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시끌벅적한 생일파티가 끝나고.
“아저씨 감사합니다!”
“태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레토는 붉은 애마에 아이들을 태워 각자의 집에 한 명씩 데려다줬다.
“다들 내일 또 놀자!”
함께 따라온 클라레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휴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너무 즐거워서 피곤해….”
조수석에 앉은 클라레가 축 늘어진 채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레토가 싱긋 웃었다.
“즐거워서 피곤할 수도 있어요?”
“오늘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내 모든 힘을 쏟아부어 놀았거든요. 집에 가면 잘 거 같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클라레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잠깐 자요. 집에 갈 때는 업고 갈 테니까.”
“으으응….”
하지만 클라레는 고집스럽게 잠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클라레는 찬물로 세수하면서까지 잠을 쫓았다.
같이 놀았던 카리나는 아이들이 떠나기 무섭게 낮잠에 빠졌는데, 클라레는 어떻게든 깨어 있으려고 기를 썼다.
“그러면 내가 잠 깨는 방법 가르쳐 줄까?”
지켜보던 아미가 이리 와 보라고 손짓했다.
“설마 때리는 건 아니지?”
옆에 있던 셀린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아미를 흘겨봤다.
이에 클라레가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지금부터 아미가 할 것은 바로 축복이었다.
“지금부터 어머님의 견실한 딸이.”
아미가 성호를 그으며 나름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에게 가호를 내리겠노라.”
“가호가 뭐야?”
“몸을 튼튼하게 해 주고, 잔병치레 안 하게 하는 거야.”
“할머니가 그랬는데, 잔병치레 좀 해야 몸이 튼튼해진다고 했는데?”
“이런….”
생각지 못한 복병에 아미가 곤란함을 내비쳤다.
“그럼 할머니한테 가서 물어봐. 가호를 받아도 되냐고.”
그 말에 클라레가 냉큼 글로리아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 틈에 셀린이 물었다.
“뭐 하려고 그래?”
“가호 내리려고. 너도 받을래? 받으면 잔병치레 안 걸리고 피부도 좀 좋아진다?”
“치유마법 같은 거야?”
“사실 말이지….”
아미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사연 많아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성녀야.”
“…지랄하고 있네.”
셀린이 대놓고 비웃었다.
“야, 네가 성녀면 나는 이 나라의 왕녀다.”
“오오, 그러면 널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아도 되냐?”
“이 새끼가 왕녀 가지고 돈 벌 생각하다니. 무례한 녀석. 숙청 당하고 싶냐, 어?”
“얼씨구? 그러는 너는 성녀한테 말하는 꼬라지가 그게 뭐냐.”
“이 언니들은 또 왜 저러는 거냐….”
할머니한테 물어보고 온 클라레는 대뜸 자기들이 성녀고 왕녀라고 투닥거리는 언니들을 기괴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언니들은 나이를 엉덩이로 먹었어?”
보다 못한 클라레가 말했다.
“남의 집에서 그렇게 싸우는 건 예의가 아니야. 철 좀 들어. 어린애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
“…….”
한참 어린 동생에게 잔소리를 들은 두 언니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으흠, 뭐. 그러면.”
아미가 클라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할머니한테 허락받았어?”
“응. 가호 받아도 된대.”
“그러면 눈 감아.”
아미의 말에 클라레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하늘에 계시는 위대한 어머님.”
아미가 기도문을 읊자, 클라레의 머리 위로 새하얀 빛 가루가 소복소복 내리기 시작했다.
별거 있겠냐고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셀린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소파에 기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제 눈앞에 당신을 믿고 따르려는 어린양에게….”
“나는 양 아닌데?”
“…….”
기가 막힌 아미는 헛기침을 토하고 다시 기도를 읊었다.
“어린양에게….”
“양 아니라니까아!”
“어린양에게! 당신의 손길이 머물게 하시어!”
“나는 클라레 벨로라고! 왜 계속 양이라고 해!”
“좀 가만히 있어 봐!”
“신님! 나는요! 클라레 벨로예요!”
“아오, 진짜! 어머님 들으셨습니까! 클라레 벨로라는 이름의 어린양에게 당신의 손길이 머물러 사특한 것을….”
어찌어찌 가호를 마친 아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헉….”
아미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클라레를 노려봤다.
“힝, 꺼림칙해….”
정작 클라레는 아미가 손을 얹었던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한 발치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아에게 다가갔다.
노아는 등 뒤로 사진기를 슬쩍 숨겼다.
클라레가 제 정수리를 보여 주며 물었다.
“언니, 내 머리 괜찮아?”
“응, 괜찮아.”
“아미 언니가 나한테 저주를 내린 거 같아. 뭔가 이상해.”
“저게 진짜…!”
울컥한 아미가 뭐라고 한 마디 쏟아내려다가, 그냥 입 다물고 드러누웠다.
“이렇게 지치기는 또 처음이야….”
“잠깐이나마 네가 성녀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였지.”
맥이 빠진 셀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씻을게.”
“욕실 위치 알지?” 클라레, 우리도 다음에 씻자.”
“응!”
“그리고 아미 언니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고마운지 모르겠지만, 뭐, 고마워.”
“너 나 싫어하냐? 어?”
상처받은 아미는 됐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클라레가 꺄르르 웃더니 아미 곁에 다가가서는 등 위에 철퍼덕 누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랑 놀아 주는 아미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노아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8시간….’
본부 복귀까지 8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대화하거나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고.
마지막에 동생까지 재우면.
‘…짧네.’
금방 가 버릴 8시간이었다.
***
생일파티 때 달콤한 것들을 먹었기 때문에, 저녁은 살짝 매콤한 해물탕과 깔끔한 흰살생선 요리로 차려졌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노아와 아스는 집안일을 하고, 레토는 아이들과 놀아 줬다.
아미와 셀린은 각자 배정된 손님방에 들어가 쉬었고, 어른들은 거실에 모여 근황과 안부를 나눴다.
“엄마, 오늘 여기서 자고 가?”
잠옷으로 갈아입은 클라레가 물었다.
“물론. 왜냐하면 내일이 클라레의 진짜 생일이잖아?”
“엄마랑 아빠가 축하해 줘야지. 생일파티를 두 번이나 하는 거야.”
아메타의 말에 클라레가 헤벌쭉 웃었다.
“있잖아, 선물 또 뜯어도 돼?”
오늘 친구들과 함께한 생일파티에선 선물을 몇 개만 뜯었다.
친구들이 준 선물들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선물.
나머지 선물은 내일 뜯기 위해 남겨진 상태였다.
“그러면 내일 재미 없을걸?”
“내일의 재미는 내일 또 생각하면 되는 거야.”
“하하! 하여튼 엉뚱하기는.”
제니우스가 씩 웃으며 클라레의 볼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클라레는 입술이 옆으로 늘어난 채로 빵긋 웃었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카리나가 아이트라에게 물었다.
“어머니.”
“응?”
“으응, 그러니까요….”
“…나중에 우리도 생일파티 할 때, 친구들을 초대하고 재미있게 놀자꾸나.”
카리나의 속마음을 알아챈 아이트라가 먼저 제안했다.
“오, 너도 곧 생일이야?”
클라레가 물었다.
“언제 생일인데?”
“가을에.”
“그러면 또 생일파티 하는구나! 엄청 재미있…!”
“재밌는 것도 좋지만.”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머리 위로 비스가 나타났다.
비스는 두 아이에게 다정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다물고 차렷 자세를 했다.
“그만 자야지.”
어느덧 시곗바늘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 그러면 내일 늦잠 잔다?”
“내일까지는 방학이라 괜찮아!”
“그치만 일찍 안 자면, 키 안 큰다고 할아버지가 그랬어.”
카리나는 알버스가 해 준 말을 떠올리며 아이트라를 바라봤다.
“그쵸, 어머니?”
“그럼. 일찍 자야 키가 쑥쑥 크지.”
“피이….”
옳은 말을 하는 카리나를 보며 삐죽거렸지만, 결국 클라레도 순순히 자러 방으로 올라갔다.
“나 오늘은 내 방에서 잘란다!”
제 방 침대에 누운 클라레가 저를 재우러 온 노아아게 물었다.
“언니. 내일 아침에 언니 없어?”
“새벽에 일하러 갈 거거든. 그래서 일어나면 없어.”
“정말로 열 밤이 지나도 못 와?”
“서운해?”
“조금 서운한데, 참으려고 노력은 해 볼 거야.”
가을을 문턱에 둔 늦여름의 밤은 제법 선선했다.
노아는 클라레의 이불을 가슴 위까지 덮어주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마와 볼에 입술을 쪽쪽 맞췄다.
“고마워. 잘 자.”
“언니도 잘 자. 그리고 잘 다녀와.”
“기특해라. 잘 다녀올게.”
클라레를 한 번 꼬옥 끌어안은 뒤, 노아는 불을 끄고 방 밖으로 나왔다.
“…….”
혼자 남은 클라레는 머리맡에 있던 식칼토끼 인형을 품에 껴안았다.
어두컴컴한 방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눈이 조금 익숙해지니,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불빛이 제법 환했다.
“…읏챠.”
클라레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분명히….”
클라레가 중얼거렸다.
“전에, 오빠가….”
창문에서 몸을 뗀 아이가 방을 두리번거렸다.
***
아이들은 일찍 잠들었지만, 어른들은 새벽까지 쉬이 잠들지 못했다. 아니, 잠이 들 수 없었다.
“지금도 시스토 제국의 정세는 혼란스럽단다.”
아이트라가 거실 테이블 위에 펼친 시스토 제국의 지도를 쭉 살피며 말했다.
“황권은 당연히 전만치 못하니 귀족들의 위세가 등등해졌어. 제대로 된 통치와 규제가 없으니….”
“민심이 폭발 직전이로군요.”
레토의 말에 아이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몇몇 영지에서 민란이 여러 번 일어났단다. 저택과 곳간을 터는 일도 비일비재하지.”
“…….”
설명을 듣는 노아의 표정이 어두웠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했다.
“조심해야 할 구역이나 요주의 인물은 있습니까?”
“아무래도 귀족들이 모여 있는 서부가 위험해요. 최근 민란이 많아서 그쪽도 경계가 삼엄하거든.”
아이트라는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 두 명을 소개했다.
“한 명은 보르고 피에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노아는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시스토 제국 의전서열 2위로, 제국의 참모의장을 역임하고 있단다.”
노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처음 듣는 명칭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모의장? 그거 그냥 의결기구 아냐? 울 나라에선 국방부 장관을 보좌하는….”
“근데 의전서열이 2위라고? 국군 의전서열이 아니고 제국 의전서열이?”
“잠깐만….”
레토가 눈을 질끈 감으며 제 기억을 더듬었다.
“이거 어디서 분명 들어본….”
“…피에타 가문이.”
여태 가만히 있던 노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에타 가문이, 마지막까지 목숨 걸고 반대했던 군제(軍制).”
그리고 피에타 가문이 제국에 등을 돌리게 된 원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