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라디오를 통해 전해진 국방부의 육군 수색 중간 결과 발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발표가 끝난 바로 다음에 이어진 국왕의 성명이 기름을 더욱 부었다.
국왕은 본 사안을 아주 심각하게 여기고 있으며, 이 사태를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당연히 대중들은 크게 분노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육군의 범죄 행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들은 끝내 엄벌을 촉구하는 시위까지 열었다.
특히 중립 구역인 피니치 지역에서 불법 전투를 일으키고 죄 없는 군인들을 죽인 디모네 닉스의 만행에 큰 충격을 받았다.
유명한 사설 평론가는 이번 사태가 7년 전 발발한 전쟁 이후로 가장 심각한 정치 및 외교 문제라고 언급했다.
그만큼 수도, 아니 나라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하나 이게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와아, 짐 봐라.”
이사 가는 줄 알겠네.
아미가 혀를 내두르며 자신들의 짐을 바라봤다.
산더미 같은 짐을 기차 역무원들이 특등실 칸으로 하나하나 옮겨 주고 있었다.
“저거 다 내 거다?”
옆에 있던 클라레가 으스댔다.
“요 부러운 녀석….”
나도 저게 다 내 거면 좋겠네.
아미는 괜히 클라레의 등에 매달린 식칼토끼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클라레는 만지지 말라며 몸을 부르르 흔들었다.
“그럼 조심히들 가거라.”
배웅 나온 아메타가 말했다.
드디어 오늘, 길다면 긴 한 달간의 수도 출장을 끝마치고 남부 샤프 영지로 복귀하는 날이었다.
“아빠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클라레가 아메타의 다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 말에 감동한 아메타가 훌쩍였다.
“그치만 아빠는 일이 있어서 못 가….”
“그럴 거면 왜 물어보는 거지?”
슬쩍 몸을 뗀 클라레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아메타를 얄궂게 노려봤다.
“딸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우리 클라레가 여기 남아 주면 안 될까?”
“응. 그건 안 돼.”
나도 내 삶이 있거든.
야무지게 돌아선 클라레는 레토에게 얼른 이리 오란 듯이 손짓했다.
레토는 웃음을 참으며 어린 처제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럼 아빠 안녕!”
“가기 전에 뽀뽀 한 번 해 주라! 뽀뽀 한 번만!”
“어휴, 아까 차에서도 해 줬는데.”
옛다, 하는 마음으로 클라레는 아메타의 볼에 2초 정도 뽀뽀를해 줬다.
“…그래도 아직은 아빠가 좋지? 형부보다 아빠가 좋지?”
“어.”
클라레가 오동통한 다리를 흔들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만 가도 될까?”
쭉 지켜보던 노아가 조금 지친 표정으로 물었다.
“주인 부군, 식사 꼭 챙겨 드세요.”
“뵈어서 기뻤습니다. 조심히 지내십시오.”
“밤새우지 말고. 알았지, 아빠?”
“그래, 그래.”
아메타는 기차에 오르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네에에에!”
클라레의 술 취한 아저씨 같은 걸쭉한 노래와 함께, 남부 샤프 행 급행열차가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출발했다.
“와, 특등실!”
아미는 눈 앞에 펼쳐진 호화스러운 특등실 내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아미는 2층 침대가 설치된 침실을 발견했다.
“나 침실 골라도 돼? 여기 2층 침대 내 거!”
“이잉! 내 거야아!”
“에헤! 내가 먼저 골랐지!”
사다리 타고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간 아미가 메롱메롱 혀를 내밀며 저보다 한참 어린 동생을 놀렸다.
“이익!”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던 클라레가 비장의 무기를 소환했다.
“형부! 아미 언니가 나잇값 못하고 나 놀려!”
“너 치사하게!”
“중위. 내려와라.”
침실 밖에서 부르는 묵직한 호출에, 아미가 피눈물을 삼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결국, 영민하게 2층 침대를 차지한 클라레는 세상 얄미운 히죽거림으로 아미의 속을 박박 긁었다.
“…응?”
그러던 중, 문득 이상함을 눈치챈 클라레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는 사돈 어르신이랑 같이 안 가?”
“이런.”
상황을 살피러 온 레토가 물었다.
“카리나가 없어서 섭섭해요?”
“으으응.”
클라레의 단호한 대답에 도리어 레토가 섭섭해졌다.
“우리 처제, 너무 단호한걸?”
“난 원래 없는 사람 찾지 않는 주자거든요.”
“주자가 아니고 주의.”
“그거나 이거나!”
“그래도 카리나랑 많이 친해졌죠?”
내심 카리나와 사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길 바랐던지라, 레토는 두 아이가 자주 만나서 놀았단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아오, 걔 진짜!”
그러자 갑자기 클라레가 씩씩거렸다.
깜짝 놀란 레토가 황급히 클라레를 바닥에 내려줬다.
클라레는 냅다 바닥을 발로 콩콩 두드리며 화를 냈다.
“고 얄미운 게!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옆에서 계속 취업 제대로 못 할 거라고, 빨간 줄 있으면 대출 심사도 어렵다고 잔소리를!”
카리나에게 맺힌 게 제법 있었는지, 클라레는 줄곧 속에 담았던 걸 전부 토해 냈다.
“그리고 내가 뭐만 하면 계속 자기 엄마 부르고! 할아버지 부르고! 고자질쟁이야, 아주 그냥!”
“그럼 너도 나나 아스를 부르지 그랬어.”
소파에 앉아 창가 풍경을 느긋이 구경하던 노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언니랑 아스랑 형부가 나 두고 일하러 갔잖아!”
클라레가 고양이 하악질 하듯 분노했다.
하필 또 그때가 클라레의 보호자들이 비밀 작전으로 며칠 자리를 비웠던 시기와 겹쳤다.
“…미안.”
노아는 서둘러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일찌감치 눈치껏 입다물고 있었던 아스는 아예 매점으로 도망쳤다.
“하여튼 두고 봐라! 나도 가서 리리한테 다 이를 거야.”
“…리리?”
처제의 분노에 입 다물고 있던 레토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상당히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아.”
클라레의 비밀 조직에 소속된 여자아이는 두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인 센샤는 아이스 중령의 막내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리리였다.
얌전하고 상냥한 인상의 아이.
그리고 엄청난 개차반인 남자를 부친으로 둬서 유명했던 아이.
“나 저런 거 알아! 리리네 엄마가 가르쳐줬는데, 저런 남자를 ‘개차반’이라고…!”
클라레가 레토를 처음 본 날에도 분명 그리 말했었다.
“그런데 왜 리리한테?”
“카리나가 리리를 좋아하거든요.”
레토가 입을 쩍 벌렸다.
“오.”
클라레는 레토의 입에 손가락을 슬쩍 넣었다가 빼기를 몇 번 반복하곤, 나 몰라라 하며 가 버렸다.
“아스! 어디 갔다 왔어?”
“매점에요. 여기서 파는 오렌지 주스랑 감자 과자가 맛있잖아요?”
“내 것도 사 왔지? 응?”
“당연하죠.”
“이잉, 역시 아스가 최고야앙!”
클라레가 눈 깜빡이며 귀여운 목소리로 찡찡거렸다. 어깨를 살살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치만 난 역시 아스가 만들어주는 요리가 좋아.”
“어휴, 하여튼 입이 고급이시라니까.”
기분이 잔뜩 좋아진 아스가 호호 웃으며 클라레의 입에 감자 과자를 먹여 줬다.
“…여우짓만 늘어서.”
지켜보던 노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애가 자랄수록 능글맞고 처세술만 늘어나는 것 같았다.
‘레토한테 배우는 거 같단 말이지….’
하지만 저렇게 과자 먹으면서 소풍 가는 기분이라고 해벌쭉거리는 모습을 보면, 아직 애는 애구나 싶었다.
“너도 그만 정신 차려.”
노아가 여전히 굳은 채로 있는 레토에게 다가갔다.
“노아….”
“응?”
“카리나가 좋아하는 아이가 있대.”
“하여튼 요즘 아이들 진짜 조숙해.”
“지금이라도 그 아이의 부친을 제거하는 게 좋을까?”
“…네가 나설 일은 없을걸?”
이미 리리네 엄마가 조지고 있을 거야.
벌써 성급하게 구는 남편을 진정시키며, 노아는 과자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어느새 아미도 함께 과자를 먹고 있었다.
“이것 봐라, 오리 부리!”
아미는 과자 두 개를 집어 들어 입에 물었다. 그걸 본 클라레가 눈을 반짝거렸다.
“와! 그거 어떻게 한 거야?”
“가르쳐 줄까? 이렇게 과자 두 개를….”
“아미 언니는 이런 걸 잘 알아서 재미있고 좋아.”
“이런 게 뭔데? 재밌는 거?”
“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유치하고 이상한 거.”
“…너 그거 욕이었냐?”
실망한 아미는 오렌지 주스를 술처럼 벌컥 들이켰다.
“우웅, 으으 웅!”
언니, 이거 봐!
오리 부리를 만든 클라레가 노아에게 자랑했다. 아스는 그 모습을 사진기로 빠르게 찍었다.
“…좋네.”
시끌벅적한 순간을 바라보는 레토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뭐가 좋은데?”
오리 부리 놀이하다가 과자를 흘린 클라레의 입가를 털어 주던 노아가 레토를 바라봤다.
레토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평화롭잖아.”
집으로 돌아가는 기찻길.
이 순간만큼은 머리 아픈 사건도, 잔인한 진실도, 앞으로 닥칠 역경과 고난이 감히 끼어들 틈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의 축복만이 가득했다.
이 순간이 오래도록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 군인이 목숨을 걸고 나라의 평화를 지키는 이유일 터였다.
‘그러니 그자는….’
이제 더는 디모네 닉스가 전처럼 무섭지 않아진 레토가 약간의 용기를 내어 그들의 미래를 저주했다.
그러니 부디.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은 그자의 말로가 끔찍하기를.
***
이틀을 꼬박 달린 급행열차의 마지막 종착지는 샤프 역이었다.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들 사이로, 벨로 일행도 무거운 짐을 역무원이 빌려준 수레에 싣고 역내를 이동했다.
클라레는 짐가방을 쌓은 수레 위에 앉은 채로 홀로 편안하게 이동 중이었다.
“…확실히 수도보다는 덥네요.”
아스가 손부채질로 얼굴에 후끈 들러붙는 남부의 열기를 떨쳐냈다.
옆에 있던 노아도 목깃을 펄럭이며 오랜만에 느끼는 남부의 더위에 적잖게 놀라는 중이었다.
“그래도 더위가 거의 다 가셨을 때 와서 다행이다, 그치?”
“하긴 그래요. 그래도 여름은 또 더운 맛이 있어야죠.”
“난 시원한 게 좋아.”
아미는 출장 중에 제때 자르지 못한 앞머리를 입김으로 후 불었다. 그새 끈적이는 땀 때문에 머리칼이 이마에 들러붙었다.
“그런데….”
역 입구에 가까워지자, 레토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인파 속을 두리번거리던 레토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처제.”
레토가 자신이 끄는 수레에 앉은 클라레를 불렀다.
“저기 보세요.”
그는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클라레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유독 시선이 가는 남자가 있었다.
“할아버지!”
수레에서 폴짝 뛰어내린 클라레가 우다다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