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179화 (179/245)

179.

그리고 그날 오후.

친구들과 헤어진 뒤, 클라레는 아스에게 물었다.

“전쟁은 안 일어나지?”

오늘 저녁에 먹을 커다란 생선에 양념을 덕지덕지 바르던 아스가 놀란 눈으로 클라레를 내려다봤다.

“전쟁이요?”

“…….”

가벼운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줄 알았는데.

입꼬리가 살짝 아래로 내려간 것이, 아무래도 제 딴에 무언가가 무섭고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스는 하던 것을 서둘러 멈추고 손을 씻었다.

“아가씨.”

그리고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클라레 앞에 무릎을 꿇으며 눈을 마주쳤다.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오늘, 친구들이랑….”

클라레는 비밀 조직의 정기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아스에게 전해 줬다.

그제야 사정을 알게 된 아스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 걱정하신 거예요?”

“애들이, 전쟁이 나도 해군이 막아 주고 지켜 줄 거랬어….”

“맞아요. 해군은 엄청 강하니까요.”

“그건 나도 아는데….”

클라레가 가슴 앞에 모은 손가락을 쭈뼛쭈뼛 만지작거렸다.

“언니도, 싸우는 거지?”

클라레는 솔직하게 말했다.

“언니는 안 싸우면 좋겠어.”

“…….”

“언니랑, 형부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안 싸우면 좋겠어. 전쟁은 사람이 다치고 아픈 거잖아….”

“아….”

아스는 입꼬리를 축 늘어트린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클라레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꼭 안아 줬다.

‘불안하신가….’

아스는 그새 제 허리춤을 꽉 잡는 어린 아가씨의 작은 손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전쟁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아요.”

안심하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줬지만, 사실 아스도 내심 걱정이긴 했다.

‘처음이었지.’

노아가 해군이 된 뒤로, 새벽에 긴급호출을 받고 급하게 나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는 작은 부군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글로리아와 비스까지 그렇게 나가다니.

결국 새벽 댓바람부터 깜짝 놀란 클라레가 가지 말라고 엉엉 붙잡고 울기까지 했으니, 덩달아 잠이 깬 아스도 뜬 눈으로 아침 해를 보고 말았다.

아스는 소리 죽인 한숨을 내뱉었다.

‘옛날부터 예민하셨지.’

사실, 클라레가 이렇게 전쟁이란 단어에 불안하게 반응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랬다. 그리고 제국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한다기보단 기피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이유도 대충 알고 있다.

‘작은 주인님 때문에 생긴 조건반사려나….’

7년 전에 처음 만났던 노아는 정말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그때는 제국과 관련된 단어만 나와도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었다.

그리고 클라레는 그런 노아를 가장 가까이서 보아 왔다.

‘눈치가 너무 좋다니까.’

아스는 제 품에 안긴 클라레의 얼굴을 감쌌다.

“이제 좀 괜찮아요?”

끄덕끄덕.

클라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벽에 다들 일하러 가서 조금 놀란 모양이에요.”

“너무 철부지 같았을까? 내가 고집부리면서 우니까, 언니가 곤란해하고 싫어했으면 어쩌지?”

“제가 전에도 말했지요?”

아스가 클라레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빗어 주며 말했다.

“작은 주인님은 아가씨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요.”

“…헤헤.”

그 말에 클라레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헤실헤실 웃었다.

“아스는? 아스도 나 좋아해?”

“저도, 작은 부군도 아가씨를 무척 좋아하고요.”

“나도 아스랑 형부 좋아해!”

“큰 주인님도, 큰 부군도, 주인님이랑 부군께서도….”

“다들 날 엄청 좋아하는구나!”

기운을 차렸는지, 클라레는 아까보다 훨씬 씩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을 마구 헤집던 불안이 사라지니, 그제야 클라레의 눈에 아스가 만들고 있던 생선 요리가 보였다.

“아스, 오늘 저녁은 뭐야?”

“매콤한 양념을 바른 토마토 생선찜이에요.”

“너무 매우면 나는 못 먹는데! 혀가 따끔따끔하거든.”

“아가씨도 먹을 수 있을 정도예요.”

“상냥한 배려심에 감사하오, 아가씨!”

클라레는 아스의 치마 끝자락을 살짝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지 모를 요상한 귀족 예절이었다.

“어머, 칭찬 감사합니다.”

덩달아 즐거워진 아스가 호호 웃었다.

“그런데 이제 슬슬 식칼토끼 라디오 방송할 시간이죠?”

“아, 맞다! 오늘은 방학 특집으로 극장판 1기 라디오 방송한다고 했는데!”

후다닥 거실로 가 버리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던 아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

그러곤 애써 감췄던 한숨을 길게 토해 내며 다시 생선에 양념을 치덕치덕 발랐다.

‘전쟁….’

조금 전에는 달랜다고 그리 말했지만, 아스는 사실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안감을 몰래 품고 있었다.

‘안 일어나는 게 더 이상하지.’

그녀는 이번 여름에 정말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피니치 구역에서 있었던 전투, 신성청과 육군, 선대 국왕의 역겨운 정체와 반전, 7년 전 전쟁의 진짜 원흉.

그리고 끊임없이 나타나는 간첩.

‘뭐, 간첩이야 늘 있는 일이니….’

탕!

생선에 양념 바르는 걸 마친 아스는 식칼을 들었다. 그러고는 찜 위에 올려 익힐 채소들을 큼지막하게 잘랐다.

능숙한 칼질 덕에 재료 손질은 금세 끝났다.

하지만 아스는 칼을 쥔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아이의 불안이 옮은 것인지.

아니면 저도 이미 불안을 품고 있었던 건지.

“…….”

아스는 결국 또 한 번,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

그러다 불현듯.

중요한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아가씨 생일이 곧인데.”

아스는 서둘러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

“…아.”

우습게도, 퇴근한 노아도 조금 전 아스와 똑같은 소리를 내 버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아스보다 훨씬 암담한 표정이란 점이었다.

“클라레 생일…!”

“설마 잊고 계셨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변명을 덧붙이려던 노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전 나가.”

순간 불길해진 아스가 다급히 물었다.

“어, 언제요?”

“클라레 생일에….”

벨로 가문의 막내, 클라레 벨로의 생일은 8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여름의 마지막에 태어나서 이리도 씩씩하냐는 축하 인사가 잘 어울리는 생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

아스가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설마 전쟁이라도 나요? 그런 거예요?”

“전쟁은 아닌데….”

후우, 숨을 깊이 내뱉으며 움켜쥔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긴 노아가 대답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움직이려는 거야.”

“그럼 제국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

“어우, 머리야…!”

아스는 기어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오늘따라 클라레가 불안해한다 싶더니, 그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하다.

인간의 생애 중 두뇌가 가장 왕성하게 움직이는 시기다. 많은 것을 습득하고 배우는 아이들은 분위기도 예민하게 감지한다.

실제로도, 지금 남부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수도에서 한창 말이 많은 군 관련 재판만 해도 그렇지만, 바로 얼마 전 불법 폭력 단체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아스도 샤프로 돌아온 뒤에 장을 보러 다닐 때면 그런 분위기를 종종 감지했다.

어딘가 불안하고, 술렁술렁하는 느낌.

가슴 한쪽이 괜히 쿵쿵거리게 되는 불길한 기류.

“…….”

아스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애써 차분하려는 눈빛이 어딘가 비통했다.

“얼마나, 걸리나요?”

“몰라.”

노아가 말했다.

“확실하게 정해진 게 아직 없어.”

“그치만 위험한 임무죠?”

“…….”

노아의 침묵에 아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볍게 숨을 고른 뒤, 아스가 말했다.

“아가씨한테는 당일까지 비밀로 하죠.”

“그래야지.”

“아아, 눈에 훤하네요.”

제 언니와 형부가 위험한 일을 하러 가는 걸 알아채고 엉엉 울며 나자빠질 클라레가, 당장 일어난 일처럼 훤했다.

그새 피곤해진 아스는 미간을 꾹꾹 지압했다.

“생일파티는 하루 일찍 열어야겠어요.”

“응.”

“시간 되세요?”

“양해를 구해 봐야지.”

대화를 나눈 둘은 슬쩍 거실로 나가 봤다.

거기엔 일찌감치 옷을 갈아입고 나온 레토가 클라레와 놀아 주는 중이었다.

“형부! 이거 봐라?”

“음, 뭐죠? 손수건?”

“오늘 아스가 새로 산 내 속옷!”

“와.”

짧은 비명과 함께, 레토는 손에 들린 작은 천 조각을 냉큼 내려놨다.

“처제.”

그리고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클라레를 바라봤다.

“이런 건 남자에게 함부로 보여 줘선 안 됩니다.”

“그치만 형부는 가족이고 해서, 하나 줄까 했지.”

“예? 아니 왜….”

“형부는 속옷 없잖아.”

“…예?”

졸지에 속옷 없는 남자가 되어버린 레토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광경을 문 너머로 지켜보는 노아와 아스의 표정도 그와 비슷했다.

“…….”

노아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우습게도, 조금 전까지 아스랑 주고받은 심각한 내용의 대화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심 안도했다.

‘그래, 이러려고 해군이 된 거지.’

하찮고, 평범하고, 유치하고 어처구니없지만 웃음이 나는 내 가족을 지키려고.

‘그러니 이번 작전도 서둘러….’

저도 모르게 피식거리던 노아가 멈칫했다.

“…….”

그러고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나 지금….’

가볍게 스치려던 생각이, 노아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니, 아니, 아니!

충격을 받으려던 노아가 서둘러 자신을 다잡았다.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자그마치 7년이다.

7년이 지나면, 아무리 커다란 슬픔이래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노아는 그동안 아주 치열하게 살았다.

제국에서 가졌던 모든 삶의 방식을 버려야 했고, 새로운 가족을 만났으며, 해군이 되기 위해 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고, 나름의 인간관계도 맺어 왔다.

그러다가 사슴 같은 남자를 만나서 치열하게 사랑하고, 헤어질 것처럼 싸웠다가, 결혼까지 해 버렸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제국이나 친부모님을 잠시 망각하고 살 때도 많다.

슬픔이 무뎌지는 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신호이기도 하니까.

하나 그것이 모든 것을 잊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움은 점점 깊어졌는데.

‘그런데 왜….’

왜 하필 지금.

자신은 친부모님을 잠깐 떠올리지 못한 것에, 이토록 가슴 아픈 죄책감에 시달리는 걸까.

“형부!”

그때였다.

“형부한테도 초대장 줄게요!”

“무슨 초대장인데요?”

“내 생일파티 초대장!”

노아가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 옆에 있던 아스도, 클라레와 놀아 주던 레토도 덩달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일?”

물어보는 레토의 목소리가 살짝 휘청거렸다.

“응!”

클라레가 손가락 열 개를 쫙 펼쳤다.

“열 밤만 자면, 내 생일이지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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