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우리 똥강아지.”
마중 나온 비스가 인자한 웃음과 함께, 두 팔로 달려오는 클라레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왼팔로 아이를 옮겨 안은 뒤, 오른손으로는 클라레의 뺨을 어루만지며 이마에 입술을 쪽쪽 맞췄다.
“우리 강아지가 할아버지 없는 동안 이렇게 컸나? 할아버지가 그 모습을 못 봐서 너무 서운하네.”
“히히, 할아버지는 잘 지냈어?”
할아버지와 손녀의 다정한 모습은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물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고 얼굴 근육이 사르르 풀리는 풍경이었다.
“와우.”
아미도 그중 한 명이었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감탄도 섞여 있었다.
“우리 비서실장님, 저 묵직한 애를 한 팔로 지탱하네.”
어제 기차에서 클라레 한 번 업었다가 허리가 고이 접힐 뻔했던 아미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괜히 해군이겠어?”
노아는 자주 보던 모습이라 덤덤했다.
“체력은 우리 중에서 가장 좋을지도 몰라.”
“어? 중장님보다?”
깜짝 놀란 아미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둘이 가끔 주말에 새벽 운동하고 그래. 레토도 그때마다 할아버지가 장군님이랑 비슷하다고 말하는걸?”
“솔직히 놀랍긴 하더라.”
레토가 멈췄던 수레를 다시 끌며 말했다.
“듣기로는 젊은 시절에 상당히 유명하셨다던데.”
“뭐로 말입니까?”
아미의 질문에 레토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성질 더러운 대장님을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 많은 군인이 존경하고 감사해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비스 비서실장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비스 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해군 본부에서 그의 신상과 과거 이력을 전부 비공개 처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현역 못지않은 그의 단련된 신체가 과거를 얼추 짐작케 했다.
그래서 레토도 마냥 짐작만 해 볼 뿐이었다.
‘아마 특수부대….’
혹은 그에 준하는 전투부대 출신인 건 분명했다.
“너희들도 어서 오너라.”
비스는 뒤이어 다 큰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짐이 많네.”
그가 손주들이 가지고 온 짐들을 스윽 훑었다.
수도에서 한 달을 지낸 탓에 처음 갔을 때보다 짐이 몇 배로 늘었다.
노아는 슬쩍 걱정이었다.
“차에 다 들어가려나?”
“너무 걱정하지 말렴.”
이럴 줄 알고 딱 알맞은 차를 준비했다면서, 비스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손주들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갔다.
“짠.”
비스가 차 앞에 섰다.
“짐 싣기에는 이것만 한 게 없지.”
평소 몰고 다니는 검은색 고급형 마동력차가 아니라, 때가 제법 탄 하얀색 용달 마동력차였다.
많은 짐을 싣고 달리면 바큇자국이 선명하게 남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 차의 이름은 ‘트라메스’였다.
“와, 트럭이다!”
하지만 클라레가 방금 외친 트럭이란 줄임말로 더 유명했다.
“이걸 끌고 왔다고?”
트럭을 본 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우리도 여기에 타라고?”
“나 탈래! 내가 뒤에 탈래!”
클라레가 노아의 앞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외쳤다.
“사람이 뒤에 타는 건 교통법 위반 아닙니까?”
흥분한 처제를 진정시키며 레토가 물었다.
일단 위험한 건 둘째치고, 군인이 교통법을 위반하는 건 상당히 부끄러운 짓이었다.
“누가 태운다니.”
비스가 싱긋 웃었다.
우선 트렁크에 짐부터 실었다. 많은 짐도 어른 다섯이 옮기니 순식간에 끝났다.
“이렇게 트렁크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는 아스랑 클라레가 탄 뒤에….”
비스가 운전석에 오르며 말했다.
“…나머지는 버스 타고 오면 되지.”
운전석 창을 내린 비스가 황망한 표정으로 남겨진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 컸는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래도 혹시 몰라서, 노아의 손에 버스비도 쥐여 줬다.
아스는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냉큼 조수석에 올랐다.
“미안해서 어쩌나. 먼저 가 볼게요.”
“언니, 올 때 아이스크림 사 와!”
먼저 출발하는 클라레가 손을 방방 흔들었다.
떠나가는 트럭을 바라보던 노아는, 그제야 자신들이 집으로 돌아왔단 사실을 여실히 실감했다.
***
“할머니!”
“우리 똥강아지!”
그날 저녁.
퇴근한 글로리아는 한 달 만에 보는 손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가 이제야 집에 왔어? 할미 안 보고 싶었어? 할미는 울 강아지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나두우우.”
클라레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힝, 나도 할머니가 보고 싶었어어.”
“하여튼 요 예쁜 것!”
오랜만에 보는 손주의 애교에 글로리아가 헤벌쭉 웃더니 이내 뽀뽀 세례를 연거푸 쪽쪽 내렸다.
쉴 틈 없는 뽀뽀에 클라레가 자지러지는 웃음을 지었다.
“우리 큰 강아지도 이리 와.”
글로리아는 뒤에서 지켜보던 노아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다행히 노아에겐 아까처럼 심한 애정 표현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주어 꼭 끌어안는 팔과 안색을 살피는 표정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노아도 글로리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할머니, 잘 지냈어요?”
“일복 하난 제대로 터졌어.”
무슨 뜻인지 알지?
의뭉스러운 글로리아의 미소에 노아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너희도 안아 줄까?”
글로리아가 뒤에 보이는 레토와 아미에게 물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퉁명스럽게 바라보던 글로리아가 슬쩍 미끼를 던졌다.
“…한 번 안기면 10피나.”
“할머니잉!”
아미가 냉큼 달려가 글로리아의 앞에 섰다.
“할머니 잘 지내쪄? 아미눙 할미가 넘 보고시퍼쪄!”
“으으…!”
클라레가 입술을 삼각형 모양으로 삐죽였다.
아주 불쾌한 것을 본 것처럼 찌푸린 인상은 결코 어린이의 것이 아니었다.
“저 언니가 미쳤나 봐.”
끝내 못된 말까지 써 버렸다.
그런 말 쓰면 안 된다고 노아가 엄히 타일렀지만, 10피나에 영혼을 팔아 버린 아미를 향한 그녀의 시선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중위….”
마찬가지로 레토 역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야 집이 좀 집 같네.”
글로리아는 시끌벅적해진 집안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한 달 동안 조용했던 집안 분위기가 내심 적적했었다.
“할머니도 나 많이 보고 싶었구나?”
소파에 앉은 글로리아 곁으로 다가온 클라레가 씩 웃었다.
“역시 내가 없으니 집이 재미없지?”
“울 똥강아지 없으니 너무 재미없더라.”
“있잖아, 그래서 할머니 주려고 선물 사 왔다?”
“그래? 그러면 안 볼 수가 없겠는데?”
“기다려 봐! 다 가지고 올게!”
“그럼 저도 같이 갈까요?”
클라레가 아스와 함께 방으로 올라간 뒤.
“…금방 온 너희한테 할 말이 아닌 건 아는데.”
웃음을 싹 거둔 글로리아가 노아와 레토, 아미에게 말했다.
“아마, 두 달 뒤엔 결정이 날 거다.”
두 달 뒤.
그 기간 안에, 지금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 재판의 대부분이 1, 2차 공판을 마친다.
그때 즈음이면 흥분한 민심도 아주 조금은 가라앉을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요즘 시대에, 안타깝게도 한 가지 사건만 붙들고 계속 화를 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러니 그즈음에 빠르고 은밀하게 진행할 것이다.
“…….”
노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지금 글로리아는 앞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큰, 어떤 ‘작전’ 하나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아는 그 작전의 내용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국 잠입, 말씀입니까?”
레토가 띄운 운을, 글로리아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아….”
아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진짜 힘들겠네.”
제국으로 잠입한다는 말만 들어도 고생이 눈에 훤했다.
현재 아들라보르 왕국과 시스토 제국은 최소한의 공무역을 제외하면 교류가 철저히 규제되는 상황이다.
왕국 내에서 제국의 평판이 좋지 않듯, 제국에서도 왕국에 대한 평판은 그리 좋지 않다.
그런 곳에 잠입하여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건 정말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힘들기만 하면 다행….”
“글로리아.”
글로리아가 더 말하려던 것을, 비스가 조용히 끼어들어 막았다.
“…….”
눈이 마주친 글로리아가 입술을 이리저리 삐죽이곤 이내 알겠단 듯이 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레토가 노아의 굳은 어깨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너무 성급하게 생각 말자.”
“응.”
노아는 제 어깨 위에 놓인 든든한 손을 꼭 쥐었다.
우습게도, 그 손을 쥐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뭐, 일단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한결 편안해진 노아의 얼굴을 확인한 글로리아가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난 은퇴할 거야.”
느닷없는 은퇴 예고에 비스를 제외한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할머니, 그게 무슨…!”
“할머니!”
노아가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찰나.
“이것 봐라? 수도에서만 파는 과자랑….”
작은 팔 가득 선물을 들고 온 클라레가 거실의 기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곤 말을 멈췄다.
그러곤 홀로 벌떡 일어서 있는 노아를 바라봤다.
“언니?”
“잠시 일 이야기를 한 거야.”
별일 아니니 괜찮다며, 노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리 오라 불렀다.
그제야 클라레가 안심한 얼굴로 쪼르르 다가갔다.
“아이참, 일 이야기는 집에서 하면 안 되지.”
“언니가 잠깐 까먹었어.”
“언니랑 어른들은 일 이야기만 하면, 표정이 이렇게 굳어져.”
클라레가 조금 전 노아가 지었던 표정을 흉내 내며 말했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굳은 눈매와 삐뚜름한 표정이 제법 닮아 있었다.
“참, 이거 봐!”
클라레가 모두에게 이거 좀 보라며 가지고 온 과자와 장난감을 자랑했다.
“이걸 우리 강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 선물해 주려고 가져온 거야?”
비스의 말에 클라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거 너무 맛있는 거라서, 조금 망설여지네?”
“선물로 주는 게?”
“웅….”
“하하하! 이 욕심쟁이.”
클라레의 엉뚱함 덕분에 글로리아의 은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묻혔다.
하지만 노아의 머릿속에는 글로리아의 목소리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
글로리아는 그 뒤로 제 은퇴에 관한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구태여 다시 묻거나 하진 않았다.
아미는 그사이에 해군 관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노아와 레토도 다음 날에 해군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맞이한 건 특함 대원들의 반가운 인사가 아니었다.
“중장님!”
“중장님 혹시 게시판에 붙은 인사 공지 보셨습니까?”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