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연애하던 시절.
노아와 레토는 연인이라고 말하기도 참 애매모호했던 관계였다.
분명 서로 좋아서 함께 있는데, 누구 하나 먼저 ‘사랑’을 입에 담지 않았다.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자!”
하지만 모든 것을 끝내겠단 각오로 노아가 폭발한 뒤에야.
둘은 겨우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상대가 너무 예뻐서, 또 어떤 날은 얄미움에 비꼬듯이.
좋은 꿈을 꾸길 바라서.
선물을 준 게 고마워서.
그냥.
그냥 너무 사랑해서.
어색하고 쑥스럽던 사랑 고백은 조금씩 입에 붙어 습관이 되었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심은 나날이 커지고 무거워졌다.
그리고 오늘 레토의 입에서 나온 ‘사랑’은 어느 때보다 노아의 가슴을 절실하게 울렸다.
“작전의 효율? 그딴 거 아무 상관 없어.”
레토는 팔을 뻗어 노아를 끌어안았다.
“그냥 너를 사랑해서 걱정하는 거야.”
담요를 덮은 채로 품에 안긴 노아는 그의 가슴에 제 코를 박은 순간,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저를 두근거리게 하고 안심시켜 주는, 비누 냄새가 살짝 섞인 체향에 노아는 끝내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흐윽.”
레토는 울먹이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노아의 등을 살살 도닥거렸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노아 넌 너무 참는 버릇이 있어.”
커다란 손이 흐느끼는 노아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어린데.”
새삼, 레토는 지금 눈앞에 있는 노아가 14살의 어린 소녀로 보였다.
부모의 죽음을 뒤로하고 갓난아기인 동생과 필사적으로 아들라보르로 도망쳐 온 그 시절의 아이.
애틋하고 경건한 저의 마음을 담아, 레토는 노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잘 견뎠어.”
정말 장해.
진심을 담은 그 한마디가 노아의 마지막 보루를 무너트렸다.
“…으아아앙!”
노아는 그 시절에 차마 토해 내지 못했던 서글픈 울분을 쏟아냈다. 마치 제 어린 동생이 서러울 때 목 놓아 울던 모습과 똑같았다.
그렇게 노아는 오랫동안 삼켰던 것을 토해 냈다.
“아버지! 어머니!”
왜 죽었어요.
그냥 같이 도망치지.
우리 네 식구, 이 타국에서 함께 살아가지.
왜 우릴 두고 죽었어요.
“목숨 걸고 지킨 클라레는, 이제, 당신들이 누구인지도….”
흐느끼는 노아의 어깨가 하염없이 흔들거렸다.
“외로웠다고! 너무 힘들었다고요!”
모든 걸 홀로 기억하는 생존자는 그렇게 하염없이 울었다.
세상이 떠나가라.
저의 즐거웠던 추억이 제발 멀리 날아가라.
“흐어어엉! 으아앙!”
하지만 사흘 뒤, 제국으로 잠입해 7년 전의 잔상을 확인하러 가야 하는 잔혹한 현실은 그대로였고.
혼자 남아 버린 과거 역시, 여전히 노아의 곁에 있었다.
“…….”
그리고 그런 그녀를 끌어안으며 묵묵히 사랑을 퍼주는 남자도 곁에 있었다.
***
늦게 돌아온 언니와 형부를 마중하러 나온 클라레가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어, 언니…!”
“…….”
뒤따라 나온 아스가 황급히 클라레의 턱을 닫아 줬지만, 정작 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노아의 눈이 생선 입술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싸운 거 아냐.”
클라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노아가 코를 훌쩍이며 방으로 올라갔다.
“제가 울린 거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괜히 불똥이 튈라, 레토는 냉큼 저의 무고를 주장했다.
하지만 어린 처제와 처형의 살벌한 의심은 쉬이 떨칠 수 없었다.
“형부가 또 언니를 울렸어!”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나쁜 놈! 내가 전에 봐줬더니 또 기어오르네!”
클라레가 씩씩거리며 잠옷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스, 오늘은 나 말리지 마! 내가 오늘 저 아저씨랑 끝장을 보겠어!”
“네! 말리지 않을게요!”
“…….”
레토를 향해 덤벼들려던 클라레가 뒤를 힐끔 돌아봤다.
아스는 두 주먹 불끈 쥐어 보이며 승리를 응원했다.
그 모습에 클라레가 입술을 뾰루퉁 내밀었다.
그러고는 제 잠옷 자락을 슬쩍 내밀었다.
“…잡아 줘.”
아스가 그걸 잡자, 클라레는 다시 용맹한 전사가 되었다.
“아스가 말려서 봐주는 줄 알아요! 이씨, 내 필살기에 한번 혼나 볼래요?”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제가 안 울렸어요.”
“그걸 어떻게 믿어! 결혼하기 전에도 언니랑 싸워서 울렸잖아요! 나쁜 남자가 매력 있다지만, 이건 아니지!”
“그럼 한 대 패죠?”
아스가 쥐고 있던 잠옷을 슬쩍 놓으며 말했다.
“어….”
하지만 클라레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형부는 진짜 강해서, 내가 덤벼도 안 될 거 같아.”
범상찮은 고수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클라레가 레토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요즘 더 강해진 거 같고.”
그 말에 레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라레의 말대로, 그 역시 최근 자신이 부쩍 강해졌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이건 단순히 경험과 노력이 쌓여 생긴 변화가 아니었다.
‘노아의 오러를 접한 뒤부터였지.’
눈에 띄게 몸이 가벼워지고, 근력이 많이 는 것이 아닌데도 완력이 강해졌다.
그리고 마력의 활용 역시 전보다 능숙해졌다.
‘그런데 처제가 그걸 알아챘다니.’
새삼 피에타 가문의 핏줄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레토와 눈이 마주친 클라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헉, 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공격성을 내비쳤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 레토가 커다란 손으로 클라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대단하네요, 우리 처제는.”
“잉? 뭔 소리여?”
“보는 눈이 있다고요. 역시 감각이 남다릅니다.”
“뭐, 내가 좀 그런 감각이 있지.”
칭찬받아 들뜬 클라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왜 언니랑 싸웠어요?”
“아니, 제가 안 울렸다니까요. 싸우지도 않았고….”
억울해진 레토는 다시 저의 무고를 주장해야 했다.
***
그리고 그날 밤.
“…조금, 창피해.”
저녁에 있었던 일 때문에 쉬이 잠들지 못한 노아가 이불을 얼굴까지 휙 올린 채 중얼거렸다.
“그게 뭐 창피한 일이람.”
레토는 이불을 휙 내리며 말했다. 아까보단 부기가 가라앉은 노아가 샐쭉거리며 레토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불을 다시 올리진 않았다.
“내가 네 눈물 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서 창피하다기보단….”
“내 품에선 자주 울잖아. 더 창피한 모습으로도….”
“…….”
“악! 아야!”
능글맞은 입을 함부로 나불거린 죄로 옆구리를 꼬집힌 레토가 미안하다고 서둘러 사과했다.
“그냥 좀.”
노아가 다시 하던 말을 이어 갔다.
“남한테 내 속내를 드러내는 게 처음이라서 그래.”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쓸어내리던 레토가 멈칫했다.
눈이 마주친 노아가 부끄럽단 듯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레토의 품에 얼굴을 숨겼다.
가슴에 생생히 닿는 움직임이 간지러웠지만, 작은 동물이 기대는 것처럼 마냥 귀여워 꾹 참기로 했다.
“그래서 좀 부끄러워.”
“하긴.”
레토는 노아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넌 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니까.”
“자각은 하고 있어. 내 단점이지.”
“단점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만큼 신중하단 소리잖아.”
“레토 넌 항상 날 좋게 보더라.”
“사랑하니까 어떤 모습도 좋지.”
그 말에 노아가 고개를 슬쩍 들어 레토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레토가 웃음을 얕게 터트렸다.
“이것 봐.”
그는 눈가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췄다. 괜히 부끄러워진 노아가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얼마나 사랑스러워.”
“…남 말하고 있네.”
누가 할 소리를.
노아는 말없이 레토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며 몸을 조금 더 움츠렸다.
“그만 자자. 내일은 클라레 생일파티 준비해야지.”
“그러자.”
“따뜻하고 좋네….”
“그러게.”
레토도 어느샌가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의식이 완전히 가라앉기 직전, ‘고마워. 사랑해.’라고 속삭이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든 레토의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이불 속 두 체온이 서로를 포근하게 덥혔다.
***
“세상에, 얼굴 봐….”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아스가 도와주겠다며 옆에 선 노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함했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눈이 완전히 죽은 생선처럼 부었어요.”
“이왕이면 다른 비유로 해 주면 안 되겠냐….”
“어쨌거나 괜찮은 거예요?”
아스는 다 구운 팬케이크를 접시에 옮기며 물었다.
“…울고 나니 좀 괜찮은 거 같아.”
노아는 아스가 미리 꺼내 놓은 양상추를 먹기 좋게 자르며 대답했다.
“가끔은 우는 게 약이 될 때도 있죠.”
아스가 또 다른 팬케이크를 구우며 말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요즘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였거든요.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티가 났어?”
“그럼 안 났을까요?”
아스가 가소롭단 듯이 말했다.
“저희가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요. 자그마치 7년이라고요.”
“…….”
“게다가 봐요. 클라레 아가씨도 한동안 어리광이 심했잖아요.”
“아….”
그 말에 노아가 근래 보았던 클라레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쩐지 같이 자자고 고집을 부리고, 출근하는데 가지 말라고 보채더라니.
“…….”
머쓱해진 노아가 반성하겠다며 중얼거렸다.
“걱정을 많이 끼쳤네.”
“가족이니까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죠.”
팬케이크 요리를 마친 아스가 후라이팬을 치우며 말했다.
옆에 있는 커다란 접시 위에 쌓인 팬케이크가 못해도 스무 장은 넘었다.
“그러니 오늘부터 기운 내서, 내일 있을 아가씨의 생일파티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자고요.”
“응.”
싱긋 웃는 아스를 따라, 노아도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작은 부군은요?”
“아직 자….”
자고 있다고 말하려던 찰나.
“언니이이이!”
계단을 기운차게 우다다다 내려온 클라레가 노아에게 고자질했다.
“형부 깨우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형부가 문 뒤에서 나 놀래켰어! 혼내 줘!”
“아이고, 놀랐어?”
노아가 클라레의 머리에 입술을 쪽 맞추며 안아 줬다.
언니의 뽀뽀에 기분이 좋아진 클라레가 재잘거렸다.
“헤헤, 쪼오끔 놀랐다? 그래서 내가 바로 머리를 빡!”
클라레는 자신의 필살기인 모자를 시연했다.
모두 고자로 만든다는 필살기 ‘모자’.
“…….”
“…….”
두 언니는 할 말을 잃었다.
노아는 클라레의 유독 헝클어진 앞머리 부근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