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183화 (183/245)

183.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노아는 헛웃음을 피식 흘리며 레토에게 물었다.

레토는 별 뜻 없단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제국에서도 노아 벨로라고 불리진 않았을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만.”

“전에 군사 박물관에 있던 피에타 가문의 자료엔 행방불명된 두 딸의 이름은 안 적혀 있더라고.”

“할머니가 손을 써 준 거야.”

그리고 그걸 부탁한 건 노아였다.

“이제 여기서 살 건데, 거기서 썼던 이름이 뭐 중요하겠어.”

“…….”

레토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내 질문에 대한 은근한 거부인가?’

그곳에서 썼던 이름을 고집스럽게 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노아가 저렇게까지 반응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제국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네.

괜히 무안해진 레토가 살짝 물기가 맺힌 뒷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 때였다.

“…노빌리아.”

노아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빌리아 피에타.”

오랜만에 불러 본 이름은 낯선 이물질처럼 어정쩡하게 뱉어졌다.

“그게 내가 제국에서 썼던 이름이야.”

“어쩐지 엄청 귀족 같은 이름이네.”

“귀족이었으니까.”

“그러면 노아는….”

“노빌리아의 애칭이야. 어릴 적엔 노아라고 더 많이 불렸어.”

“음….”

노빌리아, 노빌리아.

“노빌리아 피에타….”

레토는 노아의 또 다른 이름을 몇 번이나 반복해 소리 내 불러봤다.

어린아이가 새로 배운 단어를 웅얼웅얼 발음하듯이, 느리지만 또박또박하게.

“예쁜 이름이야.”

레토가 싱긋 웃었다.

“무슨 뜻이라도 있어?”

“명예로움, 빛, 고결.”

이름의 의미를 듣자마자, 레토는 노아의 올곧고 바른 삶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았다.

그리고 피에타 백작 부부가 그들의 딸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도.

“너랑 어울리네.”

레토의 말에 노아는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제는? 처제도 다른 이름이 있었어?”

“클라리시아 피에타.”

“우리 처제는 이름도 귀여웠네.”

클라레의 원래 이름은 밝고 빛이 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클라레 역시, 누구보다 씩씩하고 건강한, 누구보다 밝고 눈부신 아이로 자라는 중이었다.

“작명 솜씨가 좋으시구나.”

“부모님은 뭐든 잘하셨어.”

그렇군, 레토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니,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딱히 어색하거나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지만, 레토는 괜히 노아의 편지지를 힐끔거렸다.

어떤 것도 쓰이지 않은 새하얀 유서.

“…오늘.”

편지지를 힐끔거리던 레토가 물었다.

“부대에서 네가 말했던 서쪽 해안, 거길 부모님이랑 자주 놀러 갔었다고 했나?”

“어릴 적에.”

노아가 손가락 사이에 끼웠던 펜을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피에타의 가신 가문이 그곳을 다스렸거든. 해안 영지이긴 한데, 바다를 마주하는 곳이 절벽뿐이라서….”

심드렁했던 첫마디와 달리, 노아의 목소리는 점점 생기가 넘쳐났다.

그러다간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웃기 시작했다.

“거기서 놀다가 아버지한테 엄청 혼났었는데.”

“이 예쁜 아가씨한테 어디 혼낼 구석이 있다고.”

레토가 부러 이해 못하겠단 듯이 말하자, 노아가 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술술 털어놓았다.

“꽃을 꺾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했거든.”

“와, 그건 혼날 만했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즐겁고 행복한 추억의 일부가 되었다.

“아버지랑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 배를 탄 적도 있고, 어머니랑은 그 절벽 아래로 펼쳐진 바다를 그리면서 나들이를 했어.”

“그때 처제는 있었나?”

“없었지.”

“그럼….”

그날을 기억하는 건 너뿐이구나.

태연한 레토의 목소리가 노아의 가슴을 또 한 번 뒤숭숭하게 했다.

“…너.”

그리고 노아는 숨을 훅 내뱉으며 레토를 노려봤다.

“오늘 왜 계속 그러는 거야?”

“내가 뭘?”

레토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셈이 뻔히 드러나는 얄팍한 고갯짓이었다.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노아는 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넌 내가 외로웠으면 좋겠어?”

“오히려 그 반대지. 난 노아 네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그런데 왜 계속…!”

“하지만 정말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그렇게 반박하려던 노아는, 이번에도 역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답하지 못하는 저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런 노아를 바라보는 레토도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신이 당장 울 것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저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계속 외롭냐고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서 계속 지켜본 노아를 생각하면, 이 점은 확실하게 맺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레토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지금 그 상태로 제국에 간다면, 대원들에게 방해가 될 거야. 그리고 너도 같은 생각일 거고.”

“잔인한 새끼.”

“하지만 봐.”

내 말에 반박을 못 하잖아.

레토가 그렇지 않으냐며 물었다.

노아는 분에 겨운 듯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자 레토가 손가락으로 그걸 막았다. 노아는 움찔거리며 깨물던 이를 떼어냈다.

“아파라.”

치열이 희미하게 남은 제 엄지를 살짝 핥으며, 레토는 노아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때.”

시선을 휙 피하며, 노아가 말했다.

“나보고 혼자가 아니라고 했잖아. 수도에서, 남부로 떠나기 전날….”

“맞아. 넌 혼자가 아니지.”

“그런데 왜 계속 외로워 보인다고 말해?”

“계속이라곤 하지 않았어.”

레토는 노아의 말을 정정하면서, 자신이 하고픈 말을 확실하게 전했다.

“네 말대로, 노아 벨로는 외롭지 않아.”

커다란 손이 저보다 작고 가는, 하지만 상처와 굳은살이 가득한 여자의 손을 감싸 쥐었다.

마치 도망가지 말란 듯.

“하지만 노빌리아 피에타는, 외로워 보여.”

“…….”

예상대로 노아는 레토가 붙잡고 있던 제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예상했던 행동이라 레토는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잡은 손에 힘을 더욱 강하게 실었다.

“네가 그랬지? 부모님의 유해를 보는 게 무섭다고.”

레토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게, 뼈밖에 없잖아.”

“그걸 직접 봐야 하는 게, 무서워….”

그때까지만 해도, 레토는 노아가 말 그대로 부모님의 시신을 보게 되는 것을 무서워하는 줄 알았다.

“내 목표는 선조들의 의지를 이어, 피에타의 보검으로 삿된 것을 베는 거야.”

그리고 제국을 증오한다고 생각했다.

하나 최근 노아가 드문드문 내비친 감정은 여태 본 것들과 결이 조금 달랐다.

마냥 화가 나고 무섭다기엔, 쓸쓸해 보이던 옆모습.

마치 결혼하기 전, 함께 당직을 섰던 그날에 바다를 보며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처럼.

“네가 왜 무섭다고 했는지, 난 알 것 같아.”

“나조차도 모르는 감정을, 네가 어떻게 알아?”

순간 울컥한 노아가 저도 모르게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알아.”

반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

대답하는 레토는 너무도 평온했다.

“…….”

노아는 이제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

“아, 그러고 보니 시간이 늦었네.”

“…어, 그러게.”

“그만 잘까?”

“응….”

긴장감이 팽팽하던 대화는 허무하게 멈췄다.

둘은 정말로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일상을 시작했다.

“아니, 근데.”

출근을 위해 붉은 애마를 운전하던 레토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처제는 왜 내가 속옷이 없다고 생각한 거야?”

“아, 그거?”

노아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로 대답했다.

“클라레가 네 속옷을 본 적 없어서 그래.”

“…더 이해가 안 가는데?”

“클라레가 아스를 자주 도와주잖아, 집안일 같은 거.”

그중에는 빨래 너는 것을 도와주는 일도 있었다.

“나나 아스 속옷은 같이 씻을 때 종종 보고, 할머니랑 할아버지 것도 빨래할 때마다 보는데….”

“아하.”

레토는 그제야 깨달았단 듯이 감탄을 흘렸다.

반면 노아는 술렁이던 가슴을 몰래 쓸어내렸다.

‘깜짝이야.’

노아는 내심, 레토가 어정쩡하게 멈춰 버렸던 어제의 대화를 이어 갈 줄 알았다.

“난 내 속옷을 따로 빨아서 너니까, 처제가 못 본 거구나.”

“그런 거지, 뭐.”

“진짜 너무 귀엽다. 애가 어쩜 저리 깜찍하고 엉뚱….”

하지만 레토는 어제 나눴던 이야기는 이미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나만 바보 된 거 같네.’

그래서 조금 짜증이 났다.

아니, 솔직히 화가 많이 났다.

중요한 작전이 코앞인데, 제 속을 뒤집는 레토가 미웠다.

게다가 지금의 자신이 대원들의 발목을 잡을 거라니.

‘어이가 없어서.’

이쯤 되자 노아는 레토가 가소롭기까지 했다.

그간 자신이 참고 버틴 세월이 얼마인데, 내 감정 하나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그런 민폐를 끼칠까.

‘오히려 감정 조절 못 해서 피해를 줄 뻔한 건 자기였으면서.’

디모네 닉스를 몇 번이고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충분히 이해하는 상황이었다. 나 같아도 찢어 죽였지.

‘하지만 자기 때문에 작전이 실패할 뻔했던 건 기억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노아의 얼굴 근육이 일순 굳어졌다.

“…….”

그러곤 퍼뜩 옆을 돌아봤다.

“그럼 처제는 여태 내가 속옷을 안 입는 변태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도 나랑 친하게 지냈다니….”

레토는 여전히 클라레가 했던 말이 충격이라며, 자신은 아내 한정 변태라는 둥 싱거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응?”

그러다 시선을 느낀 레토가 옆을 힐끔거렸다.

“왜?”

“…….”

무어라 말하려던 노아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아니.”

아무것도.

노아는 별일 아니란 듯이 대답하고는 다시 차창 너머 바깥을 바라봤다.

가을을 코앞에 둔 샤프 영지의 푸른 바다는 수색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노아의 마음처럼.

***

“자, 잠깐!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하늘에 계시는 어머님을 모시는 성전을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친 검찰 수사관들은 신성청 내부를 샅샅이 수색했다. 예고 없던 수색에 당황한 추기경들과 성직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물론 뒤늦게 정신 차리고 수사관들을 막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헛될 만큼, 수사관들은 신성청의 비고나 은밀한 밀실만 쏙쏙 골라 찾아냈다.

“이 불경하고 삿된 것들!”

보다 못한 어느 나이 지긋한 추기경이 주름이 가득한 목에 핏대를 돋우며 소리쳤다.

“어머님을 모시는 성스러운 궁전을 더럽히다니! 하늘이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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