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레토는 클라레가 자신의 등 뒤로 후다닥 숨는 걸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살아왔던 오빠보다, 이제 겨우 몇 개월 동거한 형부를 더 믿는다니.
‘어지간히 신뢰가 없으시군요, 형님.’
레토가 물었다.
“그냥 선물 같은데, 걱정되는 게 있어요?”
“작년에 선물을 줬는데….”
클라레가 말했다.
“텅 빈 상자를 선물하고는요, 거기 안에 사랑을 넣었대.”
“…….”
일전에 비슷한 장난을 쳤었던 레토 입장에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침을 뱉은 건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클라레의 ‘퉤’는 레토의 웃음 버튼이었다.
지은 죄도 있고 해서, 레토는 현관 앞에 떡하니 놓인 커다란 선물 상자를 풀어봤다.
“안에 위험한 거 있으면 어떡해….”
카리나는 혹여 선물을 풀다가 레토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었다.
정작 선물 좀 봐 달라고 부탁한 클라레는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심드렁했다.
다행히 상자 안에는 이상한 게 들어 있지 않았다.
“이것 좀 봐봐.”
레토가 아이들을 불렀다.
“와!”
“공책이다!”
상자 속 선물의 정체는 어마어마한 수량의 공책이었다. 눈짐작으로 대충 세어 봐도 얼추 100권은 넘는 양이었다.
그리고 공책 위에는 생일 편지가 올려져 있었다.
레토는 그걸 꺼내 클라레에게 줬다.
[생일 축하한다, 똥강아지.]
짧은 한 줄이 전부였건만, 클라레는 딱히 싫은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에휴.”
대신 나이에 안 어울리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편지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하여튼 이 오빠는 참 이상하다니까.”
평생 혼자 살아야 남한테 피해를 안 줄 사람이야.
할머니 같은 감상을 끝마친 클라레가 레토에게 말했다.
“근데 공책이 너무 많은데? 이거 나 혼자 다 못 써.”
“그러면, 사람들한테 나눠주는 건 어때?”
카리나가 제안했다.
“우리 어머니는 가문의 이름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돈을 기부하시거나, 물건을 주기도 하거든.”
“오, 좋은 생각인데?”
클라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공책을 학교나 유치원에 기부할까요?”
레토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그러면 그곳에 다니는 아이들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공책을 받아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샤프 영지가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개개인을 살펴보면 빈부격차가 분명 존재했다.
아이들 교육은 아드벨로 가문이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무료로 해 준다지만, 공책 같은 소모품이 부담인 가정도 있을 것이다.
‘설마….’
그걸 염두에 두고 공책을 보낸 건가?
레토는 공책이 든 상자를 집 안으로 옮겼다. 클라레와 카리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빠 오리랑 새끼 오리들 같네.”
거실에서 글로리아와 함께 체스를 두던 아이트라가 그 모습을 보고는 귀엽다며 싱긋 웃었다.
“클라레.”
때마침 노아가 불렀다.
“생일파티 때 뭐 입을래?”
“어! 그거 중요한 거야!”
후다닥 제 방으로 간 클라레가 오늘을 위해 골라 둔 옷들을 꺼내 보였다.
“이 보라색 원피스는 상견례 때 입었는데 꽤 마음에 들었어. 하얀색 반팔은 이 파란 바지랑 같이 입으면 멋지다고 아스가….”
클라레는 저 나름의 생각을 열심히 노아에게 들려줬다.
“음, 그러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클라레가 옷 하나를 들었다.
“이거!”
“…….”
“어때? 근사하지?”
클라레의 선택을 받은 건, 강렬한 표범 무늬 원피스였다.
“…어?”
노아가 보고도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물었다. 도대체 저 옷은 어디서 난 것이란 말인가.
식은땀을 몰래 흘리던 노아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치만, 그거 입으면 나중에 놀 때 속옷이 비치지 않을까?”
“난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아. 속옷은 그저 속옷일 뿐!”
“아니, 좀 연연해라….”
“할머니가 그랬는데, 애초에 나 같은 어린애 속옷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래.”
“…….”
틀린 말은 또 아닌지라, 노아는 반박 한 마디 못하고 표범 원피스를 입혀 줬다.
“머리 예쁘게 묶어 주라, 응?”
그리고 솜씨를 발휘해 머리를 묶어 줬다. 동그랗게 올려 묶은 머리에다가 반짝이는 티아라 모양의 머리 장식을 꽂아 줬다.
“와아!”
거울을 본 클라레가 환호했다.
“언니가 주는 생일선물이야.”
“엄청 예쁘다! 꼭 공주님 같아!”
“클라레는 항상 나의 공주님이야.”
노아가 클라레의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간지러운 칭찬에 부끄러워진 클라레가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내가 공주님이면, 언니는 뭐야?”
“글쎄? 뭐 할까?”
“왕자님 해라! 언니는 엄청 멋있으니까!”
방에서 나온 클라레는 제 모습을 어른들에게 자랑했다.
“…와우.”
“오우….”
하룻밤 묵은 대가로 색종이 고리 장식을 만들던 아미와 셀린이 넌지시 감탄했다.
“야, 너….”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던 아미를 대신해, 셀린이 먼저 칭찬을 건넸다.
“이런 표범 무늬는 함부로 소화하기 힘든데, 클라레 너랑 잘 어울린다. 감각이 뛰어나구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칭찬인 건 분명했기에 클라레가 빵긋 웃었다.
아이트라는 꼭 새끼 표범처럼 귀엽다고 칭찬했고, 아스는 꼭 옷을 사러 가자고 약속했다.
반드시 사러 가자고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어허.”
커피를 진하게 우려 마시던 비스도 새끼 표범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귀여운 표범을 봤나. 나도 모르게 사냥할 뻔했네.”
“사냥하면 안 돼! 동물은 보호해야지.”
“우리 강아지는 마음씨도 곱지.”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아 행복해진 아이는 공원에서 놀다 오겠다고 말했다. 카리나도 같이 따라갔다.
아이들이 잠깐 나간 사이, 어른들은 클라레의 생일파티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색종이 고리를 이어 붙인 기다란 장식을 완성하고, 파티 때 먹을 음식도 마무리했다.
그리고 클라레 몰래 사 둔 생일선물들을 1층에서 가장 가까운 레토의 방에다 숨겨 뒀다.
“와, 애 팔자가 상팔자구만.”
아미가 한가득 쌓인 클라레의 선물을 보며 투덜거렸다.
“좋겠다. 난 이렇게 받아 본 적도 없는데.”
“대신 욕을 저것보다 많이 받아 봤잖아.”
그러니 질투하지 말라며, 레토가 진심을 담아 위로했다.
“…….”
아미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시선으로 레토를 노려봤다. 짜증과 한심함이 적절한 비율로 뒤섞인 감정이었다.
“작은 주인님, 파티는 거실에서 할까요?”
“발코니는 어때? 오늘은 바람도 적당하니 괜찮은 거 같은데.”
요 며칠간 흐렸던 날씨가 무색할 만치, 오늘 하늘은 쾌청하니 딱 좋았다.
노아와 레토가 밖으로 나가 발코니 차양을 내리던 중.
“언니!”
공원에서 놀던 클라레가 나타났다. 그 뒤로는 생일파티에 초대받은 비밀조직 대원들도 함께였다.
“엄마랑 아빠도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노아가 달려오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
“…복귀까지 몇 시간 남았어?”
“12시가 조금 안 되었으니….”
손목시계를 힐끔거린 레토가 빠르게 계산했다.
“15시간.”
본부 복귀까지, 앞으로 15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
클라레의 생일파티는 차양을 쳐 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워진 발코니에서 진행되었다.
커다란 테이블을 옮긴 뒤, 색종이 고리 장식을 벽에 걸었다.
파티가 딱 준비될 즈음에 제니우스와 아메타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두 사람은 클라레가 입은 옷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지만, 뒤에서 필사적으로 손짓하는 노아를 발견하곤 싱긋 웃었다.
“생일 축하한다, 우리 딸! 아주 예쁜 표범 옷을 입었네?”
“그러게 말이야. 야생미가 넘쳐서 한순간 진짜 표범인 줄 알았잖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클라레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며 투덜거렸다.
“엄마랑 아빠 없이 내 생일을 축하할 뻔했잖아!”
하지만 이내 헤벌쭉 웃으며 어서 오라고 둘을 꼭 끌어안았다.
“주인공은 여기 앉을까?”
노아는 클라레를 가장 상석에 앉혔다. 고깔모자 대신 쓴 티아라가 그늘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아이들이 테이블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즐겁게 떠드는 사이.
“자, 케이크 들어가요!”
아스가 커다란 2단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케이크를 보자마자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케이크는 아스가 올해 만든 것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회심의 역작이었다.
“와아! 2단 케이크다!”
“이렇게 큰 케이크는 처음 봤어!”
“아스 언니, 무슨 맛이에요?”
“여기에 클라레 얼굴 있어. 예쁘다.”
“초는 몇 개 꽂아요? 눈에 꽂아도 돼요?”
“내 눈에 꽂지 마!”
새하얀 케이크 위에는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귀여운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아스가 아이싱 크림으로 하나하나 그린 것이었다.
“이건….”
그림을 본 클라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건, 박물관에 있어야 할 명작이야…!”
“아가씨도 참.”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아스가 부끄러워했다.
곧 케이크 위에 초가 꽂혔다. 조그마한 촛불 7개가 켜지자 아미가 박수로 생일 노래를 유도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클라레!
“생일 축하합니다아아!”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클라레가 두 눈 감아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늘 마음속에 지녔던 소박한 소원을 빌었다.
“온 세상이 내 발밑에 무릎 꿇게 해 주세요! 온 세상이 내 발밑에 무릎 꿇게 해 주세요! 내가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게 해 주세요!”
소원을 빈 아이는 힘껏 숨을 뿜으며 촛불을 껐다.
거센 입김 앞에서 촛불은 한 번에 꺼졌다. 매캐한 냄새와 희뿌연 연기가 하늘 위로 슬렁슬렁 올라갔다.
“와아!”
“클라레 축하해!”
“생일 축하해!”
아이들은 박수로 클라레의 생일을 한 번 더 축하했고.
“…….”
“…….”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우람한 포부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근데….”
레토가 노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처제가 아드벨로의 차기 가주가 될 예정이잖아. 그러면 저 소원이 딱히 문제는 아니지 않아?”
아드벨로가 세상의 정점이긴 하잖아.
다시 생각해 보니 나름 현실적인 소원이라며 레토가 말했다.
“…….”
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작전 임무도 클라레를 키우는 것보단 쉬울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