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다행히, 레토의 번식 능력은 어떤 치명상도 입지 않았다.
“근데 오싹하더라.”
샤프 역에 나온 레토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증언했다.
절 깨우러 방에 들어온 클라레에게 장난 한 번 치려고, 문 뒤에 숨어 있던 레토가 깜짝 놀라게 하자 클라레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레토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막았다.
“아직도 손이 얼얼해.”
레토가 킥킥거리며 제 손바닥을 슥 내밀었다.
급소를 완벽하게 노린 처제의 머리통에 실렸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개인함선이 출항할 때 방출되는 마력량과 비슷했다.
“만약에 그걸 안 막았더라면….”
가정을 떠올리던 레토가 몸을 잘게 떨었다.
천하의 해군 미친개도 번식 능력을 잃는 건 무서웠다.
“내가 분명히 그 필살기는 봉인하자고 했는데.”
노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쓰지 말라는 게 아니고?”
“자기 몸 지킬 호신술 정도는 익혀야지.”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레토는 기차 시간표를 슬쩍 바라봤다.
오늘 오전에 아이트라와 카리나가 기차를 타고 샤프 영지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마중을 위해 노아와 함께 역내 만남의 광장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레토는 오늘 아침 사건으로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처제한테도 무인의 피가 흐르더라.”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레토의 감상은 칭찬이었다.
“그거야 내 동생이니까.”
노아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
“형님!”
출구에서 나온 카리나가 레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옆에 함께 있던 아이트라도 마중 나온 아들 부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오셨습니까. 힘드시진 않았고요?”
“기차가 편하니까 힘들 게 뭐 있니. 근데 카리나가 얼마나 들떴는지 몰라.”
“어머니! 그, 그건 저희만의 비밀이라고….”
“그렇게 들떴어? 뭐 때문에?”
레토가 카리나를 번쩍 안아 들며 물었다.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카리나가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
“혀, 형님 본다고요! 그리고 친구들도 다시 봐서요.”
“나도 우리 동생 보게 돼서 기뻐. 잘 지냈고? 방학 숙제는 열심히 했어?”
“네! 이제 일기만 쓰면 돼요.”
“그러고 보니 내일 클라레 양의 생일이라면서요?”
“원래는 이틀 뒤가 생일인데, 저희가 당일….”
역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주차장에 둔 붉은 애마를 타고 벨로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짐은 아까 그게 다인가요?”
조수석에 탄 노아가 뒤에 앉은 아이트라에게 물었다.
“어차피 저택에 필요한 건 다 있고, 나머지 짐들은 며칠 뒤에 기차 화물로 올 거예요. 입을 옷만 몇 벌 사면 되는데….”
“그럼 저랑 오늘 같이 가실래요? 아스도 함께요.”
노아의 권유에 아이트라가 기꺼이 응했다.
“카리나도 같이 갈래?”
“저는 집에 있을래요.”
옷 사는 것에 아직 관심이 없는 카리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근데 형님도 같이 가시나요?”
“아니.”
카리나가 빵긋 웃었다.
“조금 있다가 해군에 잠시 가 봐야 해.”
하지만 금세 풀이 죽었다.
순식간에 바뀌는 표정에 어른들이 소리 죽여 웃었다.
“대신 일찍 올 테니까, 나중에 같이 놀자.”
“네!”
다시 씩씩해진 카리나의 다리가 붕붕 흔들거렸다.
“그런데 너 일하러 가?”
노아가 조금 전 레토가 했던 말을 의아해하며 물었다.
분명 어제부로 특함 대원들은 이동 제한이 걸려 출근조차 금지였다.
“일하러 가는 건 아니고….”
레토가 말했다.
“아침에 할머님이 잠깐만 나오라고 하셔서.”
“작전 때문에?”
“아니, 그, 왜….”
레토가 소리를 죽인 채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노아는 입술 모양을 따라 읽었다.
‘풀, 루스, 대….’
풀루스 대위.
해군 본부 내 검은 건물에 갇힌 남자.
“이야기 좀 한번 해 보라고 하시네.”
“아직도 말을 안 해?”
노아가 뒷좌석에 앉은 카리나를 조심하며 말했다.
다행히 아이는 아이트라와 이야기하느라 이쪽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일찌감치 이쪽 사정을 알고 있는 아이트라의 배려였다.
“그래서 오늘까진 입을 열어 줬으면 해.”
레토가 조금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않으면….”
***
“사형 확정이지.”
본부에 도착한 레토를 기꺼이 배웅 나온 아드벨로 대장이 말했다.
“지은 죄가 있는데, 피할 수 있겠어?”
그녀는 가져온 모자와 작업용 겉옷을 내밀며 물었다.
“사돈댁들은 무사히 도착했냐?”
옷을 걸치고 모자를 쓴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저희 집으로 모셔다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은 외식하기로 했는데, 일단 대장님과 비서실장님….”
“나는 못 가. 내 남편도 당연히.”
“요즘 너무 못 쉬시는 것 아닙니까?”
레토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비스가 발동된 뒤로, 아드벨로 대장과 비서실장은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어제도 자신들보다 늦게 들어와서는 오늘 아침에 해 뜨자마자 출근했다.
“마지막 작전이니 힘 좀 내지, 뭐.”
대수롭지 않게 말은 해도, 아드벨로 대장의 눈가에 검은 그림자가 제법 짙게 져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걱정하는 시선을 느낀 대장이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우리 가문의 특제 강장제를 적정량 마시고 있으니까. 오히려 몸 상태는 그냥 밥 먹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다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쨌건 입 열게 할 자신은 있냐?”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두 사람은 본관 건물 지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은밀한 비밀통로를 지나 검은 건물 아래로 진입했다.
“하지만, 한 번은 제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누구에게?”
아드벨로 대장이 물었다.
레토는 대답하는 대신에 소리 없이 웃었다.
도착한 곳에는 아미와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 중장님 오셨습니까?”
아미가 씩 웃으며 인사했다.
“…이젠 정체를 그냥 막 숨기지도 않는 건가?”
레토가 군종실장을 힐끔거리며 아미에게 물었다.
그 말에 아미와 군종실장이 눈을 마주쳤다.
“음, 군종실장님은 제 정체를 원래 알고 있습니다.”
아미의 말에 레토가 놀란 시선으로 군종실장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중장님.”
눈이 마주친 군종실장이 성호를 그으며 하늘에 계시는 위대한 어머님께 용서를 구했다.
“어머님의 견실한 따님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영광을 묵묵히 행하여야 했습니다.”
“군종실장님 방금 뒤치다꺼리라고 하셨습니까? 성녀한테 뒤치다꺼리라고 한 겁니까?”
통통.
아드벨로 대장이 벽을 주먹으로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잡담은 그만하고 집중.”
네 사람은 두꺼운 유리창으로 된 벽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엔 조그만 감금실이 있었다.
침대와 이불, 변기와 세면대가 전부인 감금실 안에는 풀루스 대위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는 유리창 너머를 힐끔거리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휴, 우리 보이는 줄.”
아미가 과장되게 놀라며 말했다.
“일단 저자의 건강 상태는 이제 거의 정상입니다.”
“거의?”
레토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귀에 걸리는 단어였다.
이에 아미가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미약한 후유증만 남아 있습니다. 간헐적으로 생기는 편두통 같은 건데, 아직 뇌에 잔류 물질이 남은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까지 회복시켰다는 거지? 성력이 정말 대단하긴 하군.”
“신성청 눈치 보느라 찔끔찔끔해서 시간만 더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면 끝이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군종실장의 물음에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토가 유리창 너머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 아미가 군종실장에게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런데 중장님은 왜 저 남자와 대화를 나누겠다는 겁니까?”
“나도 몰라. 대장님 지시라는 것밖에는.”
“혹시 저런 남자도 취향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중위?”
“그치만 신성청에선 가끔 X 같은 것들이….”
“아이고, 어머님!”
제 귀와 정신을 보호하시고!
군종실장이 서둘러 성호를 그었다.
그 난리통 속에서.
“풀루스 대위.”
감금실 안으로 들어간 레토는 침대에 걸터앉은 풀루스 대위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만나는 건 두 번째지?”
레토가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지낸 것 같군. 몸도 좋아 보이고.”
아미가 했던 말 때문인지 몰라도, 풀루스 대위는 수도 구치소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피부에 혈색이 돌고, 숨 쉬는 모습도 전보다 생동감 있었다.
“한데 아직도 협력할 생각은 없나 보지?”
“…….”
그러나 말수는 구치소에 있을 때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돌아오는 답이 없으니, 혼잣말한 꼴이 된 레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내 자랑 좀 들어 봐.”
그러고는 냅다 자기 하고픈 말을 떠들기 시작했다.
“진짜 미쳤나 봐….”
대놓고 자랑 들으라니.
유리창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미가 질색했다.
“알다시피 내가 오케아누스 가문의 양자인데….”
레토의 자랑은 바로 알버스와의 추억이었다.
“내게 오케아누스 장군님은 아버지나 마찬가지지. 아니, 아버지야.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그분과 함께한 추억은 셀 수 없었고, 레토는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주말에는 낚시나 승마 같은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주시고, 훌륭한 남자가 되는 법도 직접 알려 주셨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관생도 시절에 배운 운전이었다.
“미성년자라서 아직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되었는데, 이런 건 안 들키면 된다면서 방학 때 몰래 가르쳐주셨지.”
그랬다가 저택 정원수에 차를 들이박았고.
사고를 전해 들은 아이트라는 두 사람을 무척 크게 혼냈다.
“그렇게 혼난 건 처음이었는데, 나쁜 기분은 아니었어.”
왜냐하면 아이트라의 호통 속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건 혼나서 풀이 팍 죽어 있는데, 장군님이 이런 건 혼나는 것도 아니라면서 다음 날에 또 운전을 가르쳐주셨어.”
그 덕에 레토는 졸업 전에 운전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이런 자랑을 듣고도, 풀루스 대위는 별다른 내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하나.
“방금.”
그 미묘한 변화 하나를 잡아낸 레토가 씩 웃었다.
“손, 꽉 쥐었지?”
풀루스 대위가 다시 손에 힘을 풀었다.
그 미세한 변화가 얼마나 웃겼는지, 레토는 소리 내 웃을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정말 많이 나아지긴 했군.’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가 살아 있음을 생생히 느꼈다.
“내가 방금 한 자랑은 부러워하라고, 질투하라고 한 게 아니야.”
레토가 말했다.
“방금 그건 너의 미래일 수도 있었어.”
그리고 반대로.
“지금의 네가 나의 미래일 수도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