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아티가 이 마약을 알고 있었음에도, 곧장 떠올리지 못했던 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리 매제가 말한 대로, 이건 전쟁 중에 연합국 측 군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마약이야.”
전쟁 이후엔 제국과의 무역이 대폭 축소되고, 간첩들의 유일한 출입구인 남부 해역은 해군의 살벌한 감시로 진입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국내엔 이 마약이 발견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약 이름이 아마 ‘피아’였을 거야.”
“피아….”
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피아’는 제국어로 충성과 명예를 뜻해.”
이름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마약은 제국을 비롯한 연합국 측에서 고의로 공급한 물건이란 것을.
전쟁으로 지치고 피폐해져 갈 군인들의 정신을 붙잡기 위해서.
“하지만….”
아미가 이의를 제기했다.
“전쟁 중에는 보통 담배 같은 각성제 종류를 보급하지 않나요?”
“그건 그래.”
노아도 동의했다.
“아까 풀루스 대위의 눈을 보면 각성보단 이완제 쪽 약물 중독 증상에 가까웠잖아.”
“보통은 그렇지.”
그 의문에 대해선 아티가 설명해 줬다.
“물론 성격을 따지자면 이건 이완제 계통의 마약이야. 불안감을 없애 주고 마음을 진정시켜 주니까.”
“그런데 왜….”
“왜 불안감이 없어지고, 마음이 진정되겠어.”
아티의 말투는 조롱에 가까웠다.
이 마약을 군인에게 지급한 연합국을 향한 조롱.
“자기 주관을 없애 버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주도성이 점점 사라지니, 위에서 내리는 명령만 따르는 복종만 남게 된다.
“그런 의미에선 세뇌마법보다 잔인하다고 생각해.”
적어도 세뇌마법은 시전자가 내린 명령이 발동되지만 않으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 마약은 조금씩 사람의 주체성을 갉아 먹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명령에 복종하는 인형이 되고 만다.
“…잘 아시는군요.”
레토의 감탄에 아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매제가 전쟁에서 목격했다면, 당연히 할머니한테도 보고가 가지 않았을까? 그때 그 마약 성분을 분석한 게 마탑이었으니까.”
아티는 당시 마탑에서 아버지를 보조하던 연구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럼, 검사가 우선이군요.”
레토가 말했다.
아직 풀루스 대위가 약물에 중독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나눈 대화는 전부 추측에서 비롯된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
“오빠, 확인까지 얼마나 걸려?”
노아가 물었다.
보아하니 저 ‘피아’라는 마약은 일반 검사론 추출되지 않는 위험 약물인 모양이었다.
천하의 아티도 레토의 말을 듣고 나서야 떠올릴 정도니, 마탑 전문가가 직접 와야 할 문제가 분명했다.
“일단 국왕에게 보고하면 바로 마탑에 연락이 가겠지. 약과 관련된 문제니까 아버지가 오시지 않겠어?”
마탑에서 약물과 관련된 분야는 아메타 아드벨로가 1인자였다.
“아니, 그러면….”
묵묵히 듣던 아미가 한 번 더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 마탑에서 조사 중인 시체에 있던 세뇌마법 흔적은 누구 짓이야?”
***
아드벨로 저택에 도착한 노아는 곧장 마탑에 전화했다.
그 사이, 아티는 락소를 찾았다.
“정보상, 잘 지냈나?”
“…….”
손님방 책상에 앉아 있었던 락소는 아티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예고 없는 방문에 놀란 것도 있지만, 그를 만나니 피니치 구역에서 고생한 것들이 떠오르면서 절로 거부감이 들었다.
“아무리 나라도 그런 표정은 좀 섭섭한데.”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그리 상처 입지도 않았어.”
오히려 재밌었다며 히죽거리던 아티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우리 정보상, 철저한걸?”
미리 준비해 뒀나 봐?
문 옆에는 락소가 챙긴 짐가방이 놓여 있었다.
“준비성 철저한 건 참 마음에 드는군.”
“만약 오늘까지 안 왔다면, 그대로 저녁에 남부행 기차를 타려고 했습니다.”
“오늘까지 날 기다린 걸 보니 알아낸 게 있나 보네.”
“…….”
락소는 대꾸하는 걸 멈췄다.
이상하게도 아티와 말을 나누다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묘하게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천성이거나.’
어쨌건 사심은 잠시 밀어 두기로 했다.
피니치 구역을 다녀온 뒤, 락소는 아티를 통해 전해 받은 국왕의 명을 해내는 중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오셨네요.”
락소가 책상 위에 놓인 서류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디모네 닉스의 출국 기록입니다.”
상체만 슬쩍 숙여 서류를 훑어보던 아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닉스 씨는 외교 관련 업무를 보는 것도 아닌데, 무슨 출장을 이렇게 다녔을까? 접대라도 하고 다녔나?”
한눈에 봐도 과할 정도의 출장이었다.
“군인이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육군은 이런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락소가 다른 서류를 찾으며 말했다.
“아시겠지만, 해군은 바다를 순찰하고 인접 우방국 방어를 위해 함선을 주기적으로 순항하죠.”
“우리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직업이지.”
“하지만 반대로 육군은 육지 국경을 경비해야 하니, 어지간해선 움직일 일이 없습니다.”
가끔 우방국과의 교류 훈련을 목적으로 이동하긴 하지만, 적어도 그 우방국에 시스토 제국은 없었다.
“디모네 닉스의 출장지는 전부 시스토 제국이었습니다.”
“출장 목적은?”
“모릅니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거 아냐?”
“능력 부족으로 모르는 게 아니라….”
락소가 척, 하고 서류를 내밀었다.
“정말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류를 건네받은 아티의 눈이 가늘어졌다.
디모네 닉스의 출장 기록은 전부 공란이었다. 의도적 누락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죠.”
“피니치 구역 폭발 사건 말이군….”
그 건은 아티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테네브레로 있었을 때 이 사건의 재조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미공개였던 사건 자료를 공개로 전환했는데, 그때 접근했었던 용감한 멍청이가 락소였다니.
‘배짱이 두둑하네.’
주위에 대단한 놈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거지, 락소 베네딕토가 해군 특수부대 저격수 출신이었단 걸 잊어선 안 되었다.
“…맞아. 그때도 사건 조사 내용 일부가 누락되었지.”
“정확히는 분실 아닙니까?”
“육군 측의 변명은 분실이었지.”
누가 봐도 고의적 누락인데.
아티가 빈정거렸다.
어쨌건 락소가 조사한 바는 명확했다.
디모네 닉스의 수상한 출장, 누락된 기록.
“…역시, 마지막은 여기였군.”
시스토 제국.
숨겨져 있던 모든 죄악을 처단하고, 억울한 죽음을 위로할 마지막 목적지였다.
“정말 싫네.”
아티는 문 너머에 있는 여동생들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아티가 락소와 만나는 동안.
“언니, 어디 다녀왔어?”
아직 잠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 클라레가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노아의 손을 꼭 쥐었다.
“잘 잤어? 머리가 엉망이네.”
“으응….”
하아암.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던 클라레가 제 배를 벅벅 긁었다.
“오늘은 일해야 해?”
“그래도 너랑 놀아 줄 시간은 있으니까 걱정 마.”
“헤헤….”
“아스는 어디 있어?”
“아스는 수영하러. 아까 내 방에 들어왔다가, 오빠 보고 서둘러 가 버렸어. 아침부터 오빠 얼굴 보기 싫대.”
“…….”
그렇게 반응할 정도면 애증이지.
노아는 클라레를 품에 안은 뒤, 남부 아드벨로 영지에 있는 마탑에 전화를 걸었다.
“누구한테 전화해?”
“엄마.”
“엄마!”
눈을 동그랗게 뜬 클라레가 수화기를 든 노아의 손을 잡았다.
“내가 전화할래!”
“조금만 기다려. 엄마한테 뭐 물어볼 거 있으니까.”
“나 꼭 바꿔 주기다? 응?”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뒤에야 클라레는 얌전해졌다.
그러곤 방으로 냅다 달려가더니, 어제 가지고 논 구슬공예 장난감으로 만든 팔찌와 목걸이를 들고 왔다.
“나중에 엄마한테 자랑할 거야.”
다시 언니 품에 안긴 클라레가 제 작품을 보여 주며 씩 웃었다.
“잘 만들었네?”
“언니도 하나 줄까?”
“지금 보여 주시는 것과 똑같이 만들어 주세요, 선생님.”
“오, 멋을 좀 아시는군요? 이게 신상이에요!”
클라레와 잠깐 놀아 주는 사이.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아드벨로 저택의 집사였다. 그는 제니우스가 마탑에서 돌아오지 않았단 소식을 들려줬다.
전화를 끊은 노아는 마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번에는 제니우스가 직접 받았다.
“엄마? 난데….”
노아는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구치소를 다녀온 뒤에 일행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전달했다.
[…….]
묵묵히 듣던 제니우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노아는 그런 엄마를 차분히 기다렸다. 그녀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이란 걸 수화기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그래.]
잠시 후, 제니우스가 말했다.
[결국엔 이렇게 되는구나.]
침착하지만 어딘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노아 너, 만약….]
“갈 거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아가 단호히 말했다.
“가야 해, 엄마.”
[…….]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와야 해. 그래야 피에타 가문은 완벽한 끝을 맞이할 수 있어.”
[…후우.]
묵직한 한숨이 노아의 심장을 찌릿하게 했다.
제니우스는 예전부터 노아가 제국으로 가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제국에서 노아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할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어른들이 직접 제국으로 가서 시신을 수습해 오겠다고 했지만, 노아는 막무가내였다.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제니우스가 대화 주제를 다시 돌렸다.
[풀루스 대위에겐 세뇌마법이 안 걸렸고, 대신 약물 중독이 의심된다고?]
“남편이 전쟁 중에 제국에서 비슷한 분위기의 군인들을 본 적 있대.”
[그렇다면 이 시신에서도 그 약물을 추출해 봐야겠네.]
이들의 추측대로 세뇌에 쓰인 것이 ‘피아’라는 약물이라면, 죽은 시체의 머리에 저 성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제니우스는 당장 아메타에게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마침 근처에 있었는지, 알겠다고 대답하는 아메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면 세뇌마법은 누가 걸었는지 모른다는 거지?]
제니우스의 물음에 노아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선왕이 아니라면 가능한 사람은 디모네 닉스뿐인데, 오빠가 확신을 못 하더라.”
섬뜩한 인상은 받았지만, 그에게서 마력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게 아티의 의견이었다.
[…섬뜩했다고?]
잠시 후 제니우스가 예상 밖의 것을 물었다.
[혹시 신성청의 축복을 받은 물건 같은 거, 안 나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