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아미는 전화기 밑에서 엎드려 뻗쳤고, 클라레는 인형 가방을 번쩍 든 채로 환호하고 있었다.
“아스!”
아스를 발견한 클라레가 쪼르르 다가갔다.
“인질로 붙잡혔던 식칼토끼에게 응급처치하고 있었어.”
“어머, 대단하셔라!”
“그래서 무사히 의식을 찾았지!”
이거 보라며 클라레가 가방을 보여 줬다.
가방은 축 늘어진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역시 우리 아가씨는 못 하는 게 없으시다니까!”
그래도 아스는 대단하다며 칭찬의 박수를 보냈다.
뿌듯해진 클라레가 살찐 비둘기처럼 가슴을 내밀었다.
“둘 다 내려와…!”
아미는 어느새 엎드려 뻗친 제 등 위에 앉은 클라레와 아스에게 소리쳤다.
“뭘 그리 자연스럽게 내 위에 앉아!”
“앉으라고 엎드린 거 아니었어요? 괜히 심술이람.”
“맞아, 맞아!”
등에서 내려온 아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수화기를 발견했다.
수화기를 드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냐?]
“어머, 큰 주인님.”
“참, 할머니랑 전화하고 있었는데!”
클라레가 저 다시 바꿔 달라며 폴짝거렸다.
“잘 지내셨어요?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시죠?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고요. 큰 부군께서도 건강하시죠?”
[너희가 걱정 안 해도 잘 지내고 있다. 너는 편히 쉬고? 오랜만에 일 안 하니까 좋지?]
“너무 좋죠. 수영장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남부로 돌아가면 수영 교실이나 다닐까 봐요.”
“할머니! 할머니이이!”
“아가씨가 전화 바꿔 달라는데요?”
[그 전에.]
글로리아가 말했다.
[노아나 레토 있냐?]
“형부 아까 봤는데, 언니 끌어안고 자더라!”
“작은 주인님은요?”
“언니도 하품하고 막 그랬어.”
“음, 두 분 다 주무시려나?”
아스는 딱히 그 방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작전에서 돌아온 뒤로, 노아와 레토는 들러붙어 있을 때가 많았다.
‘전에는 그래도 정도를 지켰는데 말이지.’
클라레와 아스 앞에서는 나름 자중하더니, 요즘은 그러는 것도 없었다.
“…깨울까요?”
아스가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내버려 둬라.]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조금 예상 밖이어서, 아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신 오늘 안에는 전화 좀 하라고 전해라. 이왕이면 집으로.]
그리고 글로리아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수표책은 베닝한테 받아서 써.]
***
노아와 레토가 이른 낮잠에서 깨어난 건 딱 점심 먹을 즈음이었다.
“잠꾸러기래요!”
클라레는 자신이 살린 식칼토끼 인형 가방을 멘 채로 두 사람을 놀렸다.
둘은 아직 잠이 덜 깬 채로 하품을 길게 내뱉었다. 기지개도 제법 길게 켰다. 클라레도 따라서 팔을 쭉 늘였다.
“그런데 가방은 왜 메고 있는 겁니까?”
레토는 제 등에 업히려는 클라레를 위해 몸을 낮추며 물었다.
“백화점에 갈 거래요.”
등에 업힌 클라레가 말했다.
“수표책으로 뭐든 살 수 있는데, 형부는 뭐 사고 싶어요?”
“수표책?”
“너 잘 때, 아미가 클라레 이용해서 뜯어낸 거야.”
그 말에 레토가 한심하단 눈빛으로 아미를 바라봤다.
그러건 말건, 한껏 차려입은 아미는 선글라스까지 낀 채로 백화점에서 뭘 살지 아스와 진지하게 논하는 중이었다.
“한도가 얼마까지래요? 대장님이 진짜 막 써도 된다고 했어요? 아드벨로 기둥 뽑아도 된대요?”
“그렇게까진 말씀 안 하셨어요.”
“무조건 1층부터! 명품관부터 털어버려야지!”
“그러다가 큰 주인님이 아미의 아구창을 털어버릴지도 몰라요.”
그 사이, 노아는 클라레를 데리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 전과가 있는 클라레 준비까지 완벽하게 한 뒤에야, 아드벨로 일행들은 백화점으로 출발했다.
백화점은 저택에서 차를 타고 20분을 달려야 했다.
“식칼토끼! 식칼토끼!”
달리는 동안, 클라레는 식칼토끼 주제곡을 선창했다.
“정의의 복수자, 식칼토끼.”
“부모를 죽인 불법 도축업자. 그자의 피를 식칼에 묻혀.”
그러면 노아와 아스가 뒷부분을 이어 불렀다.
“와, 그거 무슨 노래냐?”
“식칼토끼 주제곡! 아미 언니는 몰라?”
클라레는 아미를 동정하듯 바라봤다.
“이거 모르면 유행에 많이 뒤처진 건데….”
“그런 거야?”
“이제라도 외워! 그러면 인기 짱은 될 수 없어도, 인기 짱의 친구는 될 수 있어.”
“인기 짱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데?”
“아미 언니는 절대 인기 짱이 될 수 없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클라레가 엄지손가락을 척 세우곤 자신을 가리켰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인기 짱이니까!”
“크으! 그런 거였구나!”
아미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깊이 감탄했다.
백화점에 도착한 이들은 곧장 식당 구역부터 향했다.
“우웅, 뭐 먹지?”
“침은 흘리지 말고.”
노아는 클라레의 입가에 맺힌 침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메뉴판을 힐끔거렸다.
최근 유행한다는 이국 요리점이라서 낯선 음식들이 가득했다.
“안 매운 거 시킬까?”
“응. 생선 먹고 싶어, 생선.”
“근데 식당에서도 수표가 되나?”
식당을 두리번거리던 레토가 중얼거렸다.
“걱정 마.”
노아가 클라레가 먹을 것을 고르며 말했다.
“여기 백화점, 아드벨로 계열이거든.”
엄마한테 전화하면 될 거라고 노아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
수표가 안 되면 제 돈으로 계산하려던 레토는 조심히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손을 뗐다.
“아드벨로가, 백화점도 했나?”
“안 하는 걸 찾는 게 더 빠르지.”
군수산업과 마탑 연구소가 워낙 유명한 탓에 조명을 잘 받지 않지만, 아드벨로는 다른 분야에도 진출을 많이 했다.
레토의 붉은 애마를 만들어낸 체티 사, 클라레가 다니는 마레이 학교 등을 운영하는 마레이 재단, 이곳 백화점 계열의 유통사도 아드벨로의 것이었다.
“참고로 이것도 아드벨로 상품이에요.”
아스가 가방에서 꺼낸 약통을 보여 주며 말했다.
“진통제인데, 효과가 정말 좋아요.”
“아이씨, 노아랑 결혼할걸.”
아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럼 우리 집에 아직 결혼 안 한 쓰레기, 아니, 개쓰레기가 하나 있는데, 어때요? 데려갈래요?”
“설마 아티 오빠 말하는 거예요?”
아스의 제안에 아미가 기겁했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욕을 해요.”
붙여도 그런 쓰레기를.
질색한 아미는 냉큼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요! 어서 빨리 주문받으세요!”
***
다행히 점심 식사는 수표로 해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드벨로 가족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백화점 대표가 느닷없이 식당가에 나타났다.
당황한 일행들은 어떻게든 모르는 척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클라레는 그게 퍽 재미났는지 깔깔 웃다가 사레가 크게 들려 입에 있던 걸 다 뱉어냈다.
소란스러운 식사를 마친 일행은 두 조로 나뉘었다.
“저흰 명품관을 부수고 오겠습니다!”
“어휴, 사도 쓸 일이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구라치지 마요, 언니. 나 아까 화장실에서 가방 노래 부르는 거 다 들었거든요?”
“그거 귀신이 부른 거예요.”
노아와 아스, 아미는 1층 명품관을 돌아보고 오겠다고 했다.
“레토 넌? 난 클라레 장난감 먼저 사 주려고 하는데.”
“그럼 내가 처제랑 같이 있을 테니까, 너도 같이 다녀와.”
“형부! 솜사탕 사 먹어도 돼?”
“장난감 다 고르면 사 줄게요.”
그리고 레토는 노아에게 제 옷을 대신 사 달라고 부탁한 뒤, 클라레와 함께 장난감을 보러 왔다.
“우와, 식칼토끼 은행 놀이다!”
“여기에도 식칼토끼가 있었네?”
남부에서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클라레와 함께 장난감 가게에 방문한 레토가 다양한 종류의 장난감을 보며 은근히 감탄했다.
“식칼토끼는 유행이니까! 모르면 간첩이거든.”
클라레는 장난감을 이것저것 살피며 뭘 살지 고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토가 물었다.
“사고 싶은 거 다 사면 될 텐데? 왜 그렇게 고민해요?”
“그치만….”
클라레가 그러면 안 된다고 야무지게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갖고 싶은 걸 다 가지려고 욕심부리면, 욕심 벌레가 내 즐거움을 갉아먹는대요. 그러면 식칼토끼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진다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레토는 아이에게 참는 마음을 가르친 비스의 지혜로움에 감탄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당부를 굳건하게 실천하는 클라레도 기특했다.
역시 속이 깊고 현명한 아이였다.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불러서 먹기 싫어지는 거랑 똑같다고 했어요.”
“그러면 열심히 고민해야겠네요?”
“응!”
은행 놀이와 구슬공예 중 뭘 고를지 고민하는 클라레 옆에서, 레토도 카리나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남자아이들에게 유행이라는 홍보문구를 빤히 보며 장난감들을 고르던 중.
“어머, 아직도 고르고 있었어요?”
아스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다 끝났나요? 명품관 기둥을 뽑겠다더니?”
“아드벨로의 기둥을 뽑는 거겠죠. 그리고 당연히 덜 끝났답니다.”
코웃음을 친 아스가 지갑에서 뭔가를 꺼냈다.
“장난감 다 고르면 식당가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기다리라고 말하는 걸 잊었어요. 여기 입장권이요.”
“솜사탕도 팔려나.”
“그러면 이것도 챙기세요.”
아스는 물에 적셔 쓰는 휴대용 휴지도 건넸다.
“아마 덕지덕지 묻힐 게 분명하니까, 다 드시게 한 뒤에 물에 적신 휴지로 닦아 주세요.”
“육아는 정말 힘든 거군요.”
레토의 말에 아스가 클라레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아가씨 나이는 이제 말이 통하니까 그리 힘든 것도 없어요.”
힘든 것 없는 클라레는 아예 바닥에 철퍽 앉아서 어떤 장난감을 고를지 고민 중이었다.
팔짱까지 낀 채로 심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지켜보는 레토와 아스의 얼굴에 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아참.”
그때, 아스가 글로리아의 전언을 떠올렸다.
“큰 주인님이 나중에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언제 말입니까?”
“출발하기 전에요. 그리고 할 거면 나중에 집으로 하시라고도 말씀하셨어요.”
“집으로?”
레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알겠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부우우!”
그때, 클라레가 장난감을 들고 다가왔다.
“두 개 다 너무 사고 싶은데, 어쩌면 좋지?”
“우리 아가씨, 아직도 못 골랐어요?”
“어라, 아스도 왔네?”
“그러면 이 구슬공예 장난감은 제가 살 테니까, 나중에 같이 갖고 놀까요?”
“형부 똑똑한걸?”
그제야 클라레는 기쁜 마음으로 은행 놀이 장난감을 선택했다.
그리고 레토는 구슬공예 장난감과 함께, 요즘 유행한다는 만화 주인공들이 그려진 카드 장난감을 카리나에게 줄 선물로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