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잘 이겨내면 좋겠다.”
레토의 혼잣말에 노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의 배 위에 얹었던 제 팔을 조금 더 크게 둘렀다. 이젠 레토를 크게 껴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크게 두른 팔을 토닥이자, 레토의 몸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그걸 느낀 노아가 자장가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리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많으니까, 잘 견딜 거야.”
너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냔 듯이 묻는 노아의 얼굴엔 목소리만큼이나 잔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눈이 마주친 레토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그렇다고 크게 수긍했다.
“맞아, 잘 이겨낼 거야.”
리리에겐 멋진 친구들이 있고, 강한 어머니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모친은 분명 제 딸에게 아픈 상처를 입히지 않으리라.
“…그나저나.”
리리의 미래를 진심으로 기도한 뒤, 레토는 내심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남부에 정말로 깡패가 나타났다니.”
“이거, 나중에 본부에서도 말 나오지 않을까?”
노아도 그 문제를 한 번 짚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부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천국 같은 곳은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인 만큼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문제가 바로 불법 폭력 조직 단체였다.
이들은 해적과는 결이 조금 달랐는데, 육지를 근거지로 삼아 도박, 마약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경제적 이윤을 취하는 범죄 조직이었다.
지금은 해군이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눈에 띄게 사라졌지만,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며 난리를 쳤다.
“아, 또 마약이면 진짜 가만 안 둬….”
노아가 레토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투덜거렸다.
가뜩이나 피아 약물 때문에 골 아픈 지경인데, 만약 여기서까지 마약이 관련된다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았다.
레토는 그런 노아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우리가 직접 나설 일은 없을 거야.”
죄를 수사하고 체포하는 건 경찰의 몫이었다.
해군은 협조 요청이 온다면 수색을 도와주는 정도만 해내면 되는 일이었다.
“일단, 처제한테 조심하라고 일러둬야겠다.”
레토의 말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장 걱정인 건 아이들이었다.
남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클라레가 이 문제를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리리에게 들은 것이 많다는 뜻이었다.
리리는 제 친부에게서 받은 불안함이 상당했을 테고, 이를 해소하는 방법이 친구들에게 털어놓는 것밖에 없었을 거다.
“아마 이 동네 어디에 있을 거야.”
노아가 중얼거렸다.
“그 새끼, 내가 하여튼 사고 한번 거하게 칠 줄 알았지.”
“원래도 유명한 사람이었어?”
“유명하다고 해야 할지….”
한숨을 푹 쉰 노아가 자신이 아는 것을 털어놓았다.
“클라레가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
그때 사건 하나가 제법 크게 일어났었다고 한다.
“리리의 어머님이 잠시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애 아빠가 리리를 유치원에 두고 닷새 동안 잠적했어.”
레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레토는 순간 뭘 잘못 들었다고 판단했다. 자기 애를 어쨌다고?
분명 확실하게 들었는데, 머리가 이해 처리를 거부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지만 노아는 했던 말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바꾸어 확실하게 말했다.
“애를 유치원에 버리고 갔어.”
유치원 선생님들이 퇴근할 때까지 리리의 친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혼자 남겨진 리리는 유치원 원장님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다음 날에는 이곳 벨로 저택에서 엄마가 퇴원할 때까지 보살핌을 받았다.
“유치원 원장님이 할머니랑 아는 사이거든.”
소식을 들은 글로리아는 당장 가문 사람들을 풀어 리리의 친부를 찾았다.
남자를 발견한 건 그로부터 사흘 뒤.
“불법 도박장에서 찾았다더라.”
“…….”
“사실을 전해 들은 리리 어머님이 분개하셔서, 퇴원하자마자 얼굴에 돌려차기 시전하고 다시 병원 입원하셨대.”
“혈압, 이 오르셔서?”
“돌려차기하다가 발목 삐어서.”
***
“리리는 내가 지킬 거야!”
아침부터 클라레는 각오가 단단했다.
“나쁜 아저씨! 리리를 슬프게 하다니!”
아침 샌드위치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클라레는 자신의 필살기를 열심히 연마했다.
“설득! 다정! 모자!”
설치기 전에 득달같이 패는 기술, 다구리는 정의, 모두 고자로 만드는 봉인된 필살기를 연마하는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
그리고 필살기 이름을 듣는 레토는 또 두통이 도질 것 같았다.
“쟨 또 왜 저러냐.”
진한 홍차를 우려 마시던 글로리아가 레토를 가리켰다.
“클라레를 아껴서 저래.”
“이젠 좀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하여튼 주책이구만.
적당히 식은 홍차를 마저 마신 글로리아는 비스와 함께 먼저 출근했다.
“클라레.”
이어서 출근하려던 노아는 클라레를 불렀다.
소파 뒤를 주먹으로 콩콩 때리던 클라레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언니?”
“…….”
오늘 하루도 잘 지내라고 말하려던 노아는 잠시 멈칫했다.
‘조심하라고 말해야 할까?’
지금 리리의 친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리리를 노리는 것도 걱정이지만, 그 여파로 리리의 친구들인 클라레나 다른 아이들에게도 애먼 피해가 생길까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죄 없는 아이에게 네가 조심해서 지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싫었다.
어른의 잘못으로 왜 죄 없는 아이들이 조심하며 다녀야 하는지. 노아는 그걸 말해야 하는 이 상황이 참 원망스러웠다.
“…즐겁게 놀아.”
결국 노아는 클라레를 꼭 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언니도 일 잘 다녀와! 형부도!”
“우리 처제도 오늘 하루 재미있게 놀아요.”
“재미있게 노는 건 나의 주특기지!”
어른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레는 마냥 해맑은 미소로 노아와 레토를 배웅했다.
***
“경찰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
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도 무심하지….’
특함 대원들의 아침 회의 중, 새벽에 급하게 들어온 회의 안건 하나가 노아를 괴롭혔다.
바로 불법 조직 폭력 단체 단속과 관련된 경찰 측의 협조 요청이었다.
내용도 심지어 어제 노아가 설마, 설마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최근 수사 중인 조직 폭력 단체가 해상에서 마약을 유통한다는 증언을 확보, 이를 위해 해군 측에 현장 진압 및….”
피스트 준위가 사안을 찬찬히 읽었다.
“…….”
상석에 앉아 이를 듣는 레토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그도 지금 노아와 마찬가지로 속에서 열불이 꽤 나는 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경찰에서 지원을 요청받았습니다.”
요청하는 인원은 1명이었다.
“근데 왜 특함에서까지?”
셀린이 물었다.
“들어보니 특함의 지원까지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확실히 특함 병력까지 나서는 건 좀….”
“저희보단 고속정을 운항하는 부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게….”
다른 대원들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특함은 대규모의 해상 전투를 비롯하여 다양한 해상 특수전을 대비해 만들어진 부대다.
개인함선을 착용한 군인의 전력이 어지간한 중대형 전투함과 맞먹는다.
마약 밀거래 현장을 기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특함이 참여하는 건 과잉 전력이란 의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뜻이 있겠지.”
그때, 아이스 중령이 은근히 협조에 수긍하는 의견을 보였다.
노아는 아이스 중령을 바라봤다.
‘역시 중령님도 아시네.’
그도 아마 리리의 친부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막내딸인 센샤에게 많은 걸 들었을 테니, 이번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마약 밀거래라면, 어지간한 놈들은 아닐 거다.”
불법 무기로 무장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중령의 말에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특함의 지원도 마냥 과잉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리고 해상에서 밀거래가 진행되는 거면 상대측은….”
“제국 출신의 거래상일 가능성이 크겠지.”
레토가 뒷말을 이었다.
“피스트 준위, 이번 밀거래 대상이 누구라고?”
“제국 출신의 중범죄자들로 꾸려진 마약 거래상입니다.”
심지어 노아와 레토가 수도로 출장을 간 사이, 샤프 영지에선 마약 밀거래 현장이 한 번 적발된 적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피스트 준위가 조심히 의견을 말했다.
“최근 수도에서 진행 중인 재판 문제도 있고 하니, 마약 문제에 다들 예민해진 상태입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얼마 전 라디오로 성명을 표하셨으니….”
각 기관에도 경고성 당부가 전해졌을 터.
그렇다면 경찰 측이 이번 사건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좋아.”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그럼 제가 자원하겠습니다.”
노아가 손을 들었다.
***
“벨로 대위.”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아이스 중령이 노아를 불렀다.
“혹시 리리 때문에 자원했나?”
“아니라곤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노아가 쓴웃음을 지어 보이니, 아이스 중령이 내 그럴 줄 알았단 듯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건 중령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아무래도 아내와 딸이 걱정이 많거든.”
아이스 중령 역시 이번 작전에 자원하려 했었다. 하지만 노아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그나저나 대위도 출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안 움직이면 감이 떨어져서 몸이 굳을 겁니다.”
“하여튼 참 부지런하다니까.”
아이스 중령이 대견하단 시선으로 노아를 바라봤다.
“우리 애들도 벨로 대위의 반만 닮았으면….”
“이미 훌륭한 자녀분들이지 않습니까.”
“센샤는 그래도 아직 어리지만, 위에 두 놈은….”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아들놈들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 위로 수색이 짙어졌다.
사무실로 돌아가니, 대원들이 라디오 앞에 쪼르르 모여 있었다.
“노아.”
아스가 말했다.
“지금 막 안보국 전 국장의 1심 재판 판결이 나왔대.”
그 말에 노아가 서둘러 라디오로 다가갔다.
“이 재판, 노아 네가 증언했던 거지?”
셀린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너랑 중장님이 재판에서 증언했다고 아까 말하더라.”
때마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안보국 전 국장의 1심 재판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번 재판의 주요 쟁점은 피고의 횡령에 고의성이 있는지, 그리고 해군을 상대로 간첩 조작 사건을 벌인 의도가 무엇인지였다.
[1심에서 나온 법원의 판결은…]
판결을 들은 대원들이 전부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