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피에타 가문.
시스토 제국의 천년 역사를 함께한 명예로운 무가(武家).
그들은 오러를 다룰 수 있는 보검 두 자루로 수많은 업적을 쌓아 올렸다.
피에타는 귀족의 긍지였으며, 정의롭고 올곧은 강인함으로 만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 영광은 바다 건너 아들라보르 왕국을 비롯한 수많은 타국의 부러움을 샀다.
하나 그런 가문도, 7년 전 전쟁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멸문하고 말았다.
이 소식은 당시 전쟁 중에도 여러 나라에서 긴급 속보로 다뤄질 정도였다.
당시 가주였던 피에타 백작과 백작 부인은 살해당했으며, 그들의 두 딸은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였다.
그리고 한 일가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보르고 피에타였다.
“보르고 피에타….”
카일리코 국왕이 그 이름을 짓이기듯 중얼거렸다.
“긍지 높은 피에타 가문을 멸문시킨 놈이로군.”
그런데도 여전히 ‘피에타’의 성을 쓰고 있으니, 국왕은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미친놈의 머릿속은 종잡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하나 이번에는, 그자의 생각을 조금 알 수 있었다.
“오케아누스 후작이 말하더군.”
국왕은 아이트라의 전언을 장관들에게 말했다.
“제국에서 이 나라에 폭동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지금 말이 많은 군 관련 재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국왕 전하.”
외교부 장관이 물었다.
“구체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후작이 증거로 거론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디모네 닉스 전 소장의 출장 기록.
아이트라는 디모네 닉스가 육군에 근무 중일 때, 제국으로 자주 출장을 갔었던 점을 지적했다.
“…그렇게나 출장을 자주 갔는데, 남아 있는 기록은 하나도 없어. 전부 공란이고, 의도적 누락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국왕의 설명에 장관들이 수군거렸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디모네 닉스가 제국과 어떤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추측할 만했다.
이어진 두 번째 증거는 올봄, 샤프 영지에서 있었던 해군 소장 이적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이번 일과 무슨 연관성이 있습니까?”
외무부 장관이 물었다. 희끗한 백발을 짧게 친 노년의 여성이 안경 너머로 눈매를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때는 도리어 반대이지 않았습니까. 해군과 기사들이 제국으로 밀항하려던….”
“그 밀항을 도운 브로커.”
국왕이 한껏 예민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이 브로커를 의심하더군.”
“하나 그 브로커도 출신은 왕국일 텐데.”
나이가 지긋한 내무부 장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국을 오가며 불법을 저지르긴 했으나, 브로커는 일단 왕국 출신이었습니다.”
“왕국 출신이라고 반역하지 않는단 보장이 있는가.”
잠자코 분을 삭이던 알버스가 끼어들었다.
그가 입을 열기 무섭게, 장관들은 숨을 삼키며 눈짓만 소리 없이 주고받았다.
감정을 꽤 추스르고는 있으나, 피부가 따갑고 섬찟섬찟한 불쾌감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관들은 이 섬뜩한 기운이 ‘살기’임을 알아챘다.
“디모네 닉스도 왕국 출신이고, 지엄하신 선대 국왕은 누구보다 고결한 왕가의 핏줄이지.”
알버스가 이 보라며 한 손을 들었다.
“예부터 배신자는 내부에서 생겨났다.”
“…그럼.”
묵묵히 듣고 있던 법무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재판은 어찌해야 할까요?”
며칠 뒤면 프세드 렐리를 비롯해, 올봄에 있었던 이적 사건과 관련된 범죄자들의 1심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 재판을 잠시 중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 브로커에겐 지금 밀항 말고도 또 다른 여죄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여죄는 분명 어마어마한 중범죄일 테고.
“솔직히, 재판 일정이 여기서 미뤄지는 것은 좀….”
법무부 장관이 난색을 표했다.
얼마 전 아드벨로 가문이 발표한 성명 때문에, 법무부는 지금 온갖 질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보국 전 국장의 1심 재판부를 맡았던 판사들을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재판 결과를 문제 삼아 그들을 처벌했다간 판사와 재판의 독립성을 훼손하게 될 테니까.
물론 내부에서도 이번 재판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긴 했다.
“…….”
고민하던 국왕이 곧 결단을 내렸다.
“재판은 그대로 진행하도록.”
안도한 법무부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나라에 불온한 흐름을 방치할 수는 없다. 재판은 계속 진행하고, 남부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은 최대한 축소하도록.”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마치 아들라보르 왕국은 변함없이 평화롭단 듯이.
“오케아누스 장관.”
알버스를 부르는 국왕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지금부터 자신이 내뱉을 말이 가져올 파장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선택만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젠 어쩔 도리가 없군.’
그런 국왕의 심중을 알기에, 알버스는 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내 국왕이 입을 열었다.
“해군에 전보를 넣도록.”
전보에 칠 내용은 단어 하나가 전부였다.
***
다음 날 새벽.
해군에 전보 하나가 전달되었다. 발신란엔 늑대를 뜻하는 약자가 적혀 있었다. 왕실에서 긴급 명령을 내릴 때 쓰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전보는 단어 하나를 끝으로 텅 비어 있었다.
“……!”
전보를 받은 통신병은 허둥거리다가 선임에게 크게 혼이 났으나, 전보를 전달받은 선임 역시 제 후임처럼 턱을 떨어트렸다.
“다, 당장 긴급연락망을 켜!”
통신실은 서둘러 이 전보를 전달했다.
그날 새벽, 해도 아직 채 뜨지 않은 이른 아침에 해군 내 주요 간부들이 속속들이 본부에 도착했다.
군복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로 대회의실에 도착한 그들은 전부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번 회의에는 특함 대원이 전원 참석했다.
특함 대원들은 간부들이 모인 테이블 뒤에 간이의자를 두고 앉았다.
“…흐아암!”
새벽 댓바람부터 끌려 나온 아미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하품했다.
“하아, 진짜 너무 싫다.”
옆에 있던 셀린이 진심을 담아 투덜거렸다.
“나도. 이 새벽부터 무슨 일이냐.”
“입 찢어지게 하품하는 네가 창피해서 싫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틱틱대던 둘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안으로 들어온 건 아드벨로 대장과 비스 비서실장이었다.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는 대장님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회의실에 모인 전원이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아드벨로 대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른 군인들도 동시에 착석했다.
“노아.”
아미는 그 틈에 안으로 들어온 노아와 레토를 발견했다.
레토는 곧장 테이블에 앉았고, 노아는 셀린의 옆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셀린이 속삭였다.
“늦었네.”
“클라레랑 같이 잤거든.”
웬일인지 전날 밤부터 칭얼거리던 클라레랑 같이 잤었는데, 새벽 호출받고 급하게 움직이다가 그만 깨운 탓에 늦어 버렸다.
후줄근한 운동복에 얇은 겉옷, 화장기 없는 얼굴에 대충 올려 묶은 금발이 그 증거였다.
심지어 노아의 옷에는 채 마르지 않은 이상한 형상의 물 자국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레토도 썩 멀끔한 차림새가 아니었다.
곧, 아드벨로 대장이 입을 열었다.
“새벽에 ‘아비스’가 발동됐다.”
아들라보르 제국에는 다양한 상황을 대비하여 만든 여러 군사 방어 및 작전이 있었다. 그리고 작전마다 다양한 단어를 붙였다.
그중 하나인 아비스는 준전시적 상황이 감지됐을 때 발동되는 방어준비태세 중 하나였다.
다만, 이 작전은 전쟁을 대비하는 여타의 작전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비서실장이 이어서 설명했다.
“현재 진행 중인 군 관련 재판 중, 육군 전 국경 작전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디모네 닉스가 제국과 내통한다는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간부들과 특함 직원들은 나눠주는 유인물을 확인했다.
새벽에 급하게 만든 것이지만, 긴급한 상황은 확실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걸 읽는 해군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얼마 전 경찰들이 체포했던 불법 폭력 조직….”
인그레스 특수전전단 단장인 오린 준장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구했다.
늘 단정하게 땋아 묶었던 머리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길게 풀어져 있었다.
“그것들의 뒷배가 의심되는데.”
“현재 조사 중입니다만, 불법 조직을 지원한 자들 역시 신분을 감추고 은밀하게 접선했던 모양입니다.”
“의심 가는 자들은 추려졌습니까?”
제1함대 사령관인 클라시스 소장이 물었다.
이에 비서실장이 아드벨로 대장을 바라봤다.
팔짱을 낀 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아드벨로 대장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해.”
허락받은 비서실장이 말했다.
“의심 가는 인물, 이라기보단….”
단어를 잠시 고르던 비서실장이 말을 이었다.
“…신성청과 제국 귀족이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용의자, 아니, 용의 세력을 듣자마자 회의실 내부가 술렁거렸다.
‘짜증 나는군.’
아드벨로 대장은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달에만 벌써 몇 번이나 소집된 긴급회의가 불쾌했고, 같잖은 잡것들이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 건 역겨웠다.
하지만 그녀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하는 건.
“…….”
바로 용의선상에 제국 귀족이 올랐단 말을 듣고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제 손녀를 보는 것이었다.
‘불쌍하고 안쓰러운 것.’
아드벨로 대장은 노아에게서 겨우 시선을 뗐다.
드디어 바라던 순간이 왔는데, 기뻐하기는커녕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심정을 애써 삼키는 저 어린 것이 마냥 안타까웠다.
“…그 두 세력이, 용의선상에 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8성분전단 전단장인 키르코 준장이 물었다.
말수가 그리 없는 남자가 드물게 목청을 높였다. 그만큼 놀랐단 뜻이었다.
모두 이에 대한 대답을 기다렸다.
“…….”
잠시 고민하던 아드벨로 대장이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던 비서실장이 미리 챙겨 온 해군 제복 상의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얹었다.
“한 달 전.”
아드벨로 대장이 상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피니치 구역에서 일어났던 전투는, 사실 우리 해군이 잠입한 비밀 작전의 흔적이었다.”
간부들은 체면도 잊은 채, 눈코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리고 거기서 신성청이 연루되었단 증거를 찾았지.”
“신이시여….”
베네딕토 군종실장이 빠르게 성호를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