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영문 모를 말이었지만, 풀루스 대위의 표정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레토는 그가 지금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이해가 안 가?”
“…….”
“말이 없으면 내 멋대로 이야기한다? 그래도 되지?”
재미가 꽤 붙었는지, 레토의 입가에 어느샌가 능글맞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건 꽤 잘 먹혔다.
“…겁니까?”
풀루스 대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자랑이라도 하는 겁니까?”
자신이 모욕당하고 놀림당했다고 생각했는지, 풀루스 대위의 말투는 상당히 뾰족하고 거칠었다.
“그렇게 들렸어? 우리 대위가 속이 좁네.”
레토는 싱글벙글 웃으며 받아쳤다.
“어쩐지 남다른 친근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그대도 대위였군.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인도 같은 직급이거든.”
그래서 대위라고 부르면 애틋하다며 레토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거 진짜 미친놈이었네.”
미친 건 약도 없는데.
안에선 바깥 소리 안 들린다고, 아미는 지독한 감상을 내뱉으며 혀를 쯧쯧 찼다.
마찬가지로 풀루스 대위 역시 레토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바라봤다.
“…어쨌건 반응을 끄집어냈군.”
지켜보던 아드벨로 대장이 씩 웃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이지 않겠습니까?”
베네딕토 군종실장의 말에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다시 유리창 너머를 주시했다.
때마침 레토도 말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대위.”
한결 친근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한 말은 말 그대로야.”
놀리려는 의도도, 상대를 비웃으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 난 양자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풀루스 대위가 물었다. 아까보다 훨씬 공격적인 어투였다.
“같은 고아끼리 공감대라도 형성해 보자는 겁니까? 그도 아니면 나를 동정하는 겁니까? 너도 좋은 양부모를 만났다면 지금 이 꼴이 되지….”
“내 생부가 디모네 닉스야.”
날카롭게 말을 쏟아붓던 남자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채 다물지 못한 입이 어정쩡하게 벌어진 채, 그는 충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조차 감추지 못했다.
처음으로 온전히 드러내는 감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레토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왜? 거짓말 같아?”
풀루스 대위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안 그러면 거짓말 같다고 대답할 뻔했다. 눈앞에 있는 젊은 중장은 디모네 닉스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풀루스 대위가 충격으로 말을 잃은 사이.
“…….”
레토는 유리창 뒤를 슬쩍 눈짓했다.
유리창 너머로 경악하는 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안에서 바깥 상황을 알지 못하지만, 밖에서는 전부 들을 수 있으니까.
‘정말 신기하군.’
여기서 가장 놀란 사람은 단연코 레토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디모네 닉스는 절대 거론되어선 안 될 단어였다.
이성을 상실케 하고, 과거의 어둠 속에 빨려들게 하는 잔혹한 심연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 입으로 그 이름을 직접 말하고 있다.
여전히 도려내고 싶은 과거란 점은 변함없지만, 전처럼 흥분하지 않고 침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온 거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남자는 제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감히 제 소중한 삶을 좌지우지 할 능력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 남자의 사생아야. 내 어머니는….”
그러나 죽은 엄마를 떠올리는 여전히 힘들었다.
잠깐 숨을 고르며 뜸을 들인 뒤, 레토가 말했다.
“…피해자지. 피해자.”
레토는 자신의 친모가 겪은 부당한 폭력을 점잖은 목소리로 차근히 들려줬다.
“우리 모자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 명성이 추락한 뒤부터, 그 쓰레기는 내 친모를 때리고 학대했어.”
“…….”
“그리고 내 친모는 나라도 살리기 위해, 굳게 닫혔던 문을 맨손으로 뜯어 구멍을 만들었고….”
목을 매 자살했지.
“도망친 뒤엔 거리를 계속 전전했어. 배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지다 얻어맞기도 했지. 그러다가 마지막엔 굶주림을 못 참고 흙까지 먹었고.”
실없이 웃는 레토는 딱히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지, 하고 덤덤하게 말할 뿐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레토는 눈앞의 남자를 한 번 더 제대로 살폈다.
“…내가 했던 말, 이제는 이해가 가나?”
“방금 그건 너의 미래일 수도 있었어.”
“지금의 네가 나의 미래일 수도 있었고.”
들은 이야기가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풀루스 대위는 레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휙 피했다.
풀루스 대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당혹스러움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은 꽤 안쓰럽기까지 했다.
“대위.”
레토가 말했다.
“우리는 어쩌면 반대가 되었을지도 몰라.”
만약 죽은 친모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어린 레토가 디모네 닉스에게 붙잡혀 세뇌로 제 삶을 빼앗겼을 테고.
반대로 풀루스 대위는 운 좋게 괜찮은 양부모님을 만나 멀쩡한 어른이 되어, 어쩌면 역으로 범죄자가 된 레토를 취조했을지도 모른다.
“…….”
흔들리는 풀루스 대위의 눈을 본 레토는 무거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어울리지 않는 괴리감이, 풀루스 대위를 더욱 혼란케 했다.
“그 남자가 널 아들처럼 아꼈다지?”
레토가 이 상황을 보란 듯이 두 손을 벌렸다. 디모네 닉스의 친아들로서, 진실을 보여 줬다.
“친아들은 학대당했고, 아들처럼 여긴 너는 이용당했어.”
디모네 닉스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소중한 괴물에게 주변의 모든 것은 그저 이용 가치를 따질 도구일 뿐이었다.
“난 널 내 아들처럼 생각한다.”
풀루스 대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저를 다독이고 응원하던 목소리가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심지어 또 다른 친아들이 죽어 가는 중에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어.”
“…….”
레토가 물었다.
“이래도, 그자의 아들이 되고 싶나?”
레토가 물었다.
고개를 떨군 풀루스 대위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레토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릎 위에 모아 쥔 손끝이 새하얗게 질린 것, 실내화에 빼꼼히 나온 발가락이 굽은 채로 떨리는 것은 한눈에 들어왔다.
“…….”
“…말이 많았군.”
레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자네에게 도움을 주려는 거야.”
레토는 여전히 고개 숙인 저의 또 다른 미래에게 말했다.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 그 괴물 때문에 희생당한 과거를 위로하고 복수할 기회.”
내일까지 잘 생각해 보라며 뒤돌아서던 레토가 멈칫했다.
“혹여.”
문을 나서기 전.
레토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나는 다를 거란 생각하진 말고.”
정곡을 찔렀는지, 풀루스 대위가 멈칫했다.
“…그래, 뭐.”
특별 취급이라면 특별 취급이지.
레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도구보다 쓰기 편하고 길들이기 쉬운 도구였을 테니까.”
***
“중장님. 저 이런 거 별로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검은 건물 밖으로 나온 아미가 숨을 크게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저는 제 몸 하나 간수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미치겠는데, 중장님까지 챙기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엎드려뻗쳐.”
“이번에는 안 뻗칠 겁니다!”
보란 듯이 명령 불복종한 아미는 레토가 또 뭐라고 하기 전에 후다닥 아드벨로 대장의 등 뒤로 숨었다.
“중위….”
그런 아미를 지켜보는 베네딕토 군종실장의 시선은 참 복잡했다.
“…하지만, 좀, 놀라긴 했습니다.”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잘 견디어 내는 중이지 말입니다.”
“잘 견뎌내려고 노력 중이야.”
“그게 잘 견디는 것 아니겠습니까.”
레토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한데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사적인 영역이지 않습니까.”
“그대의 아들도 아는데, 뭐.”
“이런.”
곤란하단 표정을 짓던 군종실장이 끝내 피식거렸다.
“다 했으니, 넌 이제 집에 가.”
아드벨로 대장이 꺼지라는 듯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어어, 중장님! 집으로 가시는 겁니까?”
대장의 뒤에 숨어 있던 아미가 쑥 나와 물었다.
“그러면 저랑 셀린도 같이 태워주시면 안 됩니까? 내일 클라레 생일에 초대받았지 않습니까.”
“10분 준다. 그때까지 와.”
“영사까지 가는 데만 10분입니다!”
아미가 기다려달라고 당부하며 영사로 달려간 사이.
“…중장님.”
군종실장이 말했다.
“오늘 새벽에 들어온 첩보입니다. 최근 제국 해안 군 경비 태세가 심상찮다고 합니다. 병력이 집중되고 있다고 합니다.”
“썩 좋은 정보는 아니군.”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하필 작전을 며칠 앞둔 이 시점에서 그런 움직임이라니.
마치 이쪽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예측이라….’
디모네 닉스의 체포 소식이 알려진 뒤, 제국은 왕국에 간첩을 파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해안 군 경비를 강화했다.
‘정말 용의주도하군.’
레토는 치가 떨렸다.
현 제국의 움직임은 디모네 닉스가 예측한 수많은 상황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역겨울 정도로 치밀하고 준비성 넘치는 괴물이다.
그러니 마냥 자신의 승리만을 예측하지 않았을 거다.
모든 상황을 염두에 뒀을 테고, 그중에는 지금처럼 자신이 감옥에 갇힌 상황도 상정해 뒀을 것이다.
“어떡할 거냐?”
묵묵히 듣고 있던 아드벨로 대장이 물었다.
“계획, 지금이라도 바꿀래?”
이에 레토가 싱긋 웃었다.
본디 적의 빈틈을 기습하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했다.
***
클라레는 집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온 것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늦은 밤에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계속 어른들 곁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다 같이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모두 옆집에 살면서, 이렇게 모여서 재미나게 놀면 참 즐거울 텐데!”
아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
“…….”
정작 어른들은 썩 동의하지 못했다.
“야.”
제집 안방처럼 소파에 누운 아미가 이리 와 보라며 손짓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그러면 아미 언니는 늙었어?”
“응애! 응애! 나는 아기인데?”
손가락 쪽쪽 빠는 흉내를 내는 아미를 괴상하게 쳐다보던 클라레는 냉큼 뒤돌아 노아 곁으로 다가갔다.
“언니,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제 자야지.”
읏챠!
노아가 클라레를 번쩍 안았다.
“…세상에.”
그러곤 깜짝 놀란 듯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젠 안아 주는 것도 못 하겠다, 클라레. 너 진짜 많이 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