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180화 (180/245)

180.

“아, 생일….”

다음 날 아침.

기어코 본부에서 밤을 새운 아드벨로 대장이 망했단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샤워실에 다녀온 건지, 제집 안방처럼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칭칭 감싸 올린 모습이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하필 또 걔 생일이랑 그리 겹쳐 버렸네.”

“…….”

“근데 나 방금 씻고 왔는데, 안에서 좀 기다릴 테냐?”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일찍 출근한 레토는 우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

나가기 전, 레토가 가지고 온 도시락을 건넸다.

“샌드위치입니다. 비서실장님 것도 있으니 같이 드십시오.”

“아스가?”

“처형과 처제가 같이 만들었습니다.”

“흐음.”

도시락을 받아든 아드벨로 대장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알았으니 일단 나가 봐. 좀 걸릴 거야. 나간 김에 매점에서 홍차 티백 좀 사 오고. 나 먹는 거라고 하면 알 거야.”

레토는 시킨 대로 매점에 가서 홍차 티백이 포장된 상자를 하나 샀다. 사는 김에 비서실 사람들이 먹을 간식거리도 샀다.

‘돌아갈 때 우리 대원들 먹을 것도 사야겠군.’

장을 보고 참모총장실로 가니, 때마침 아드벨로 대장이 레토를 찾았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선 레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엉망이었다. 온갖 서류와 책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소파 위에선 비서실장이 널브러진 채 잠들어 있기까지 했다.

“…….”

레토는 발치에 툭 닿은 종이를 들었다. 시스토 제국으로 향하는 해로가 그려진 해상지도였다.

“아아….”

아까보다 단정한 차림이 된 아드벨로 대장이 도시락에서 꺼낸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처제의 생일입니다.”

“아, 그래. 우리 똥강아지 생일.”

그러곤 또 한 번 크게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저작질을 한참 하던 대장이 꿀꺽 음식물을 삼켰다.

“…일단 차 좀 끓여 봐.”

레토는 묵묵히 작은 화로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그사이, 샌드위치를 다 먹은 아드벨로 대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 치티아 중위가 치료에 전념하고 있어.”

“디모네 닉스의 수하였던 육군 대위 말입니까?”

“어. 검은 건물에 갇혀 있어.”

레토는 그 남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풀루스 대위.’

피아 약물에 중독된 것으로 추정되던 전직 육군 대위, 디모네 닉스의 불법 사병 육성을 증명할 유일한 증인.

그런 이유로, 현재 풀루스 대위의 재판은 전부 중지 상태다.

그리고 남부로 몰래 이송되어, 현재 해군에서 가장 은밀한 곳인 ‘검은 건물’ 안에서 아미의 성력으로 정화를 받는 중이었다.

“차도는 보입니까?”

“몰라.”

두 번째 샌드위치를 막 집어 든 대장이 말했다.

“차도를 보이는 건지, 아닌지….”

“치티아 중위의 힘으로도 힘듭니까?”

성녀가 나서는데도 어려운 상황이냐는 뜻이었다.

묻는 레토를 빤히 응시하던 아드벨로 대장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병세로 보이던 중독 상태는 확실히 차도를 보였어.”

몸은 나아 가는데, 문제는 상대의 마음과 생각머리였다.

“치티아 중위가 그러더라.”

그녀는 아미가 전한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성력으로 치료 못 할 병은 없지만….”

“성력으로 치료 못 할 병은 없지만, 사람의 마음까지는 어쩌지 못합니다.”

“분명 진전은 보입니다. 마탑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문제는 저 새끼가 입을 열 생각이 없단 겁니다.”

피아 중독에서 조금씩 벗어나면 세뇌도 어느 정도 사라질 것이란 게 마탑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풀루스 대위는 오히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짐작하기론, 마약으로 세뇌당하기 이전부터 디모네 닉스의 어긋난 사상에 동조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건 성력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문제였다.

“괜한 헛짓을 하는 건지도 몰라.”

“그렇습니까.”

“넌 어떻게 생각하냐?”

예상치 못한 물음에 레토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는.”

그러나 곧 순순히 대답했다.

“그 남자가, 저의 또 다른 미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

“만약 제가 그 낡은 집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분명 그 악마의 농간에 빠져서 모든 것을 잃었을 겁니다.”

“노아랑 만나지도 못하고 말이야.”

대장의 농담에 레토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만났을 겁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아드벨로 대장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히죽거렸다.

“신혼이라서 나오는 자신감이냐?”

“그건 저희 부부의 사생활입니다.”

“으엑, 징그러.”

헛구역질하는 흉내를 내면서도, 아드벨로 대장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잡담을 마친 둘은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쨌건 치료는 계속해 봐야지. 설득도 해 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래도 안 된다면, 뭐….”

두 손을 살짝 들어올린 대장이 레토를 힐끔거리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지? 라는 듯이.

이에 레토가 소리 없이 웃었다.

“…어쨌건 상황이 여의치는 않아.”

아드벨로 대장이 말했다.

“전쟁 이후로 처음 타국에 잠입하는 거라고. 들키는 즉시 국제적 분쟁으로 커질 거고, 전쟁은 거의 불가피야.”

그렇기 때문에 제국에 들키지 않고 진입하는 작전을 짜느라 참모부들이 머리를 한데 모아 쥐어짜는 중이었다.

“만약 들키는 경우엔?”

레토가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대장 역시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아서 해결해야지.”

“…….”

“뭐, 지원군이라도 보내 줄까?”

“설마 자살특공을 명하시는….”

“너 미쳤냐?”

아드벨로 대장이 정색했다.

“자살특공을 왜 시켜! 어떤 개또라이가 그런 머저리 같은 짓을 명령해!”

“그럼 뭘 알아서 해결하시라는….”

“개인특함 전부 자폭장치 가동해서 바다에 수장하고, 너희는 거기 배 훔쳐서 도망치면 되잖아.”

“아.”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열불이 난 아드벨로 대장이 발로 레토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둔탁한 통증에 레토가 허리를 고꾸라트리며 주저앉았다.

“야, 이번 전쟁이 7년 전이랑 같은 줄 알아?”

정강이를 붙잡고 끙끙거리던 레토가 멈칫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그의 과거를 냉정하게 비판했다.

“넌 그때 죽으러 갔던 거지만, 이번엔 아니야.”

“…….”

“널 믿고 따르는 12명의 대원들을 위해서라도, 넌 반드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모두를 데리고 돌아와야 해.”

아드벨로 대장의 명령이 레토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웠다.

“대답은?”

“…예.”

레토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그러나 썩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명에 대한 복종을 약속했다.

“반드시 전원,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좋아!”

약속을 받은 아드벨로 대장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

한편.

수도에선 꽤 불쾌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래 걸리는군.”

제 집무실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삐딱하게 앉은 카일리코 국왕이 무릎 위에 올린 손에 턱을 괸 채로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지 않습니까.”

“1차 공판이 이리 걸리는 일인가?”

“아무래도 뭐….”

지금 재판 중인 사건이 보통 사건이 아니니까.

국왕의 조력자로 임시 근무 중인 아티가 뒷말을 삼키며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나 그 미소는 빠르게 사라졌다.

아티에게도 지금 진행 중인 어떤 재판 하나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꽤 제멋대로 산다고 자부해 왔는데, 저보다 더한 미친놈이 있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섬뜩했다.

‘그래서 자존심도 상하고.’

그렇다고 그 남자보다 더한 미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제멋대로 산다 해도, 인간성은 지켜야 하니까.

“…대충 2시간이 지났군요.”

두 남자는 시계를 힐끔거렸다.

현재 시각 오후 11시 38분.

디모네 닉스의 1차 공판이 진행 중이었다.

죄명은 내란죄 및 반란 미수죄.

오랜 논의 끝에 비공개로 진행되는 1차 공판은 아침 일찍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티가 말했다.

“그 판사 말입니다.”

“누구? 의도적 악의?”

“예. 악의요.”

아티는 아침에 락소가 말해 준 정보를 전달했다.

아들라보르에서 술집 겸 정보상으로 일하던 락소 역시, 여전히 궁에 머물며 협력하는 중이었다.

“아드벨로를 협박죄로 고소할 예정이랍니다.”

“풉!”

상상을 뛰어넘는 근황에 국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아드벨로를 협박죄로 고소한다고?”

“아드벨로가 원하는 인재상인데,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헛되이 쓰다니.

아티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만약 그 판사가 아드벨로의 가신이었다면, 글로리아를 비롯한 아드벨로 어른들이 무척 마음에 들어 했을 텐데.

“연예인 체질이었네.”

국왕이 그새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능이 아주 탁월했다.

“그리고 아주 기고만장하군.”

즐거운 목소리와 달리, 국왕의 금빛 눈동자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끔 그런 머저리들이 있지.”

가당찮은 우월감에 휩싸여 공정함을 잃어버린 쓰레기 판사들이.

누가 보면 자신들이 신이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그들의 소임은 객관적인 증거와 합리적 논거를 토대로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지, 제멋대로 죄인을 동정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었다.

“법무부에선 최근 그 판사가 담당했던 사건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답니다. 이전에도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일이 좀 잠잠해지면 경질 한번 해야겠군.”

말세야, 말세.

국왕이 마땅찮단 듯이 혀를 끌끌 차던 때였다.

“국왕 전하.”

다급한 목소리의 보좌관 한 명이 집무실에 방문했다.

아티가 가서 문을 열어 주자, 보좌관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 디모네 닉스의 1차 공판이 끝났습니다.”

“어떻게 되었나?”

책상에서 내려온 국왕이 물었다.

“그것이….”

보좌관이 조금 전 전화로 전달된 내용을 들려줬다.

“내란죄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재판부가 검찰에게 증거 보충을 명령했습니다.”

“기간은 언제까지라나?”

“워낙 중대한 사항이기 때문에, 현재 그 기간을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알았다.”

보좌관을 내보낸 뒤, 국왕과 아티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됐다.”

“예, 드디어.”

“이 소식을 라디오 뉴스와 신문사에 통보하게.”

“그럼 저는….”

아티는 선물을 받은 꼬마처럼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신성청을 털고 오겠습니다.”

쥐 잡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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