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그자는 여기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어.”
피니치 구역에 어떤 위급한 정황이 의심되어 무장 수색대를 보낸 것이었다면, 닉스 전 소장은 즉각 국방부와 왕궁에 이를 알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지.”
디모네 닉스가 구속된 후, 국왕은 국경 작전사령부에 대기 중이던 국방부 소속 조사대에게 수색을 명령했다.
“알아보니, 작전사령부 내에서도 이번 전투와 무장 수색대 출동은 몰랐다고 하더라고.”
“죄목이 또 늘어났군요.”
“내 말이.”
국왕과 아티가 음흉하게 웃었다.
아스는 참 끼리끼리 잘도 어울린다고 남몰래 생각했다.
“어쨌건 참 대단한 놈이야….”
국왕은 지친 한숨과 함께 감탄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디모네 닉스란 인간은 정말 치밀하고 조심성 많은, 언제나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모략가였다.
그리고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장인어른만 생각하면 늘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제 아내에게 미안해서 ‘아쉬움’이란 단어를 쓴 게 아니었다.
그 대단한 집안을 제대로 잡지 못해 아쉬울 뿐인 거였다.
‘하나하나 전부 질리는 새끼 같으니.’
그중에서도 가장 감탄했던 건, 불법 사병 단체 출신의 군인들만 골라 피니치 구역에 보낸 것이었다.
정황상, 아마 신성청이 자신이 숨긴 증거를 발견할까 봐 우려한 듯했다.
그래서 성기사들을 죽이기 위해 그들을 보냈던 거고.
하지만 아마 그 명령에는 성기사들을 죽이지 못한다 해도, 자신들이 보낸 군인들의 사망은 내심 상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죽어 사라져야, 불법 사병 단체와 연루되었단 제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지니까.
‘…사진을 찍어 둬서 다행이군.’
안 그랬으면 내란죄가 성립되지 않을 뻔했다.
아스는 사진 속 군인들을 전부 알아봤다.
자신이 불법 사병 단체에 있었을 때 같이 훈련했던 아이들이라고 증언했다.
실제로 아스가 증언을 위해 재판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꼭 필요하다면 반드시 비공개로 증언할 것이고.
이렇듯, 모든 건 국왕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
그럼에도 국왕은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피곤하십니까?”
그런 국왕의 심기를 읽은 아티가 물었다.
“조금.”
국왕은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구치소에서 들었던 디모네 닉스의 마지막 한마디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셀레나 왕녀님은 잘 지내십니까.”
만약 저 수상쩍은 안부 물음이 자신이 예상하는 대로라면.
“…….”
국왕은 소리 없는 한숨을 제법 오랫동안 내쉬었다.
‘역시 그 새끼가 가지고 있었군.’
디모네 닉스가 마지막에 보여 줬던 그 패는, 국왕이 내내 찾던 마지막 증거의 행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그자는 어떻게 할 겁니까?”
아티가 물었다.
“누구?”
“신성청 직속 추기경의 위증에 언급되었던….”
“아, 그 대위?”
국왕이 말했다.
“그건 거기서 연락이 오면….”
***
현재 아들라보르 왕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단연코 이적 행위를 한 군인들의 재판이었다.
플랜시 전 해군 소장의 재판을 시작으로, 연관된 사건들의 재판이 하나씩 진행되었다.
재판 내용은 늘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으며, 라디오 뉴스의 주요 소식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었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에서 수많은 범죄자가 나왔다.
그것도 나라에 위해를 끼치는 범법 행위를 자행했단 사실까지 드러났다.
군의 자성을 촉구하는 여론은 점점 커졌다.
이번 사건에 대한 국왕의 의견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가장 큰 뭇매를 맞은 건 육군과 신성청이었다.
해군이 이번 사건에서 욕을 적게 먹는 이유는, 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고위급 책임자가 성명했기 때문이다.
오케아누스 중장과 아드벨로 대장이 번갈아 나타나 직접 사죄하고, 추후 대책을 직접 발표했었다.
반면, 육군은 아직도 사건에 대한 성명이 없었다.
디모네 닉스 소장의 직위 해제만 발표한 뒤, 그들은 추후 사건이 정리되면 설명하겠단 입장을 고집했다.
그런 태도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신성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성청 직속 추기경의 위증, 신성청의 재정을 담당하는 변호인단의 재판 참여에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게 여론에 못 이겨 변호를 포기한 줄 알았더니, 왕실 기사단 출신의 마약 사범을 변호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난은 더욱 커졌다.
가뜩이나 성녀가 가출하면서 성녀 학대 의혹을 못 벗어나는 중에, 범죄자와의 유착 관계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신성청 역시 침묵하는 중이었다.
“국왕은, 이번 사태에….”
그리고 소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유, 유감을….”
수도 아드벨로 저택은 평화로운 때를 보냈다.
“언니! 언니!”
어른들이 놔둔 신문을 읽으며 놀던 클라레가 노아를 불렀다.
바로 옆 소파에서 레토의 품에 안겨 누운 채로 독서 중이던 노아가 읽던 책을 치웠다.
노아의 등 뒤에 있는 레토는 미동도 없었다.
“언니, 유감이 뭐야?”
“유감은 이렇게 되어서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난다는 뜻이야.”
“싸우자는 뜻이야?”
“너무 싫지만, 싸우기는 싫을 때 쓰는 표현이야.”
“어른들은 참 단어를 이상하게 쓰는 것 같아.”
새로운 단어를 하나 배운 클라레가 다시 신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하지만 곧 싫증이 났는지, 신문을 내팽개치더니 노아와 레토가 누운 소파 위로 올라왔다.
그러곤 꼬물거리며 노아의 품에 안겼다. 노아는 책을 든 팔을 살짝 들어 클라레가 안기기 편하게 했다.
“언니이이….”
클라레가 앙증맞은 목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나 심심해.”
“언니는 안 심심해.”
“나랑 놀아 줘!”
“아까 수영장에서 놀아 줬잖아.”
오늘 이 저택엔 카리나가 없었다. 학업 문제로 아이트라가 카리나를 전날에 데려갔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놀던 친구가 없어지자 꽤 심심했는지, 클라레는 아침부터 어른들을 붙잡고 놀아달라고 매달렸다.
그래서 입술이 시퍼레질 때까지 수영장에서 놀아 주고, 이제야 겨우 숨을 돌리는 차였다.
“2시간밖에 안 놀아 줬잖아!”
하지만 클라레는 그마저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
노아는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도대체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활력이 흘러넘치는지, 직업 군인 두 명이 붙어서 놀아 줬는데도 여전히 쌩쌩했다.
심지어 레토는 애 체력 좀 빼 주려다가 본인 체력만 방전되어 기절한 상태였다.
“너무너무 심심한데요오!”
클라레는 그 와중에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노아의 옷에 달린 레이스 개수를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예쁜 동생이랑, 안 놀아 주며언! 코가 털로 변한대요오!”
“그건 또 무슨 노래야….”
또 이상하게 개사했네.
동생의 엉뚱한 재촉에 못 이긴 노아가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식칼토끼!”
바로 클라레의 식칼토끼 가방이었다.
깜짝 놀란 클라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꼼짝 마라!”
가방을 향해 달려가려던 클라레가 멈칫했다.
“식칼토끼 인형은 지금부터 나의 인질이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손가락으로 총 흉내를 내며 인형 가방을 위협하는 아미였다.
“지, 진정해!”
클라레는 바로 역할 놀이에 들어갔다.
아이는 침착하란 듯이 손짓했다.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일단은 인질범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리고 대화를 시도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드벨로의 수표책. 그것을 원한다.”
“수표책이 뭔데?”
“저게 진짜…!”
하품하며 구경하던 노아가 아미를 노려봤다.
“야, 내 동생 가지고 뭐 하는 거야.”
“너무 심심한 나머지 돈이 쓰고 싶어져서 말이지.”
“그럼 네 돈 써.”
“그건 또 싫어.”
아미가 정색했다.
“생각해 보니 역시 이번 작전은 위험 수당이랑 이런저런 걸 다 쳐서 받아야 할 것 같거든.”
노아는 기가 막혔다.
그러든 말든, 아미는 인질을 이용해 클라레를 꾀어냈다.
“잘 들어라. 식칼토끼를 돌려받고 싶다면, 당장 너희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수표책을 쓰게 해 달라고 해라.”
“수표책으로 뭐 하게?”
“백화점 가서 맛있는 거랑 예쁜 거 살 거야. 수표책 얻어 주면 네 장난감이랑 옷도 살 수 있어.”
“그건 이미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많이 사 주는데? 엄마랑 아빠도 만날 선물로 보내 주고.”
맛있는 것도 아스가 매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런.”
아미가 낭패란 듯이 혀를 찼다.
아드벨로의 차기 후계자는 부족함 없이 잘 자란 탓에 굳이 백화점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근데 전화는 해 줄게.”
하지만 클라레는 인질범의 요구를 수용했다.
“나도 할머니랑 전화하고 싶어. 할아버지랑도! 엄마랑 아빠한테도!”
클라레는 곧장 해군 참모 총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할머니이?”
곧 수화기 너머로 글로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나 잘 지내고 있어! 있잖아, 나 감옥에 갇혀 봤다? 어어, 누굴 좀 때렸거든. 알아, 폭력은 정당한 방법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어….”
클라레는 전화한 목적을 잊은 채, 할머니에게 자신이 수도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즐겁게 떠들었다.
보다 못한 아미가 어디선가 가져온 공책에다가 뭔가를 빠르게 적어, 클라레에게 보여 줬다.
“아, 할머니!”
공책에 적힌 걸 읽은 클라레가 글로리아에게 말했다.
“수표책 주세요!”
[수표책?]
수화기 너머로 글로리아의 황망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그걸 왜?]
“언니들이랑 같이 백화점에서 놀게!”
클라레는 아미가 공책에 적은 대로 대답했다.
[……옆에 누구 있냐?]
“응.”
[네 언니는 아닐 테고, 아미냐?]
“응.”
[바꿔.]
클라레가 아미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할머니가 바꿔 달래.”
“…….”
“할머니 목소리가, 울 오빠 쥐 잡듯이 잡기 전에 내는 목소리랑 똑같았어.”
“젠장….”
인질극을 실패해 버린 아미는 비통한 얼굴로 수화기를 들었다.
“식칼토끼! 정신 차려!”
클라레는 그 옆에서 되찾은 가방에다 학교에서 배운 심폐 소생술을 열심히 실행했다.
“하나, 둘, 셋, 넷! 후후!”
가슴 압박을 반복하고, 입으로 공기를 부는 시늉을 하는 사이.
[내 손녀를 이용해서 돈을 뜯으려고 해?]
글로리아의 목소리는 아미의 가슴을 압박하고 입에다 주먹을 쑤셔 넣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뭐? 토할 거 같다고?”
가방의 상태를 확인한 클라레가 냅다 가방을 엎드리게 한 뒤에 등을 토닥거렸다.
[엎드려뻗쳐라.]
그리고 그 옆에선 아미가 엎드려뻗쳤다.
“…뭐 하는 거예요?”
때마침 지나가던 아스는 복도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진풍경에 흠칫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