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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아들라보르 구치소는 수용자에게 사복을 금지하고 위아래로 색이 똑같은 수용자 전용 의복을 제공했다.
의상 색깔은 계절마다 다른데, 늦여름인 현재는 연한 하늘색인 빳빳한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아차, 지금은 소장이 아니지.”
바빠서 까먹었네.
손가락을 튕기며 자신의 실수를 재빨리 인정한 국왕이 미안하다며 건성으로 사과했다.
“내가 배려가 부족했군. 직위해제 당했으니 이젠 전 소장이지.”
“…….”
“그나저나 정말 옷이 잘 어울리는군!”
능청을 부리며 자리에 앉는 국왕의 등 뒤엔 검은 정장 차림의 남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빈말하는 게 아니라, 연한 하늘색을 받쳐 입으니까 피부가 아주 화사해. 이게 요즘 유행한다는 ‘시원한 여름’ 피부라는 건가? 나는 ‘따뜻한 봄’ 피부인데.”
국왕이 뭐라 떠들어도 거대한 벽처럼 미동 없는 두 사람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
그래서 그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닉스 전 소장에겐 보이지 않았다.
“어허.”
국왕이 점잖게 타이르며 다시 닉스 전 소장을 불렀다.
“대화 중에 시선을 딴 곳에 두면 쓰나. 어린 왕자도 안 하는 짓인데.”
“…….”
“아이고, 혹시 왕자처럼 대해 줘야 했나? 그래도 나이가 있는….”
“전하께서는.”
닉스 전 소장이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내뱉은 첫 음이 살짝 갈라져 있었다. 그가 여태 묵비권을 행사했음을 짐작케 했다.
“지금 제 상황이 아주 재미나실 겁니다.”
“그렇게 재미나진 않아.”
사람을 뭐로 보고.
국왕이 속상하단 듯이 투덜거렸다.
“그저 X 같을 뿐이지.”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진 국왕이 피식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내리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닉스 전 소장을 노려봤다.
매섭게 번뜩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
닉스 전 소장의 눈에 그제야 빛이 돌았다.
‘…미친 새끼.’
국왕은 기가 찼다.
도대체 그간 저런 속내를 어떻게 숨기고 멀쩡한 척했던 걸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오싹한 존재였다.
저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사람의 탈을 쓴, 지옥에서 올라온 사특한 무언가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미친놈을 상대하는 건, 다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국왕은 애써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너 같은 쓰레기 하나 잡겠다고, 그 고생을 했다고. 그러니 내가 지금 기분이 좋겠나? 아주 거지 같고 빌어먹을 정도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있지도 않은 영광을 굳이 지어낼 필요는 없다네.”
국왕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래를 한번 해 볼까?”
“거래라 하신다면….”
“사형은 면하게 해 주지.”
죽기는 싫지?
“음….”
국왕의 제안에 관심 없는 척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닉스 전 소장이 상체를 뒤로 슬그머니 뺐다.
그러곤 다리를 꼬더니, 그 위에 손을 올려 우아하게 깍지를 꼈다.
입고 있는 연한 하늘색 수용자 복장만 아니었다면, 마치 그가 이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난 꽤 바쁘다네. 그댈 골려 먹으려고 여기 올 만큼 한가롭지 않단 뜻이지.”
국왕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며 제법 심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이 자네가 나와 동등하게 거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가라앉은 어조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점점 무겁게, 그리고 어딘가 긴박하게 만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거래는 내 독단으로 진행되는 거야. 반대하는 자들이 워낙 많거든.”
특히 국방부가.
“…….”
닉스 전 소장의 입술이 잠깐 움찔하는 것을, 국왕은 놓치지 않았다.
“자네의 장인어른이었던 사람이 지금 작심했다고. 어떻게 하면 최악의 방법으로 그댈 나락으로 떨어트릴지, 그것만 고심하고 있다니까?”
“장인어른만 생각하면 늘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기회를 잡으라고.”
국왕이 한 번 더 힘줘 말했다.
“사형만 피하면, 가석방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닉스 소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몇 분 기다려 줄 테니 생각해 보게. 나도 일정 때문에 바쁜 몸이거든. 한 1분 정도….”
국왕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거리던 중.
“…뭘 원하시는 겁니까?”
닉스 전 소장이 물었다.
“이렇게까지 제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건 그대가 더 잘 알지도 모르지.”
“글쎄요….”
말끝을 흐린 닉스 소장의 입꼬리가 또 한 번 움찔거렸다.
“생각해 보니, 이게 대등한 거래가 가능한 조건인지 모르겠습니다.”
“어허.”
기가 막힌 국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자신감일까?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린아이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무슨 죄로 절 죽이실 겁니까?”
“…….”
국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닉스 전 소장은 이 보란 듯이 한 번 더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저 X발 새끼가…!’
국왕은 그제야 알았다.
닉스 전 소장은, 저 미친 새끼는 지금 웃음을 참던 것이었다.
“가지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것만으로는 내란죄의 책임을 완벽하게 묻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젠 자기가 쓰레기라는 걸 인정하는 건가?”
“거래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확실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무엇을?”
“내란죄는 성립되지 못할 겁니다.”
그러기엔 증거가 부족하니까.
닉스 전 소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껏 해 봤자 내란 선동죄? 그조차 인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내란을 목적으로 한 폭동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저 신성청과 안부를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군사 기밀이 유출된 건 저의 불찰이니 벌은 달게 받….”
“디모네 닉스.”
국왕이 끼어들었다.
더는 들어주지 못할 개소리를 잘라 버린 국왕은 저의 모든 분노를 억누른 채,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그건, 아직 모르는 걸세.”
“…….”
“그러니 함부로 입방정을 떨지 말게나.”
조언이 먹혀들었는지 몰라도, 닉스 전 소장에게서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보아하니 거래는 끝이군.”
국왕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단 듯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뒤돌아서는 순간.
“셀레나 왕녀님은 잘 지내십니까.”
닉스가 물었다.
돌아선 국왕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지.”
***
구치소를 나온 국왕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숨을 푹 내뱉었다.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말을 잘 안 하는데….”
하도 힘준다고 굳은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누르던 그가 진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지독한 새끼야….”
미친놈 상대하는 데엔 나름 도가 텄다고 생각했던 국왕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마저 다리를 꼬며 제 사무실에서 부하 접견하듯 우위를 점령하려던 태도는 천하의 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나저나, 어땠나?”
국왕이 제 옆에 앉은 여자 호위에게 물었다.
“그자를 본 기억이 있나?”
“유감스럽게도 없었습니다.”
선글라스를 벗은 아스가 말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아스가 호위 차림으로 이곳에 있는 건, 지난번 작전의 연장선이었다.
국왕은 불법 사병 단체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스에게 닉스 전 소장의 얼굴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그녀가 단번에 알아본다면, 그의 죄를 추궁하는 것이 더욱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하나 아스는 닉스 전 소장을 알아보지 못했다.
만약 아는 얼굴이었다면, 저택 도서실에서 그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 바로 알아차렸을 거다.
“그나저나 정말 역겨운 사람이네요….”
아스는 더러운 것을 떨쳐내듯, 제 팔을 반사적으로 벅벅 쓸었다.
그 인간은 사람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도 찝찝한 존재였다.
제 또래와 비교하면 제법 많은 사람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저리 섬뜩하고 간사한 기운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봤었다.
‘클라레 아가씨는 저런 인간을 안 겪어 봤으면 좋겠어.’
아스는 서둘러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전하.”
“아닐세. 오히려 이렇게 도와줘서 고맙지.”
국왕이 사람 좋은 미소로 대답하면서, 운전석에 앉은 또 다른 남자 호위를 힐끔거렸다.
“왕국의 평화를 위해서잖습니까.”
아스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청소는 좀 깨끗하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런 대형 쓰레기는 태워서 버리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싫으면 무시하면 될 텐데….”
운전석에 앉은 아티가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아직도 날 못 잊고 저리 미련을 가지네.”
“…….”
아스의 웃는 얼굴이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으흠.”
이 분위기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던 국왕이 눈치껏 끼어들었다. 어차피 정리해 둬야 할 말이 있었다.
“어쨌건 건진 게 있군.”
대화해 본 결과.
디모네 닉스는 이쪽이 가진 패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게 그 편지와 서류뿐인 줄 아나 봐.”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냥 독기 어린 머저리였군요.”
아티가 말했다.
“저로서는 그 머저리를 보니, 제 막냇동생이랑 토론하는 게 더 흥미로울 것 같았습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어디 그런 쓰레기한테 우리 아가씨를 갖다 붙이는 건지.
불쾌해진 아스가 오만상을 썼다.
“그런데 국왕 전하.”
아스가 물었다.
“저 인간, 정말로 내란죄를 받지 않을 수도 있나요?”
“그럴 린 없어.”
국왕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란죄를 확실하게 받을 걸세. 사형도 확정이야.”
그러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스에게 내밀었다.
“아까 말한 대로, 그놈은 우리가 뭘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모르는 것 같으니까.”
“어머, 제가 찍은 것인가요?”
아스가 받은 건 두툼한 편지 봉투였다.
“그대가 찍은 증거가 내란죄의 확실한 증거지.”
봉투 속에는 아스가 노아 일행과 합류하기 전, 그들이 처리한 육군의 시신을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찍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7년 전에 문 닫은 고아원 출신이더군. 신성청이 후원했던 바로 그 고아원 말이야.”
그리고 전부 닉스 전 소장의 추천으로 국경 작전사령부 소속으로 차출된 자들이었다.
이로써, 디모네 닉스가 군 내에서 몰래 파벌을 형성하여 폭력적 수단으로 내란을 주동하였단 증거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