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나 믿고 따라와 볼래?”
쓸데없이 믿음직스럽던 모습에 홀려 따라간 곳은 락소가 운영하던 술집 ‘아콘’이었다.
“어머, 오빠 왔어? 지금 사장님은 수도에….”
“알고 있습니다. 아, 여기 제 아내입니다.”
“신부님! 결혼식 때 한 번 만났었는데!”
당연히 락소는 지금 수도에서 국왕을 돕는 중이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 대신에 수염 덥수룩하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환영했다.
노아는 결혼식 때 저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냥 방긋 웃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둘이 데이트?”
“데이트는 맞는데, 도시락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콘에서 술 한잔 기울이며 식사할 줄 알았는데, 레토는 너무도 당당하게 도시락을 주문했다.
도시락을 받은 뒤에, 레토는 다시 차를 몰아 해군 본부로 향했다.
그러고는 특함 사령부실 내 탕비실에 있는 돗자리와 담요, 잔 두 개를 챙겨서는 수영 훈련장이 설치된 해변으로 다시 움직였다.
‘하필 여기라니….’
노아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레토가 고른 데이트 장소는, 결혼 전에 노아가 자신의 비밀과 부모님의 죽음을 은밀히 고백했던 곶이었다.
노아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레토를 노려봤다.
이건 어떻게 봐도 고의가 분명했다.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담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천국 아니겠어?”
정작 당사자는 능청을 떨며 돗자리에 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레토는 제 옆을 툭툭 두드리며 노아에게 어서 앉으라고 재촉했다.
“…….”
노아는 역시 결혼할 당시에 제 판단력에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도 제 남편이 참 잘생겼단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레토가 담요를 펼쳐 노아의 어깨에 둘렀다.
“해 지고 바람 부니 제법 춥다, 그치?”
“그러게.”
“사흘 뒤가 조금 걱정이네. 그때는 파도가 잠잠해야 할 텐데.”
“그러게.”
심드렁한 대답과 달리, 노아의 시선은 어느새 바다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 노아는 바다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해군에게 바다는 근무지이자 끔찍한 훈련지일 뿐이었다. 더 나아가선 수많은 전우가 가라앉은 무덤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국을 떠날 적에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이 바다였다.
어린 노아의 눈에는 멀어질수록 점점 작아지는 고향을 바다가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바다는 항상 힘들고, 슬프고, 괴로운 것이었다.
“아까 집에 전화해 뒀어.”
레토가 바구니에서 꺼낸 포도주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
“저녁 먹고 들어가겠다고 하니까, 배가 불렀대.”
“클라레가 받았나 보네?”
안 봐도 뻔하지.
노아는 그만 피식거렸다.
어린 동생이 자기만 두고 놀러 가는 줄 아는 언니와 형부에게 씩씩거리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레토도 마찬가지였는지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은 일단 음식부터 먹었다.
부드러운 크림 리조또를 한입 크기로 뭉쳐 튀긴 아란치니, 그릴에 구운 빵과 잘 저민 소고기와 풍성한 채소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 잘 씻은 제철 과일까지.
술집에서 즉석에서 만든 도시락치고는 상당한 정성이었다.
“단골이니까 이렇게 해 주는 거야.”
아란치니 하나를 노아의 입에 넣어 주며 레토가 말했다.
얌전히 받아먹은 노아는 몇 번 우물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을 본 레토가 눈웃음을 지었다.
“맛있지?”
“응.”
“이거, 아까 그 형님이 만든 거야.”
“어지간한 요리사보다 훨씬 나은데?”
“그 형님이 해군 조리병 출신이야.”
“근데 왜 너보고 오빠라고 불러?”
“장사 수완이랬는데, 뭐였더라….”
반전 매력?
단어를 떠올린 레토가 마저 설명했다.
“거친 외모로 귀엽게 말하면 손님들이 좋아한대.”
“…….”
“왜, 그런 거 있잖아, 나쁜 놈이 갑자기 착한 일을 하면 다시 보이게 되고 두근거리는 거.”
“나쁜 놈이 갑자기 착한 일을 하면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부터 해야지.”
“그게 군인의 정석이긴 하지.”
할 말이 없어진 레토는 포도주를 한 모금 넘겼다.
“레토.”
그렇게 먹고 마시기만 하던 중.
“레토 오케아누스.”
노아가 잔잔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찌나 작은 목소리인지, 발밑에서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을 뻔했다.
“응.”
하지만 레토는 노아의 목소리에 바로 응답했다.
“너, 일부러 여기에 데려온 거야?”
노아가 물음에 레토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긍정의 뜻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기에, 노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레토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노아의 등에 덮인 담요를 고쳐 줬다.
“…있잖아.”
노아가 말했다.
“네가 날 여기에 데려온 이유, 알 것 같아.”
“뭐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인정하는 걸 원하는 거 아냐? 과거의 나는 외롭다느니 뭐니.”
“정말 그렇게 생각해?”
레토가 물었다.
눈이 마주친 노아는 잠깐도 못 버티고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러고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모아 올린 무릎에 파묻었다.
“…어쩌라는 거야.”
무릎에 가둬진 목소리는 울음처럼 무거웠다.
“내 속이 뒤숭숭한 건 당연하잖아. 이번 작전이 끝나면 많은 게 달라질 건데!”
“…….”
“대원들에게 내 정체가 드러날 거고, 나는 부모님의 유해를 품게 될 거야. 그리고 내 가족을 이 꼴로 만든 새끼들도 보게 될 거고!”
기어코 마지막에 나온 울분은 날카롭게 올라갔다.
“근데 왜 계속…!”
결국 폭발해 버린 노아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외롭다고 인정하면 뭐가 달라져?”
푸른 눈동자는 저무는 노을에 반사되는 파도처럼 반짝거렸다.
마치 우는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은 보는 사람마저 슬펐다.
하지만 정말 고집스럽게도, 노아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나도 알아! 안다고!”
그러나 노아는 레토에게 제 모든 감정을 내비치고 말았다.
“난 계속 외로웠고, 앞으로도 외로울 거야!”
그리고 이 외로움은 누구도 지워 주지 못할 것이다.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남자조차도.
“이제, 이젠….”
제국에서 부모님의 시신을 찾아내고, 이곳 아들라보르에서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면 피에타 가문은 완벽하게 끝을 맺게 된다.
“정말로, 나밖에 없잖아….”
피에타 가문의 종식은 결정된 일이다.
하지만 피에타 가문의 후계자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아름다웠던 저택.
친절했던 사용인들.
저에게 한없이 무르던 어머니, 엄격해도 상냥했던 아버지.
철부지였던 어리광쟁이 소녀에겐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일상이고 평범하고 즐거운 나날이었건만.
이젠 어디에도 없다.
“클라레는 아무것도 몰라. 내 유일한 혈육이지만, 내 추억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이지만, 아무것도 모른다고…!”
노아가 클라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건, 단순히 제 유일한 혈육이란 점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저 혼자 기억하는 그립고 애틋한 추억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동생의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예요?”
“클라리우스. 여자아이라면 클라리시아라고 할 거란다.”
“그러면 줄여서 클라레라고 불러야겠네?”
“에이, 어머니도 참. 클라레는 여자 이름이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예쁜 이름이니까 예쁜 남동생이 될지도 모르잖니.”
“피, 저는 여동생이 좋아요! 제가 머리도 묶어 주고, 인형놀이도 같이 해 줄 것이에요.”
“그렇다면 아주 멋지고 근사한 언니가 되겠구나.”
멋진 언니가 되겠다는 철부지 소녀의 각오.
그런 딸의 머리를 쓸어 주는 어머니의 인자함.
대견하다며 칭찬하는 아버지의 웃음소리.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노아뿐이었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노아가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괴로운데, 그걸 어떻게든 참고 견디려는 내 노력을 왜 계속 방해하는 건데.
“…어떻게 내버려 둬.”
레토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온몸으로 외로워하는데.”
마치 저의 일인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음성이 노아의 머리를 크게 때렸다.
서둘러 고개를 들어 보니, 절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레토가 보였다.
“나도 알아.”
레토는 괴로운 기억을 상기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엄마도 날 살리기 위해 죽었으니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
노아는 비로소 레토가 했던 말을 이해했다.
“아, 나는…!”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노아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려 했지만, 레토가 먼저 그 말을 손짓으로 막았다.
“잠깐.”
싱긋 웃으며 양해를 구한 레토가 하던 말을 이어 했다.
“나는 네가 느끼는 괴로움이 뭔지 알아.”
레토는 노아의 얼굴을 여전히 가리고 있던 손을 잡아 내렸다.
“그건 죄책감이야.”
노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레토는 더욱 손에 힘을 실으며 꽉 잡았다.
“내가 약해서 부모님이 죽은 거야.”
레토의 말은 노아의 가슴에 박힌 낡은 비수를 건드렸다.
그녀가 줄곧 속에 감춰 뒀던 자학의 흉터였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함께 싸워서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부모님은 날 지키려다가 죽었어.
나 대신 죽은 거야.
날 살리려고.
“내가 나약해서.”
하지만 저 말은 노아만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가차 없이 쏟아지던 자책은 레토의 마음속에도 박혀 있던 오래된 상흔이고 비수였다.
“근데 아니더라.”
레토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노아는 저도 모르게 몸에서 힘이 빠졌다.
긴장했던 손에도 힘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레토와 깍지를 끼게 되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 속에서도, 노아를 향한 그의 붉은 눈동자는 마냥 따뜻하고 포근했다.
“노아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네 잘못이 아니니까.”
“우리가 가진 그 괴로움은 죽은 분들 덕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리운 추억을 홀로 지니게 되었단 외로움 때문이지.”
하지만 그 감정에 먹혀선 안 되었다.
그건 스스로를 망가트리고, 발목을 붙잡아 진창으로 떨어트리는 무서운 학대였다.
그리고 레토는 노아가 저와 똑같이 고통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내가 왜 널 가만히 두지 못하냐고 물었지?”
레토가 말했다.
“사랑하니까, 그런 거지.”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는데, 어떤 남자가 가만히 있을까.
“네가 날 걱정하는 이유와 하등 다를 게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