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한 달 만에 보는 상관들인데도, 특함 대원들은 반가운 내색 하나 없이 무작정 레토를 붙잡고 설명을 요구했다.
“……?”
당연히 레토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 새끼들이 그새 군기가 빠졌군.”
그래서 오랜만에 보는 대원들에게 일단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 속엔 당연히 아미도 있었다.
“중령님,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야 군이 돌아가는 것 같군.”
눈치껏 뒤로 빠져 사태를 관망하던 아이스 중령이 쓰게 웃었다. 그는 어서 오라며 노아를 맞이해 줬다.
“수도에서 사 온 쿠키입니다. 나중에 한 통씩 가져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건 술이 든 초콜릿이고….”
노아가 나눠주려고 가져온 기념품을 설명하는 동안.
“피스트 준위.”
레토는 오랜만에 저의 보좌관을 불렀다.
마찬가지로 눈치껏 빠져 있었던 피스트 준위가 사정을 설명했다.
“어제 아침에 인사 공고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일이지?”
“중장님의 인사 공고입니다.”
그 말에 레토는 물론이고, 아이스 중령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던 노아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아.”
그때.
레토가 기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아….”
그러고는 ‘그거로군.’, ‘그래서 그때…’ 라는 둥, 의미 모를 혼잣말을 연거푸 중얼거렸다.
“…짐작 가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피스트 준위가 물었다.
“대충은.”
레토가 말했다.
“준위, 일단 대장님께 연락해서 방문 일정 좀 잡아 봐. 아마 기다리고 계실 거야.”
“알겠습니다.”
피스트 준위가 사령관실로 들어가고, 레토는 엎드려뻗쳐 중이던 대원들에게 그만 일어나라고 말했다.
“중장님.”
노아가 대원들에게 기념품이 든 종이봉투를 건네주고는 레토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음….”
잠시 말을 아끼던 레토가 입을 열었다.
“가서 볼래?”
레토의 제안대로, 노아는 그와 함께 복도로 나갔다.
“아마, 내 사령관직 중 하나를 반납하란 걸 거야.”
레토의 말대로였다.
복도에 설치된 게시판에는 레토 오케아누스 중장에 대한 인사 공고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그곳엔 레토 오케아누스가 ‘해군 본부 예하 작전사령부’의 사령관직에서 내려온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군.”
그리고 바로 밑에는, 해군 참모차장 자리에서도 내려온다는 공지가 적혀 있었다.
“…대장님과 이미 이야기가 된 사안입니까?”
노아가 물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토록 태연하게 굴 수 없었다.
만약 저 공고대로 진행된다면, 레토는 해군 2인자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좌천이었다.
‘이러니 아까 대원들이 그리 난리를 친 거지.’
그러나 자신의 좌천 소식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레토는 태연하다 못해 심드렁했다.
“…….”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노아의 머릿속에 며칠 전 대화가 떠올랐다. 뜬금없이 은퇴를 선언했던 글로리아의 말이.
‘설마….’
혹시 그것과 관련된 건가, 싶었던 찰나.
“중위도 알겠지만.”
레토가 공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나는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잖아?”
전쟁 영웅이란 이유로 너무 어린 나이에 제독급 장교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해군의 2인자가 되었다.
“2인자는, 뭐, 솔직히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중장님이니까 가능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기엔 난 경험이 너무 부족했잖아.”
냉정하게 따져 보자며 레토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은발을 멀끔하게 넘겨 이마를 드러낸 붉은 눈동자의 훤칠한 미남자는 제 일에서조차 얄밉게 굴었다.
노아는 그게 조금 재수 없으면서도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2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드벨로 대장님 때문이야.”
글로리아 아드벨로.
아드벨로 내에서도 괴짜로 유명한 그녀가 해군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경험 없는 초짜 군인도 2인자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드벨로 대장이 영원히 군에 있을 순 없었다.
“아드벨로 대장님도 나이가 제법 있으시지.”
그렇게 안 보이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서 자주 까먹지만, 글로리아 아드벨로는 정년을 코앞에 둔 상태였다.
즉, 언제 전역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이젠 다음을 생각하셔야지.”
“차기 대장님 말씀입니까?”
“맞아.”
그리고 그 후보군에 레토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리지만, 이 거대한 조직을 이끌 만큼의 경력과 능력은 아직 갖추지 못했어.”
이것만큼은 경력 7년차의 레토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명은 들은 노아는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레토 말대로, 할머니가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행보지.’
해군은 보수적인 집단이다.
이런 곳에서 아직 서른도 안 된 군인이 2인자까지 올라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게 가능했던 건 그만큼 파격적인 성향의 아드벨로 대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물러난다면, 역으로 레토의 입지가 불리해질 수 있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미리 레토의 직위를 가져가려는 것이었다.
“그럼.”
노아가 물었다.
“혹시 계급도 강등되십니까?”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
지은 죄도 없는데.
볼 것을 다 본 두 사람은 다시 특함으로 돌아갔다.
“이왕 중장이 된 거, 전역할 때까지 계속 말년 중장하면 좋겠다.”
“말년 중장….”
“나중에 연금 받을 때 장난 아니겠는데?”
노년에 연금으로 떵떵거리며 먹고 살기 딱 좋지 않으냐며 레토가 씩 웃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라서, 노아는 고개를 절로 끄덕거렸다.
“그러면 다음 대장님은 누가 될지 짐작하십니까?”
노아가 물었다.
“뭐….”
잠시 누군가를 떠올린 레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충은.”
***
“우선, 출장 수고했다.”
참모총장실에 방문한 레토는 아드벨로 대장에게 짧고 간결한 치하를 받았다. 레토는 가볍게 경례했다.
“보고서 이번 주 내로 정리해서 올리도록.”
“알겠습니다.”
“그대들 출장 덕에 지금 나라가 아주 뜨거워.”
“칭찬 감사합니다.”
속이 다 보이는 능청스러운 대화를 주고받기를 잠깐.
“…벨로 대위가.”
레토가 말했다.
“여전히 대장님의 은퇴에 마음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아드벨로 대장이 피식거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아주 아파서 전역하는 줄 알겠어.”
“그만큼 마음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왜? 내가 자기 때문에 은퇴하는 것 같아서?”
레토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조금 전에 게시판에 붙었던 인사 공고를 보고 왔을 때도, 노아는 사정을 대충 들었음에도 표정이 영 편치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은 계속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드벨로 대장이 서명을 마친 서류를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완전히 아니라곤 못 하지.”
“…….”
레토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드벨로 대장의 발언에 내심 놀란 탓이었다.
‘정말 노아 때문에 군을 그만둔다고?’
레토의 이런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아드벨로 대장이 때마침 그에 대한 설명을 해 줬다.
“곧 있을 작전이 무슨 변화를 가져오는지 아냐?”
“모든 것의 마무리, 아닙니까?”
“그럼 노아에게는?”
대장의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던 레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는 그 눈 그대로 아드벨로 대장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아드벨로 대장은 거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노아의 정체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지.”
제국에서 피에타 백작 부부의 시신을 수습해 가져온다는 건, 노아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노아가 제 친부모의 유해가 쓸쓸히 묻히는 걸 지켜보겠어?”
그게 가슴에 가장 커다란 한으로 맺힌 아이인데, 당연히 검은 상복 입고 가장 앞에서 지켜볼 거라며 아드벨로 대장이 말했다.
레토 역시 그 생각에 격렬히 동의했다.
노아라면 죽은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리 행동할 테다.
“그럼 군은….”
“본인은 계속 남고 싶어 하니, 복무하게 해야지.”
“그래서 그만두시는 겁니까?”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고.”
이번에도 아드벨로 대장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쨌건 나도 죄는 지었으니까.”
“무슨 죄를 말씀이십니까? 부모를 잃은 아이를 데려와 입양한 일이 말입니까?”
“적국의 귀족과 내통하여 그들을 왕국으로 밀입국시켰잖아.”
“…….”
적나라한 표현에 레토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까지 큰 죄가 아니라고 말하기엔, 당시 전쟁 중이던 상황과 아드벨로 대장의 입지가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
“네가 듣기에도 큰 죄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은퇴를 결심한 것이었다.
“어차피 노아랑 클라레를 데려오면서 결심했던 일이고, 이제 좀 쉴 때가 됐어.”
오히려 잘되었다며 말하는 아드벨로 대장의 모습엔 거짓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은퇴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레토가 물었다.
“글쎄다.”
아드벨로 대장이 피식 웃었다.
“내가 말이다. 전에 알버스가 네 임관식과 함께 군을 전역했을 때, 참 이해가 안 되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웃기지 않냐? 나도 그 자식 입장이 되니까, 이해가 안 되었던 그 짓을 똑같이 따라 하고 있잖아.”
“…….”
“앞길 창창한 젊은것들을 위해 길을 터 주는 게 늙은것들이 할 일 아니겠냐.”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던 아드벨로 대장은 후회 한 점 없는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얘들아!”
클라레는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다들 잘 지냈어?”
“클라레….”
오랜만에 클라레를 본 세레니는 평소보다 들뜬 표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클라레가 없어서, 조금 심심했어.”
다시 봐서 기쁘다는 세레니의 고백에, 감동한 클라레가 어쩔 줄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힝, 세레니…!”
그러고는 한 달 만에 보는 남자친구를 꼭 끌어안았다.
세레니도 클라레를 꼭 안으며 그간 보지 못해 서운했던 마음을 풀었다.
“아스 언니! 안녕하세요!”
“야, 이제 그만 달라붙고 수도 이야기 좀 해 봐.”
“카리나 편지에 너 감옥 갔다고 적혀 있던데, 진짜야?”
“재밌는 일 있었어? 카리나는 잘 지내?”
그사이에 다른 아이들은 아스에게 인사한 뒤, 거실 테이블에 쪼르르 모여 앉았다.
“어휴, 쟤네 둘이 또 들러붙는다.”
“내버려 둬.”
센샤가 보기 좋은데 왜 그러냐며 보르를 타박했다.
친구들에게 둘의 연애는 유치원 때부터 이어진 거라,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린 그냥 나중에 저 둘이 결혼할 때 축의금을 어느 쪽에다 낼지 고민만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