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축의금은 아낄 수 있겠네.”
리리가 다행이라며 빵긋 웃었다.
“다들 이거 먹으면서 놀아요.”
아스가 레몬청으로 만든 새콤달콤한 음료수와 수도에서 사 온 쿠키를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한참을 끌어안고 미동도 없던 클라레와 세레니도 서둘러 자리에 합류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이들은 간식을 먹으며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재잘재잘 떠들었다.
뭐가 그리 재미나고 웃긴 건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근데, 너 진짜 감옥 갔어?”
안경 낀 똘똘한 인상의 보르가 클라레에게 물었다.
“카리나가 편지에 썼더라.”
“아오, 고 얄미운 사돈총각 같으니.”
클라레가 음료수를 가글하듯 입 안에서 거품 내며 신경질을 냈다.
“내가 너 언젠가는 감옥 갈 줄 알았지.”
보르는 클라레를 조금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봤다.
“클라레 너, 계속 그렇게 사고치고 다니다간 진짜 쇠고랑 차고 감옥 갈지도 몰라. 거기선 차가운 스프만 준다고.”
“흥! 카리나가 다른 건 안 적었나 보지?”
클라레가 으스대며 수도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했다.
“내가 감옥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아? 왕후 전하가 내가 마음에 든다고 감옥에서 빼내 주셨어.”
“와, 너 벌써 그런 높은 사람이랑 연줄을 만든 거야?”
센샤가 부럽단 듯이 말했다.
“좋겠다. 나도 그런 뒷배 만들고 싶은데.”
“대신 센샤는 오빠가 둘 있잖아.”
리리가 위로하듯 말하자, 센샤가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싫은 티를 팍 냈다.
과자를 다 먹은 아이들은 클라레가 수도에서 사 온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놀았다.
“선생님의 지금 신용도로는 이 이상의 금액은 대출할 수 없습니다.”
“은행원 선생! 이번 대출 심사가 통과되어야 분양받은 저택에 들어갈 수 있어요! 제발 좀 봐주셔요!”
“그러나 이 신용도로는 문제가….”
“흑흑! 이대로 나가면 저와 아이들은 당장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데!”
비극이 가미된 은행 놀이를 하던 중.
“아참.”
대출 못 받아 슬픈 여인 역할에 몰두하던 리리가 클라레를 불렀다.
“클라레.”
“…….”
“클라레.”
“…에이.”
여인을 나락의 수렁으로 빠트리려는 계략남을 연기하기 위해 집중하던 클라레가 투덜거렸다.
“연기 중에는 본명 부르면 안 된다는 게 암묵적인 약속이잖아.”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어.”
“뭔데 그래?”
“우리 엄마랑, 세레니 아빠랑 결혼할 거야.”
클라레가 입을 쩍 벌렸다.
“뭐라고요!”
그런데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스가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폴짝 뛰었다.
손에는 아이들에게 줄 마실 것이 다섯 잔 들려 있었는데, 흔들림에 미동조차 없었다.
일단 마실 것을 받친 쟁반을 근처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리리, 그게 진짜예요?”
아스는 조금 전 들은 것을 한 번 더 물었다.
“리리네 어머니랑, 세레니네 아버지가 결혼해요?”
“응. 그치, 세레니?”
리리의 물음에 세레니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리리네 아줌마가, 전남편이랑 완전히 이혼하면 결혼할 거예요.”
“결국 결혼하시는구나.”
클라레의 그럴 줄 알았단 반응에 아스가 또 한 번 놀랐다.
“아가씨는 알고 있었어요?”
“응. 두 사람 사귀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
“우리 비밀 조직은 정보가 빠르거든요.”
센샤가 자랑했다.
비밀 조직 대원들은 샤프 영지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식 역시 발 빠르게 접하는 중이었다.
“참고로 오늘 정육점에서 돼지 안심 할인한대.”
클라레의 말에 아스가 눈을 반짝였다.
오늘 벨로 저택의 저녁 식사는 돼지 안심 구이와 감자 샐러드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예전에 리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세레니네 아빠도 본 적 있는데, 그때 둘이 뽀뽀하는 거 봤는데.”
보르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우리 아빠보다 세레니네 아저씨가 좋아.”
리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울 아빠는 만날 내 저금통 훔쳐 가고, 엄마를 슬프게 하는걸….”
다시 떠오르는 슬픈 기억에 리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거기다가, 아빠가 계속 집에 찾아와서….”
“리리….”
“괜찮아.”
클라레와 센샤가 그런 리리의 손을 하나씩 꼭 잡아줬다. 세레니와 보르의 표정도 새삼 비장해졌다.
“너무 걱정 마요.”
아스도 리리에게 기운이 날 법한 말을 해 줬다.
“그 사람은 이제 리리를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앞으로 리리는 새 아버지와 새 형제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예요.”
여차하면 자신도 도와주겠다며 아스가 불끈 쥔 주먹을 보여 주며 말했다.
“리리도 알죠? 이 언니가 얼마나 강한지?”
“…응.”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는 리리의 표정에 약간의 안도감이 서렸다.
***
그날 저녁.
“…그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퇴근하고 돌아온 노아와 레토는 이웃사촌들 간의 결혼 소식에 깜짝 놀랐다.
특히 그 대상이 세레니와 리리의 부모님이란 점이 가장 놀라웠다.
“좋은 일이네.”
레토는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결혼은 좋은 거지. 두 분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면 좋겠군.”
“그나저나 리리네 어머님, 정말 큰 결정 하셨네.”
노아가 중얼거렸다.
전남편 때문에 그 고생을 하셨는데,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용기를 내셨다니.
“나 같으면 당분간 결혼은 질색이라고 선을 그었을 텐데.”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어?”
괜히 찔린 레토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스 중령의 여동생이란 사람도 이혼을 다섯 번 했다며.”
“그 언니는 그 정도면 이혼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어.”
“센샤의 고모는 멋쟁이지!”
클라레가 냉큼 끼어들었다.
“나도 나중에 센샤네 고모 같은 자유로운 여자가 되겠어!”
“그러면 세레니랑 결혼했다가 이혼하게?”
“또 세레니랑 결혼하면 되지?”
클라레의 대답에 노아와 레토가 피식거렸다. 저런 엉뚱한 대답이 아직은 애 같구나, 싶어서 괜히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 그 인간은?”
노아가 물었다.
“리리네 친부는? 아직 이혼 소송 중이지 않아?”
“그게 말인데요….”
아스가 낮에 아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 사람, 지금 수배 중이래요.”
별생각 없이 물을 마시던 노아가 냅다 뿜어냈다.
“무지개다! 무지개!”
클라레가 노아의 입에서 뿜어진 분수를 보며 환호했다.
또 보여 달라고 부탁했지만, 사레가 단단히 걸린 노아는 하염없이 콜록거려야만 했다.
“수배라니요?”
놀란 레토가 노아의 등을 두들겨 주며 대신 물었다.
“뭔 죄를 지었답니까?”
“내가 알아, 내가!”
클라레가 손을 번쩍 들었다.
샤프 영지를 수호하는 비밀 조직의 대장이자 조직원으로서, 클라레는 관련 소식을 아주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토는 이런 걸 과연 저 작은 아이가 알고 있어도 될지, 실로 오랜만에 샤프 영지의 가정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어쨌건 클라레가 자신이 아는 걸 재잘재잘 떠들었다.
“리리네 친아빠가, 원래 좀 쓰레기였잖아?”
“쓰레기….”
레토가 따라 웅얼거렸다.
안타깝게도, 어린아이 입에서 저 단어가 나올 정도로, 리리의 친부는 정말 최악의 인간이었다.
도박, 술, 이성 문제. 그 남자는 결혼생활 중에 딸까지 뒀으면서 저 세 가지 문제를 완벽히 만들어 냈다.
“귀책 사유가 워낙 크다 보니, 소송이 저희가 수도에서 지낼 적에 소송이 이미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아스가 말했다.
당연히 리리의 어머니가 소송에서 이겼고, 양육권은 물론이거니와 재산, 자녀교섭권까지 완벽하게 빼앗았다고 한다.
“그런데 재판 중에 리리네 친부가 범죄를 저질렀단 의심 정황이 드러났다고 해요.”
“범죄?”
“깡패래, 깡패.”
클라레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깡패?”
되묻는 노아의 한쪽 눈이 찡그려졌다.
클라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리리랑 아줌마, 세레니네 집에서 지낸대.”
“며칠 전부터 집에 찾아오는 모양이에요.”
“설마 다시 합치자고?”
“그 사정까지는 저도 모르죠.”
“그건 우리 비밀 조직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
클라레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제 비밀 조직의 일원 중 한 명인 리리의 안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일단 저녁부터 먹을까요?”
클라레를 다독이며 식당으로 데려가려는 찰나.
“참, 오늘 큰 주인님과 큰 부군은 밖에서 드시고 오신대요.”
아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노아에게 재빨리 건넸다. 여덟 번 정도 접은 종이 뭉치 하나였다.
그건 아스가 돼지 안심을 할인하는 정육점에 들렀다가 벽에 붙은 것을 떼 온 수배 전단지였다.
“오늘 저녁은 우리 아가씨가 알려 준 할인 정보로 산 돼지 안심이에요.”
“안심 구운 거?”
“감자샐러드도 같이 나온답니다?”
“사과주스! 나는 사과주스도 마실래!”
두 사람이 식당에 먼저 들어간 사이.
“…….”
“…….”
노아와 레토가 종이를 펼쳤다.
거기엔 리리를 닮은 남자의 흑백 사진과 함께, 현재 그가 조사 중 도망으로 수배 중이란 정보가 적혀 있었다.
죄목은 불법 조직 단체의 구성 및 활동이었다.
클라레의 말대로, 리리의 친부는 정말로 깡패였다.
***
“난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거야.”
침대에 누운 레토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갑자기?”
옆에 누웠던 노아가 어처구니없단 시선으로 레토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너 설마….”
슬쩍 상체를 일으킨 노아가 레토의 배를 바라봤다.
“임신했어?”
“내가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듣다니….”
이렇게 귀엽고 멍청할 수가.
레토가 얼 나간 눈으로 아내를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슬쩍 장난스럽게 이불 속 제 배를 두 팔로 감쌌다.
제 농담을 능청스럽게 받아주는 모습이 퍽 웃겼던 노아가 덩달아 레토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잠옷과 얇은 이불자락 위로도 훤히 느껴지는 단단하고 굴곡진 복근이 그의 호흡을 따라 살짝살짝 오르내렸다.
“근데 그런 말은 갑자기 왜 꺼낸 거야?”
“우리 주변에 참 인성 덜 된 아버지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런 것들은 아버지도 아니지.”
“옳으신 말씀.”
레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그는 나중에 자신들의 아이가 태어나면 절대 그런 나쁜 부모가 되지 않겠다는 의미로 그리 말했다.
그 말을 듣던 노아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엔 좋은 아버지가 더 많아.”
당장 비스와 아메타만 해도, 아드벨로를 이끌고 가정을 지키는 훌륭한 아버지들이었다.
“장군님도 멋진 아버지시고.”
노아의 칭찬에 레토가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천천히 사그라졌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린아이가 저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