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늘 바랐던 순간인데, 왜 이리 싱숭생숭한 걸까.”
“편안한 여정은 아닐 테니까.”
레토는 어쭙잖은 위로는 건네지 않았다. 그런다고 노아가 앞으로 해내야 할 일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나도 같이 있을 거야.”
대신, 그 옆에 자신도 함께 있을 거란 사실을 분명히 상기시켰다.
노아는 고맙단 듯이 눈웃음을 살짝 지었다. 술이 약간 들어가 붉어진 뺨도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나 마음속은 여전히 진흙처럼 질척거렸다.
“…불안해.”
노아가 솔직히 말했다.
“어떤 게?”
레토가 물었다.
노아는 그런 남편을 한 번 힐끔거리고는, 애먼 술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냥, 다.”
“…….”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다.
아드벨로의 도움으로 클라레와 함께 바다를 건널 때, 노아는 점점 멀어지는 제국을 보며 다짐했다.
반드시 다시 돌아가서,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가문의 억울함을 풀겠노라고.
저와 클라레의 행복을 빼앗은 배신자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겠노라고.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많은 것이 걱정되고 두려웠다.
“제국에 무사히 잠입할 수 있을지, 괜히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는 않을지….”
그중에서도 가장 무섭고 떨리는 건.
“…부모님을 보는 게, 무서워.”
자그마치 7년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갓난쟁이가 씩씩한 어린이로 자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남아 있는 게, 뼈밖에 없잖아.”
노아는 그런 부모님을 보는 게 너무 무서웠다.
기억 속 부모님은 항상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부신 금발, 어머니의 푸르른 눈동자, 혈색 좋은 피부와 아름다운 미소.
하물며 마지막 모습조차 온전한 사람의 형태였는데.
“그걸 직접 봐야 하는 게, 무서워….”
“…….”
레토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노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저 묵묵히, 제 어깨에 기대어 소리 죽여 우는 노아가 조금이라도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었을 때.
“…처제한테는.”
레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 가서 부모님을 모셔 오면, 처제에게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지….”
노아는 코를 작게 훌쩍이며 대답했다.
“사실, 그것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이야.”
“처제는 똑똑하고 현명한 아이잖아.”
미리 걱정을 사서 할 필요는 없다고 레토가 말했다.
“오히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처제가 되레 눈치를 살피고 겁을 먹을지 몰라.”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레토의 말에, 노아가 젖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바라봤다.
덩달아 의아해진 레토도 따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뭐 이상한 말 했어?”
머쓱하게 웃으며 묻자, 노아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 모습이 클라레와 똑같아서 레토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노아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처음으로 네가 나보다 연상처럼 보였어.”
“네 곁에서 난 항상 연상이었는데?”
“그러니까 그걸 처음으로 실감했어.”
“부인께서 절 평소에 어떻게 여기셨는지 잘 알았습니다.”
토라진 마음을 담아, 레토는 노아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간질간질한 애정 표현에 노아가 키득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미 단단한 두 팔에 가둬져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잘못했어!
결국 노아가 웃느라 아픈 배를 부여잡고 항복을 선언했다.
흥분한 호흡을 그제야 느리게 가다듬는 사이, 레토는 노아의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정리해 줬다.
“아, 배 아파….”
“너 아까 너무 웃더라.”
“그래도 좀 편해졌어.”
“그럼 다행이고.”
삐져나온 금발을 귀 뒤로 넘기던 레토가 노아의 목덜미에 한 번 더 입술을 쪽 맞췄다.
그리고 살갗을 빨 듯이 힘을 살짝 실었다.
깜짝 놀란 노아가 몸을 움찔했지만, 구태여 레토를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내긴커녕, 도리어 제 허리를 아직도 감싸고 있는 팔을 꼭 쥐었다.
“노아.”
레토는 목에서 입술을 살짝 떨어트린 채로 말했다.
“상투적인 말일지도 모르지만….”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러니까, 넌 혼자가 아니잖아.”
7년 전의 노아는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와 나눌 여유가 없었다.
저를 두고 빠르게 변해 버리는 많은 상황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테니.
그리고 많은 것을 홀로 견디어야 했다.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고, 이제 겨우 생후 한 달을 넘긴 어린 여동생과 단둘이 남게 된 14살 소녀.
너무도 어린 나이였건만, 소녀는 너무도 빨리 어른이 되어 버렸다.
레토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함께 당직을 서던 제게 친부모님에 대한 비밀의 일부를 털어놓았던 노아를.
부모님이 잠든 제국이 있는 바다 너머를 바라보던 그녀는 감정의 동요를 딱히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레토는 알 수 있었다.
그 담담한 표정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과 그리움을 참고 견뎌야 했는지.
“장하네.”
그래서 레토는 버텨 온 노아에게 최고의 찬사를 건넸다.
“역시 장해.”
자신의 추악한 비밀을 고백했던 날, 그녀가 저를 장하다고 대견스럽게 여겨 준 것처럼.
“내 아내는 이렇게 장하고 멋지네.”
“…….”
“그러니까 이제는 그 짐을 나한테 조금은 넘겨주라.”
넌 충분히 잘했어.
레토는 제게 더욱 기대는 노아의 등을 끌어안았다.
“제국에 갈 때, 근사하게 차려입고 가야겠다. 그래야 부모님께 잘 보일 거 아니야.”
정장을 입을지, 아니면 해군 제복을 입을지.
머리는 넘기는 편이 좋을지.
“이렇게 훌륭한 따님을 낳아 주고 길러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도 드려야 하는데….”
“…….”
“술도 한 병 가져가지. 에반젤리움이었나? 그때 바다에 뿌렸던 포도주 말이야.”
레토는 주절주절, 혼잣말을 계속 떠들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그가 하염없이 중얼거리는 건, 제 품에 숨어 울음을 끅끅 흐느끼는 노아를 위해서였다.
“…아.”
그러고 보니.
레토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짧은 감탄에 노아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벅벅 닦는 모습도, 역시 클라레와 판박이었다.
“왜…?”
“아니, 갑자기 생각난 건데.”
레토가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는 노아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네가 우는 걸 처음 보는 거 같아서.”
“그런가….”
노아는 괜한 사실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레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생각해 보니 처음은 아닌가?”
그러고는 노아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무얼 들었는지 몰라도, 얼굴이 시뻘게진 노아는 냅다 레토의 은발을 한 움큼 쥐어 잡곤 마구 흔들어 댔다.
“이 자식이 또 분위기 안 읽고!”
“아야, 아픈데.”
“하여튼 그 능글맞은 주둥이가 요새 잠잠하더라 했지!”
노아에게 머리채를 붙잡혔는데도, 레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하 웃어 댔다.
결국 노아도 피식거리더니 이내 따라 웃었다.
“정말….”
화가 나긴커녕 도리어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졌다.
“너랑 있으면, 정말 지겨울 틈이 없어.”
어깨에 얹어진 슬픔과 괴로움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노아의 짐을 함께 짊어진 레토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호구가 되도록 해 주겠다고.”
“…호구는 빼지 그랬냐.”
“나도 너만의 호구인데, 뭐 어때.”
서로 호구 하면 좋지.
그렇지 않으냐고 묻는 레토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노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썩 듣기 좋은 말인지라, 마지막엔 늘 그러했듯 빙긋 웃었다.
***
어느새 수도에서 지내는 마지막 한 주가 찾아왔다.
기실 출장 기간 중, 가장 ‘출장’다운 한 주였다.
노아와 레토는 매일 법원에 출석했다.
한 주 내내 열리는 재판마다 증언을 서야 했고, 필요할 땐 검사 측과 만나 정보를 교환해야 했다.
락소는 아티와 함께 황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아미는 아드벨로 저택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성력의 부작용을 조사했다.
“알아낸 거 있어?”
재판에서 돌아온 노아가 도서관에 들러 물었다.
“그닥.”
손을 휘젓는 아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미가 앉은 자리를 주위로 수많은 책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전부 신성청이나 성력과 관련된 책이었다.
“아드벨로라서 나름 괜찮은 책들은 많은데, 결국 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 그치네.”
그것도 엄청 대단한 거라고 말하는 아미는 찰나였지만 진짜 성녀처럼 보였다.
“그럼 소득이 아예 없어?”
“소득이 아예 없진 않은데….”
아미가 마침 제 다리 위에 올려 뒀던 책을 노아에게 보여 줬다.
거기에는 성력의 부작용에 대해 적혀 있었다.
“성력의 부작용은 보통 성력으로 무엇을 저질렀느냐에 따라 갈라진대.”
“예를 들면?”
“만약 성력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면, 시전자 역시 육체에 피해를 입는 부작용을 겪는대.”
요컨대, 성력으로 지은 죄와 똑같은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받는다고.
“할머니가 좋아할 만한 부작용이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노아는 남부에 있을 글로리아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나도 이 가설이랑 같은 의견이야. 내가 여태 본 성력의 부작용들도 이랬거든.”
“그럼 디모네 닉스의 저주는….”
“아마 정신 계통과 관련된 고통일 거야. 일단 시작은 사람의 정신을 조종했던 거니까.”
부작용이 저주로까지 발전한 걸 보면, 세뇌시킨 사람들로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탓일 테다.
거기다 법원에서 봤던 디모네 닉스는 멀쩡한 상태로 걷기까지 했다.
그러니 육체가 아닌 정신에 타격을 주는 부작용이 거의 확실시됐다.
“성왕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 변태는 몸이 약한 거 아니었어?”
노아가 물었다.
“할머니가 말했는데, 마탑에 활력을 증진시키는 약을 주문했다고 하던데.”
“그건 그냥 오래 살려고 지랄했던 거 아냐?”
아미가 신랄하게 비꼬았다.
“내가 말했잖아. 그래도 꼴에 성왕이라고.”
저주를 성력으로 정화할 순 없지만, 성녀의 성력을 빼앗는 것으로 나름 버티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녀가 완전히 사라진 뒤엔 오롯이 제힘으로만 견디어야 했으니 체력 소모가 심했을 테다.
하나 그 역시 한계가 도달하여, 끝내 가사 상태에 드는 걸 선택했을 것이라는 게 아미의 의견이었다.
“어쩌면 말이지….”
아미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