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급장 떼고 결혼합니다-175화 (175/245)

175.

“바로 간첩이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노아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

어지간한 일에도 두통을 잘 느끼지 않았는데,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상황이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닐 것 같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평범한 족속은 아니겠죠.”

마약과 불법 개조한 무기와 같은 배에 오른 놈들이다. 최악을 상정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왕국과 제국 사이엔 상당히 넓은 바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수많은 도서가 있죠.”

뒷말을 이은 위길 경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도 노아와 비슷한 이유로 두통이 도지는 듯했다.

노아가 말했다.

“아마 그곳에서 제국 쪽 범죄자들과 접선했을 겁니다.”

“지금 당장 배를 다시 뒤져!”

위길 경위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명령했다.

경찰들이 다시 내부를 수색하는 동안, 노아는 아까부터 계속 느꼈던 석연찮은 기시감이 어디서 왔는지 떠올렸다.

‘비슷한 경험이 두 번 있었지.’

첫 번째는 아까 바닷속에서도 잠깐 떠올렸던, 자신의 결혼식 날에 소탕했었던 손가락 해적단.

그놈들도 제국 출신의 중범죄자였고, 무인도에서 은거하며 몰래몰래 활동했었다.

“식량을 보관해 둔 흔적을 찾았습니다!”

“선박 지하에 침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자고 있던 머저리도 하나 체포했고요.”

경찰들은 이 배에 탄 놈들이 장거리 항해했단 증거들을 찾아냈다.

노아의 예측이 점점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노아가 떠올린 비슷한 경험 두 번째는….

“…너희를 알 것 같아.”

뜬금없는 노아의 말에 경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든 말든, 노아는 조금 전까지 범죄자들이 휘둘렀던 무기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까 물속에서 봤던 그 무기.

경찰들을 위협하듯 움직이던 검은 막대기의 정체는 어업용 갈퀴였다.

‘똑같네.’

레토와 헤어지기 직전까지 싸웠던 날.

무척 기분이 언짢았던 날인지라, 노아는 그 순간 겪었던 모든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올봄에 잡았던 제국 브로커들도 이런 걸 썼었지.”

이번에 잡은 놈들은 불법 개조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정작 경찰들을 위협했던 흉기는 어업용 도구들이었다.

분위기도 그때가 지금과 가장 비슷했다.

무기를 도로 내려놓은 노아가 음산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정도를 지키는 불법 폭력 단체인 줄 알았는데….”

“윽!”

리리의 친부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노아는 그의 손등을 짓밟았다.

총알이 스쳐서 피가 흐르는 그 손등을, 개인함선을 아직 착용한 탓에 묵직한 다리로 잘근잘근, 힘주어 밟았다.

“…아니지.”

스스로 말하고도 기가 막힌 노아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정도를 지키면, 불법 폭력 단체 따윌 할 리가 없지.”

“…….”

“간첩을 도왔으니, 이적죄로 사형을 받아도 할 말 없겠죠?”

“가, 간첩까지는…!”

억울하단 듯이 반박하려던 리리의 친부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노아가 닥치란 듯이 발에 힘을 더욱 실은 탓이었다.

“자세한 건 여기 계시는 경찰 분들이 아주 열심히, 샅샅이 털어서 조사해 주실 겁니다.”

노아의 말마따나, 경찰들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인상으로 범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해군도.”

체포된 현행범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아이트라 오케아누스 후작은 아직 수도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차남의 교육 문제로 잠시 고민했던 그녀는 어떤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매일매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최근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서먹했던 큰아들과의 관계가 훨씬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남부로 먼저 내려간 장남은 전보다 더 많이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늘 스스로 선을 긋고, 타인처럼 굴던 과거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거기다 어린 동생에게도 이전보다 살갑게 대해 주니, 집안 분위기가 덩달아 따뜻해졌다.

여러모로 반가운 변화였다.

하지만.

“…그래, 심각한 일이구나.”

오늘 저녁 걸려 온 큰아들의 전화는 평소와 결이 조금 달랐다.

“아니, 아직 못 들었단다. 최근 네 할아버지도 바쁘셔서 얼굴 보고 대화할 시간이 없거든.”

수화기 너머로 장남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대화 주제가 무거웠음에도, 아이트라의 얼굴엔 잠깐이었지만 행복한 미소가 스쳤다.

아들이 저와 가족들을 걱정해 주는 게 고마웠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너희야말로 조심하고. 그래, 곧 남부로 내려갈 거란다. 그때 보자꾸나.”

진심 어린 걱정과 안부를 끝으로, 아이트라가 전화를 끊었다.

“…후우.”

피곤한 한숨이 절로 쏟아졌다.

‘마약과 불법 개조한 무기라니.’

조금 전, 레토가 전한 소식은 정말 위험한 내용이었다.

샤프 영지 해상에서 불법 폭력 단체가 제국과의 밀거래를 통해 마약과 불법 개조 무기를 들였다고 한다.

다행히 이를 노아와 경찰들이 체포하여 왕국에 들여오는 것을 미연에 막았지만, 이 사건이 뜻하는 바가 너무 심각했다.

“어머니.”

또 한 번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려던 찰나.

“할아버지가 오셨어요.”

카리나가 알버스의 귀환을 알렸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카리나는 아이트라의 얼굴에 드리운 피로감을 눈치채고 조심히 물었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일이 좀 많아서 그렇거든.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저녁을 많이 드시고, 일찍 주무시면 금방 나을 거예요.”

아이트라의 손을 꼭 쥔 카리나가 열심히 말했다.

“전에 클라레가 그랬는데, 잘 먹고 잘 자는 게 최고의 약이라고 했어요. 이것만 잘 지켜도 의사가 필요 없대요.”

“그랬니?”

“애가 참 이상한 데서 똑똑해요.”

“어머!”

제 아들 입에서 나온 애늙은이 말투가 얼마나 웃긴지, 아이트라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카리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 어머니가 웃으니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두 모자는 함께 현관 홀로 향했다.

“할아버지!”

“어휴, 우리 작은 꼬맹이!”

겉옷을 벗어 집사에게 넘긴 알버스가 달려오는 카리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덥수룩한 턱수염을 비비적거리자, 카리나가 간지럽다며 키득거렸다.

“피곤하시죠?”

아이트라가 어서 오라며 아버지를 맞이했다.

“너도 고생 많았다.”

알버스는 카리나를 바닥에 내려 주며 말했다.

평소라면 피곤한 일이 뭐 있냐며 허세를 부렸겠으나, 요사이 정말 바빴던 탓에 그런 말을 할 여유도 없었다.

“그나저나 일은 다 끝난 거냐?”

“오늘 낮에 끝났어요.”

아이트라의 대답에 알버스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듣기 좋은 소식을 접했군!”

“응?”

어른들의 뜻 모를 대화에 카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두 어른의 얼굴 위로 아이를 향한 사랑이 묻어났다.

“카리나.”

알버스가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 작은 꼬맹이, 너는 마레이 학교가 즐거웠지?”

“네….”

대답하는 카리나의 목소리가 살짝 풀이 죽어 있었다.

아이는 샤프 영지에서 보냈던 시간이 참 좋았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친구들을 사귀어 봤고, 옷이 먼지투성이가 될 때까지 뛰어놀았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만났다.

하지만 그건 알버스의 휴가 때문에 겪은 잠깐의 꿈 같은 것이었다.

이젠 원래대로 이곳 수도에서 가정교사들에게 공부를 배워야 했다.

“아이고, 아이고.”

알버스는 그새 슬퍼하는 손주를 끌어안았다.

카리나는 애써 괜찮단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속마음은 다 드러난 상태였다.

그런 손주에게, 알버스가 물었다.

“그러면 다시 남부로 갈까?”

카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아이가 발을 달싹거렸다.

“나, 남부로요?”

상기된 얼굴을 한 카리나가 알버스와 아이트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두 보호자는 그렇다며 힘주어 말했다.

“그래.”

아이트라도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최근에 엄마가 많이 바빴잖니?”

“네. 오늘도 바쁘셔서 피곤해 하셨어요.”

“사실, 남부에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아이트라는 본업인 전략 연구를 남부에서도 할 수 있도록, 연구소와 여러 가지 업무를 분업하고 정리하느라 바빴던 것이었다.

“오늘 그 준비를 다 했단다.”

심지어 카리나의 마레이 학교 전학 수속은 며칠 전에 끝낸 상태였다.

“일주일 뒤에 남부로 갈 거야.”

아이트라의 말에 카리나가 활짝 웃었다.

“어머니!”

그러곤 아이트라를 와락 껴안았다. 격렬한 포옹에 아이트라가 뒤로 휘청거렸지만, 곧 웃는 얼굴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할아버지는 안 안아 주냐?”

알버스가 풀 죽은 표정으로 시무룩하게 물었다.

카리나는 알버스도 꼭 끌어안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허허허! 고마울 것까지야!”

“저, 저 엄청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리고 말도 잘 들을게요!”

“그건 지금도 너무 잘하고 있으니까, 늘 하던 대로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즐겁게 놀면 돼.”

“그럼 이제 저녁이나 먹을까? 오랜만에 집에서 식사한다고 생각하니 아주 즐겁구만!”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내는 세 가족에게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카리나는 마레이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단 사실이 너무 기뻐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아이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다람쥐처럼 앞구르기를 다섯 번이나 돌았다.

그때마다 아이트라와 알버스가 근사하다고 박수로 환호했고, 카리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괜히 기뻐 앞구르기를 두 번이나 더 했다.

“…방금 재우고 왔다.”

그리고 늦은 밤.

카리나를 재우고 나온 알버스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아이트라는 읽고 있던 논문을 테이블에 치워 뒀다.

“남부로 가는 게 저리도 좋을꼬.”

“오늘 정말 귀여웠지요?”

“우리 애들은 원래 귀여웠어.”

알버스가 미리 준비된 술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세상에, 그런 귀여운 앞구르기는 어디서 배운 걸까요?”

“사돈아가씨나 남부 친구들에게 배웠겠지.”

“역시 남부로 가는 게 정답이었네요.”

아이트라는 조금 더 일찍 남부로 내려가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래도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찾아 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레토한테서 연락은 왔고?”

술잔을 기울이던 알버스가 물었다.

“집에 오시기 전에 왔었어요. 아버지께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거 말고는?”

달그락, 하고 술잔 안에 담긴 얼음 조각들이 녹으면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계시는군요.”

아이트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오늘 국방부에 긴급 전보가 왔다.”

술잔을 내려놓는 알버스의 얼굴 역시 어두웠다.

“남부에서 마약과 불법 개조 무기 밀거래 현장을 체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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