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백화점에서 무려 여섯 시간을 보낸 뒤에야, 일행은 겨우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택에 도착했을 땐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해가 확실히 짧아졌네.”
차에서 내린 노아는 품에 안긴 클라레를 고쳐 안으며 넌지시 감탄했다.
바빠서 눈치채지 못한 계절의 변화를 이제야 실감했다.
“어휴, 요 징한 것.”
아미는 노아의 품에 안겨 잠든 클라레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애 하나 때문에 해 다 질 때 저택에 도착하다니.”
말랑한 볼살을 언니 어깨에 꾹 누른 채 잠든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백화점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모든 기구를 섭렵하고 신기록까지 세우느라 지쳐 곯아떨어진 탓이었다.
손에는 다 먹고 잇자국만 남은 나무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기념품으로 가져갈 거란 고집 때문에 치우지도 못했다.
“중장님, 트렁크 열어 주십시오.”
“우리 치티아 중위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상사 부려 먹겠어.”
“어휴, 뭐 짐이나 들어 주고 그러면 말이나 않지.”
군도 아닌데 상사 소리하긴.
아미는 투덜거리며 제 짐을 꺼냈다.
하는 짓만 보면 명품관을 다 쓸고 온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 아미가 산 건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아미가 자기 돈으로 산 옷과 화장품이었다. 그것도 가짓수가 몇 개 되지 않았다.
“큰 주인님이 이왕 사 준다는데, 비싼 거 사지 그랬어요.”
안타깝게 말하는 아스의 양손도 허전했다. 아스도 자기 돈으로 산 게 대부분이었다.
“남의 돈 쓰려는 게 마음 편한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렇긴 하죠?”
“결국 내 돈 쓰는 게 가장 마음 편해요.”
“맞아요. 그래야 뒤탈이 없지.”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레토가 노아에게 물었다.
“넌 뭐 좀 샀어?”
“네 옷이랑 클라레 옷?”
새옷이 담긴 종이가방을 받아 든 레토가 물었다.
“네 건?”
“딱히 사고 싶은 게 없더라.”
나중에 남부에 돌아가서 살 거라는 아내의 대답에 레토는 괜히 마음이 시큰거렸다.
“진짜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니까.”
시선을 느낀 노아가 머쓱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남부로 내려가기 전에 선물 하나 사야겠다.’
방으로 들어가 씻고 나온 레토는 물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다짐했다.
생각해 보니, 결혼한 뒤로 노아에게 제대로 된 선물을 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일이 바빴단 핑계를 대기엔 좀 무신경했다.
‘뭘 선물할까….’
당장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고려하던 중.
‘아, 전화.’
아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침 시계를 보니 글로리아와 비스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시간이었다.
“레토.”
방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때마침 노아가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씻었는지 풀어 내린 금발 끝이 촉촉했다.
“클라레한테 사 준 장난감 어디 있어?”
“침대 위에. 처제는 깼어?”
머리칼에서 시선을 뗀 레토가 물었다.
“밥 먹자니까 벌떡 깨더라.”
“어린이의 체력은 무시할 게 못 된다니까.”
“근데 어디 가?”
“할머님한테 전화 좀 드리게.”
“할머니?”
구슬공예 장난감을 챙겨든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 좀 하라고 연락이 오셨네.”
“으음.”
“궁금하면 같이 갈래?”
“갈래.”
두 사람은 전화기가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레토가 전화를 거는 동안, 노아는 구슬공예 장난감 통을 만지작거렸다.
“요즘 애들 장난감은 진짜 같네….”
“확실히 잘 만들었더라.”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루비 조각들이랑 똑같이 생겼어.”
“…….”
노아가 귀족 영애 출신이었단 것을 새삼 깨닫는 중.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서 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님. 잘 지내셨습니까?”
[손주사위도 잘 지냈나?]
수도에서 지내는 손주들의 안부를 묻는 비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우리야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지. 오히려 수도 간 그네들이 고생이 많아. 클라레는 여전히 씩씩하고?]
“처제는 언제나 씩씩하고 착하죠.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다름이 아니라, 할머님께서 전화하라고 하셔서….”
[아, 잠시만 기다려 보게.]
곧 글로리아가 전화를 바꿨다.
[어, 그래.]
“…….”
[그 침묵은 뭐냐? 넌 나한테 잘 지냈냐고 안 물어?]
“잘 지내셔서 다행입니다.”
[안부를 물으라고, 새끼야.]
글로리아의 생생한 욕설을 들으니, 레토는 남부 해군에 복귀한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됐고.]
의외로 글로리아는 짜증을 금방 거뒀다.
그리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너희가 사살한 육군 있잖아.]
“…피니치 구역에서 사살한 육군 말입니까?”
레토의 말에 노아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레토는 노아도 듣기 편하게 수화기를 살짝 아래로 내려 줬다.
[너희가 돌아간 뒤에, 국방부 조사대가 그 시신 중 하나를 우리 쪽으로 보냈거든?]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비공개로 진행된 거라 극비사항이야. 국왕의 명으로 국방부 장관이 극비리에 지시했거든.]
노아와 레토는 자연히 알버스를 떠올렸다.
이어지는 글로리아의 말은 두 사람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 시체를 마탑에 넘겼는데, 세뇌마법의 흔적을 발견했단다.]
“세뇌마법?”
깜짝 놀란 노아가 저도 모르게 통화에 끼어들었다.
“할머니, 세뇌마법이라고 했어요?”
[노아냐? 역시 너도 옆에 있었군.]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누가 검사했는데?”
[당연히 네 엄마랑 아빠가 했지. 그러니까 내가 너희한테 말해 주는 거 아니냐.]
세뇌마법은 마탑에서 지정한 금지마법 중 하나였다.
이유는 마법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여 인형처럼 부리는 못된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도 세뇌마법은 범죄 수단으로 자주 악용되었고, 결국 100년 전 아드벨로 마탑주가 세뇌마법을 금지시켰다.
[…이게, 꽤 곤란한 문제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글로리아의 목소리는 골치 아픈 듯했다.
노아와 레토는 그녀가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칼을 뒤로 넘기는 게 훤히 상상되었다.
[세뇌마법은 천하의 나조차 쓸 줄 몰라. 마법식도 마탑 비밀 서고에 영구 봉인되어 있고.]
조금 전에 제니우스가 마법식이 적힌 서책이 봉인된 것을, 그리고 그 봉인이 견고한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니 현시점에서, 세뇌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론적으로 딱 한 명뿐이지.]
성왕.
올해 131세를 맞이한 기적의 변태 새끼.
“…성왕이 131살이라고?”
“그런 미라랑 결혼할 뻔했으니, 치티아 중위 성격이 그렇게 더러워지는 거지….”
노아와 레토는 성왕의 나이에 역겨움을 내비쳤다.
물론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근데, 지금 성왕의 몸 상태가 안 좋아.]
노아와 레토는 자연히 아미의 말을 떠올렸다.
“다 죽어 가는 늙은 새끼가 꼴에 살겠다고, 내 성력을 훔쳐 갔어. 찢어발겨도 시원찮은 그 새끼가 내 몸을 더듬거리면서 성력을 받아 갔다고!”
분명 아미가 저런 말을 했었다.
[어린 성녀의 성력을 빼앗아 겨우겨우 견디던 몸이 슬슬 한계에 부딪혔어.]
“얼마나 안 좋은데요?”
노아가 물었다.
[…얼마 전 가사 상태에 들어가는 물약을 주문했지.]
“그걸 성왕이 마신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레토의 신중한 물음에 글로리아가 대답했다.
[성녀가 가출한 7년 전부터, 신성청은 마탑에 꾸준히 약을 주문했어. 활력을 강화하는 고급약을.]
죽음을 문턱에 앞둔 사람이 마시면 3분 정도 버티는 힘을 주고, 몸이 약한 사람이 마시면 30일을 건강하게 해 주는 명약.
[그리고 가사 상태에 드는 약 주문과 함께, 활력 강화 약 주문량이 반 이하로 뚝 떨어졌지.]
즉, 성왕은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만약 성왕이 멀쩡했다면, 세뇌마법의 시전자로 바로 그 새끼를 지목했을 거야.]
하지만 성왕은 현재 가사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세뇌마법은 누가 걸었는가.
“…….”
“…….”
전화를 듣는 노아와 레토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나와 너희의 짐작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지?]
아드벨로 대장이 명했다.
[전부 다 죽고, 한 놈 유일하게 남았다고 들었다.]
풀루스 대위.
불법 사병 단체의 흔적이자, 디모네 닉스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쓸 뻔했던 젊은 군인.
[가서 확인하고 와.]
그 새끼도 세뇌마법이 걸렸는지.
***
아드벨로 대장의 명을 받은 즉시, 레토는 국왕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했다.
[아, 어쩐지….]
카일리코 국왕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네 매제가 다녀온 뒤로 좀 이상하더라고.]
“우리 오빠가요?”
[아이고, 대위도 옆에 있었나? 일단 내일 바로 면회할 수 있도록 날 잡을 테니 만나거든 이야기해 봐.]
그리고 다음 날.
노아와 레토는 새벽 일찍 일어나 구치소로 갈 준비를 마쳤다.
오늘 오전에 육군 범죄자들의 재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하아아암….”
쩝쩝.
덩달아 끌려온 아미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이거야 원, 군에 있을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났잖아….”
“일정이 빠듯하니 어쩔 수 없지, 뭐.”
“죄인 일정에 맞춰서 움직여야 한다니….”
놈들 팔자가 상팔자네.
아미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구치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차에서 내리니, 먼저 와 있던 아티가 다가왔다.
“세뇌마법의 흔적을 찾았다고?”
“엄마나 할머니한테 못 들었어?”
“그분들은 날 포기한 지 오래라서. 연락도 안 해.”
“아티 오빠, 그건 자랑이 아니에요.”
“그런데 형님은 모르셨습니까?”
“그놈들이 세뇌마법에 걸렸던 거?”
아티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알아채지 못한 것이 자존심이 상한 건지, 아니면 그에게도 이번 일은 꽤 충격이었던 건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세뇌마법이 금지된 건 악용의 여지 때문도 있지만, 이미 걸린 마법을 알아차리는 게 꽤 어려운 탓도 있어.”
마법에 걸린 피시전자조차도 자신이 세뇌당한 사실을 모르는 채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그런데 우리 아미 양까지 왔다는 건….”
“시전자 후보가 그 변태 새끼거나, 관련자일 수 있다고 해서요.”
구치소에 들어간 네 사람은 단어를 주의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만약 그렇다면 제 선에서 어찌 할 수도 있고.”
“오, 풀 수 있어?”
아티가 의외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미는 별것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가능은 할걸요?”
“‘할걸요’?”
“해 본 적은 없어서 말입니다.”
근거 없는 아미의 자신감에 레토는 영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빠.”
노아가 조용히 물었다.
“…디모네 닉스가 마법을 썼을 가능성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