 하고 방문이 열리면서 노아가 나왔다.
“…낮잠을 자고 있었을 때였어.”
머리맡에서 소곤거리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정말 사랑스럽고 재능 넘치는 아이.”
“그래서 재수 없고 죽여 버리고 싶구나.”
“제발 어디선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죽어 주면, 진심으로 널 사랑할 수 있을 텐데.”
“…….”
레토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었다.
그런 저주 같은 발언을 낮잠 자는 아이에게 속삭였다고?
너무 충격이라서 말문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노아는 대충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찮아. 그 소리에 눈 뜨자마자 머리맡에 있던 목검으로….”
노아가 싱긋 웃으며 레토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스윽 그었다.
“뼈저린 교훈을 남겨 줬거든.”
그 뒤로 멜라니 벨리피아는 단 한 번도 피에타 저택에 방문하지 않았다.
“역시 내 아내야.”
레토가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노아도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며 그와 입술을 맞췄다.
맞물린 입술은 서로를 살짝 머금듯이 빨아대다가 떨어졌다.
“가기 전에, 처제는 안 봐도 돼?”
레토의 물음에 노아가 맞은편에 있는 문을 바라봤다. 유치원 다닐 적에 만든 수제 팻말이 달린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보면, 발이 안 떨어질 거야.”
노아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까 잘 자라고 인사했고, 클라레 본인도 섭섭하지만 잘 견디겠다고 했잖아. 나도 견뎌야지.”
“그러고 보면 처제도 좀 자란 거 같아.”
레토는 자신들의 신혼여행을 떠올렸다.
“그땐 언니 없다고 울면서 찾았잖아.”
“확실히 그때와 비교하면 성장하긴 했지.”
현관으로 나오니, 아미와 셀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글로리아와 비스도 본부로 복귀할 준비를 마쳤다.
“조심히 다녀오렴.”
“크게 다치지 말고.”
제니우스와 아메타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배웅했다.
“너희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단다.”
아이트라 역시 이들의 무사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
반면에 아스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몸을 휙 돌리더니 이내 어깨를 잘게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노아를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울컥한 노아가 괜히 과장되게 웃으며 아스의 등을 끌어안았다.
언제나 저와 가족들을 듬직하게 지탱해 주는 기둥 같은 언니가 이렇게 울어 버리다니.
“빨리 오도록 노력할게.”
“…….”
“안 다치고, 무사히 돌아올게.”
“…….”
아스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느리게 끄덕일 뿐입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레토의 인사와 함께 배웅은 그렇게 끝났다.
“너도 참 마음 여려서 어쩌니.”
제니우스가 겨우 울음을 삼키는 아스를 다독이며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 젖어 있었다.
아이트라도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렸고, 아메타는 이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먹거리고 있었다.
“어휴, 너도 이러는데 클라레는 어쩌나 몰라.”
“아가씨는 괜찮아요….”
아스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아가씨는 저보다 씩씩하고 침착해요. 내일 작은 주인님 없는 걸 알면서도 자기 방에서 자고, 잘 가라고 인사도 했는걸요.”
“이상한 데서 눈치를 본다니까.”
조금 침착해진 아스가 먼저 올라가 보겠다고 말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아스는 심호흡을 몇 번이나 깊이 하며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그래, 나도 진정해야지.’
한동안은 자신이 클라레를 돌보고, 이 집을 지켜야 했다.
작전이 끝날 때까지는 글로리아와 비스도 집에 제때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제니우스와 아메타 역시 마탑에서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내가 침착해야 아가씨도 덜 불안하실 거야.’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아스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 클라레의 방문을 살짝 열었다.
‘아가씨도 꾹 참으시는데, 나도….’
곤히 잠들어 있을 클라레를 살피려던 아스는, 텅 빈 침대를 보자마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그러곤 황급히 1층으로 내려갔다.
주인 없는 빈방.
반쯤 열린 창문 아래로 침대 이불이 밧줄처럼 내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