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아티는 당장 서부 신성청 구역으로 향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국왕은 다시 책상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저 말고 아무도 없는 집무실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사색에 잠겼다.
‘정말 끝이 보인다.’
디모네 닉스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그 죄목을 열거하는 것은 이제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괴물 같은 그 남자가 죄대로 된 벌을 받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국왕은 오랫동안 디모네 닉스의 눈과 귀를 가리는 데 온갖 열의를 쏟아부었다.
왕후에게 나한테도 그 정도의 정성을 쏟아 보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을 정도였으니, 국왕의 노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그리고 드디어.
“가지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것만으로는 내란죄를 완벽하게 성립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기껏 해 봤자 내란 선동죄? 그조차 인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모네 닉스는 겨우 함정에 빠졌다.
국왕은 그 남자가 모르는 증거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피니치 구역에서 죽은 육군들의 사진과 그들의 신원, 그리고 그자의 모든 점을 증언할지도 모르는 육군의 생존자까지.
‘그 생존자는 일단 계산에 넣지 말아야겠지만.’
해군 측 연락에 따르면, 치료의 진척은 있으나 아직 협력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거나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국왕은 겨우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벌을 받아야 할 것들은 더 있지.’
신성청.
그리고 제국.
국왕은 공정성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죄를 지은 한 사람만 처벌하는 건 명백한 차별이었다.
공범들도 사이좋게 벌 받아야 나중에 억울한 소리가 안 나오지.
이번 내란죄 1심 1차 공판의 결과는 국왕이 가장 바라던 것이었다.
‘법무부에 경고를 주길 잘했군.’
지난밤에 열린 긴급회의에서 눈치를 단단히 받은 법무부 장관은 1심 재판부에게 아주 가벼운 조언을 했다.
재판의 공정성을 해치지 않을 수준의 조언.
“신중해야 할 사건이니, 증거의 부족함은 있을 수 없지.”
요컨대, 시간을 끌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1차 공판에서 재판부는 검사 측의 증거 보충을 명령했고, 이를 위해 긴 유예 기간을 둘 것이다.
그 사이에 왕실은 신성청을 긴급수색할 계획이고.
해군은 시스토 제국에 특함을 잠입시킬 것이다.
“…….”
그러나 모든 계획이 순순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국왕의 속은 편치 않았다.
‘그 자식, 또 이상한 생각을 품는 건 아니겠지?’
7년 전, 죽으려고 전쟁에 참여한 친구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덩칫값도 못 할 만큼 겁이 많고 매사 신중한 녀석.
‘너무 생각이 많은 녀석이야.’
국왕은 레토가 제게 결혼 청첩장을 건네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디모네 닉스가 자기 친부란 사실이 언제 알려질지 모르니까, 내 입장을 생각해서 안 보낸 거지.’
레토는 항상 모두에게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굴었다.
국왕은 그런 친구를 이해했고, 그렇기에 안타까웠다.
“…이번엔 그러지 마라.”
소리 내어 말한 국왕의 진심은 허공에 흩어져 갔다.
***
이틀 뒤.
“제국으로 잠입할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회의실에 모인 특함은 참모부에서 전달받은 작전 계획을 검토했다.
실제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특함이기 때문에, 참모부의 작전을 조금 더 현실성 있게 수정 및 보완하는 것이 이번 회의의 목표였다.
“일주일 뒤 새벽. 군함 ‘비레오’를 타고 출항합니다. 경로는 지도에 표시된 그대로….”
커다란 테이블을 한가득 덮는 해도 주위를 둘러싼 특함 대원들의 표정은 너나 할 것 없이 진지했다.
“비레오는 여기까지.”
피스트 준위는 해도 위의 배 모형을 움직이며 작전을 설명했다.
푸른 바다를 거침없이 나아가던 작은 배 모형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바로 시스토 제국의 해안 지역을 기준으로 8해리 정도 떨어진 구역이었다.
“시스토 제국의 가시거리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곳입니다. 이후부터는 개인함선으로 제국에 잠입합니다.”
“잠입할 곳은?”
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듣던 레토가 물었다.
“동쪽 해안에 있는 조그마한 해안협곡입니다.”
“아, 거기.”
레토가 알은체했다.
“내가 7년 전에 잠입했던 곳이군.”
“그렇다면 작전을 다시 짜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7년 전 전쟁에 참전했던 아이스 중령이 이의를 제기했다.
“중장님이 이동했던 경로는 제국에서도 주의 깊게 경비할지도 모릅니다.”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경로는 없나?”
“최근 제국의 경계가 삼엄하다는 첩보입니다.”
“간첩은 그렇게나 처보내면서….”
“치티아 중위.”
레토의 은근한 경고에 아미가 입술을 삐죽였다.
“음, 그, 어쨌거나 경계가 삼엄한 탓에, 다른 경로를 통해 들어가는 것은 조금 위험성이….”
“여기.”
해도 위에 손가락 하나가 난입했다.
“이곳 서쪽 해안.”
바로 노아였다.
“이곳에도 작은 해안협곡이 하나 있습니다.”
“대, 대위님?”
피스트 준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놀란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노아는 제가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말했다.
“중장님이 7년 전에 잠입하셨던 동쪽 협곡보다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협곡 앞에 돌섬이 하나 있어서 모습을 감추기에도 좋습니다.”
“확실한가?”
대원 중 유일하게 노아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던 레토가 물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피스트 준위.”
레토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까닥했다. 저 말을 확인해 보란 뜻이었다.
피스트 준위는 서둘러 옆 테이블에 쌓아둔 서류 더미를 뒤졌다. 거기에서 따로 꺼낸 건 시스토 제국의 해안 지도였다.
“…혹시, 여기 말입니까?”
피스트 준위가 지도의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시스토 제국의 서쪽, 자잘한 도서가 밀집해 있는 리아스식 해안이었다.
“정확히는 여기.”
아예 펜을 집어 든 노아가 해안가 중 유독 툭 튀어나온 둥그런 부분을 가리켰다.
“이곳에 내륙과 통하는 강의 하류로 이어지는 협곡이 있습니다. 지형이 위험해 민가와도 떨어져 있으니, 잠입하기엔 최적입니다.”
“하나 여긴….”
피스트 준위가 머뭇거렸다.
노아의 말마따나, 서해 지역은 작은 섬들이 많아 모습을 감추기엔 좋았다.
그러나 이곳에 해안협곡이 있단 사실은 지도에 적혀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지도는 7년 전, 전쟁에서 이긴 뒤에 해군이 압수한 공식 해안 지도였다.
‘공식 지도에도 없는 내용을 대위님이 어떻게 아는 거지?’
피스트 준위는 노아를 인간적으로 신뢰했다. 요즘 이런 올곧은 사람은 보기 드무니까.
하나 목숨이 오갈 수 있는 중요한 작전을 논의하는 지금, 신뢰할 만한 논거나 자료도 없이 저 말을 무작정 믿을 순 없었다.
“…할머니가.”
그런 준위의 심정을 눈치챈 노아가 말했다.
“할머니가 배를 타는 사람이라서, 시스토 제국을 자주 다녀오셨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대위님. 하지만 지도에는….”
“틀림없습니다.”
노아가 힘주어 말했다.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시스토 제국의 강수량은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그때 이 협곡을 통과하는 게 가장 수월….”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그만.”
진전 없는 설전에 보다 못한 레토가 끼어들었다.
“벨로 대위.”
“…예, 중장님.”
“피스트 준위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그도 참모부에서 내려온 작전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죄송합니다, 준위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아닙니다.”
노아의 사과를 받은 피스트 준위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일단 벨로 대위께서 말씀하신 지형을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만약 노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작전을 크게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저 말대로 서쪽에서 내륙과 통하는 협곡이 있다면, 소모 시간을 단축하는 쪽으로 작전을 수정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제국의 황실과 주요 귀족의 거처가 대부분 서쪽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의는 일단 중지해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레토가 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몸 상하지 않는 선에서 훈련에 임하고….”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노아를 응시했다.
“대위는 잠시 날 따라오도록.”
***
회의실을 나온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구석진 곳에 위치한 비품실이었다.
두 사람에게 비품실은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연애 시절엔 틈만 나면 이곳에 와서 은밀한 애정행각을 나눴었다.
결혼한 뒤로는 이곳에 방문하는 빈도가 줄어서 그런지,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환기도 안 하는지 공기도 꿉꿉했다.
“나중에 청소 좀 시켜야겠군.”
레토는 일단 구석진 곳에 노아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먼지가 그나마 덜 쌓인 상자 위에 제 손수건을 깔고, 거기에 노아를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대충 아무 상자나 끌고 와 앉았다.
“노아.”
레토가 노아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가볍게 힘을 주며 안마하듯 만지니, 굳어 있던 노아의 얼굴 근육이 덩달아 살살 풀어지기 시작했다.
“…미안해.”
그러던 중, 노아가 대뜸 사과했다.
“사과할 일은 아니지.”
레토는 쓰다듬던 노아의 손을 잠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네가 예민해진 건, 조금 걱정이 되네.”
그러고는 노아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쌌다.
“뭐가 불안한지 말해 줄 수 있어?”
“…잘 모르겠어.”
순순히 대답하는 노아의 목소리는 기운 없고 처져 있었다. 조금 전, 피스트 준위와 대화를 나누던 기백 넘치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변화였다.
대신, 레토에겐 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마음이 뭔지 모르겠어.”
“불안해? 작전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한 거야?”
“그것도 잘 모르겠어.”
이제 제국으로 떠나는 날까지 1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그냥, 좀….”
날이 다가올수록, 노아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하지만 이걸 도대체 어떤 감정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수도에서, 군사 박물관에 전시된 피에타 가문의 칭송글을 보았을 때.
‘그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는데.’
하지만 그땐 레토가 저 이상으로 예민하고 이상했기 때문에, 제 감정을 우선시할 여유가 없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하는 감정이 노아를 불안하게 했다.
아니, 작전이 확정된 뒤론 계속 불안했다.
“…있잖아.”
그런 노아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레토가 조심히 말했다.
“외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