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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로세카 검사가 전해 준 소식은 당일 라디오 긴급 뉴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정규 방송을 잠시 멈추고, 긴급 속보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육군 국경 작전사령부 사령관인 디모네 닉스 소장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단…]
라디오 앞에 모인 노아와 레토, 아미, 락소의 표정이 어두웠다.
[익명을 요구한 제보자에 의하면, 닉스 소장의 체포 영장에 적힌 죄명은 ‘내란죄’라는…]
툭.
레토가 라디오를 껐다.
자신들의 성과를 직접 확인했는데도, 네 사람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후련함은 더더욱 없었다.
쉬이 표현할 수 없는 요상한 찝찝함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노아가 먼저 말했다.
“너무 오래 걸렸네.”
“그런다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지도 않지.”
대꾸하는 레토의 목소리도 그렇게 기운차진 않았다.
“기분 참 요상하네.”
아미가 중얼거렸다.
“이런 비밀 작전 같은 거, 처음 참여해 보는 거라 나름 뿌듯한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작전을 막 끝내고 돌아왔을 때는 그냥 너무 지쳐서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씻고, 배불리 먹고, 푹 자고 쉰 뒤에야 아미는 이 작전이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뭔가 허망하구먼.”
작전은 완벽한 성공 이상의 성과를 냈다.
신성청은 재판에서 손을 뗐다. 닉스 소장을 비롯한 관련 군인들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권선징악이었다.
이제 와서 이런다고 해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일어난 전쟁은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고, 많은 것을 파괴했다.
그리고 이들은 내심 알고 있었다.
7년 전 전쟁의 진상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란 걸.
전쟁의 진상이 알려지는 순간, 왕국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이를 빌미로 타국에서 왕국을 압박할 게 뻔했고.
그러니 모든 계획이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었다.
“군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겁니다.”
락소도 꽤나 회의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시키는 대로 굴러야지, 거기서 정의나 도리를 찾으면 허탈할 뿐이죠.”
“그래도 넌 복수라도 했잖아.”
노아가 말했다.
“그때 보니까 아주 그냥 다짐육을 만들었더니.”
어지간한 상황이었다면 징그럽고 끔찍해서 토악질이라도 할 법한데, 말 그대로 다짐육을 만들어 놔서 도리어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속 시원하다고 우렁차게 외치던 성녀님은 어디 가셨나.”
덩달아 레토도 비식거렸다.
그는 아직도 아미가 성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머리가 이해하려고 하면, 다시 머리가 거짓말일 수 있다고 의심을 품었다.
“돈이나 많이 주면 말이라도 않지 말입니다.”
이것 봐.
레토는 황망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아미를 바라봤다.
“역시 신성청을 상대로 민사재판이라도 걸어야 하나, 거기서 내가 한 생고생들만 떠올려도….”
저렇게 돈 밝히는 성녀가 어디 있다고.
“너 참 돈 좋아하는구나?”
때마침 같은 생각을 한 노아가 말했다.
“야, 그럼 내가 돈에 환장 안 하게 생겼어?”
맺힌 게 상당했는지, 아미가 말을 와다다 쏟아냈다.
“X발! 거기서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았는데도 땡전 한 푼 못 받았어! 성녀니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면서 부려 먹기만 실컷 당했다고!”
가장 말단 신관도 봉급을 받건만.
모두가 우러러보는 성녀는 무급으로 노동 착취를 당했다.
“X나 개X 같은 소리나 하고 말이야! 뭐? 성녀는 모두를 위한 희생정신이 최고의 가치이고 보람이라고?”
그럼 지들은 왜 성금 받아먹고 지랄인데!
“자기들 멋대로 성녀에 대한 이상한 고정관념 만들어서 날 아주 조종하는데! 내가 똑똑하니까 개짓거리 깨닫고 안 속았던 거야!”
고정관념으로 아미를 봤던 레토는 조용히 반성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아미는 쌓아 둔 울분을 토하며 한참을 씩씩거렸다.
그러고는 노아를 휙 노려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
노아가 재빨리 긍정했다.
여기서 괜히 진정하라고 한마디 했다간 더 폭주할 것 같아서, 일단 그녀의 편을 진정성 있게 들어주기로 했다.
“생각 이상으로 쓰레기였네.”
솔직히 신성청의 행보가 너무 이기적이라 욕이 절로 나왔다.
그들은 ‘성녀’라는 단어에 이상한 개념을 부여해 아미를 완벽하게 조종하려고 했다.
만약 아미가 이상함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녀는 아직도 신성청의 꼭두각시로 살고 있었을 거다.
‘…타고난 성격이 원래 의심이 많은 편인가?’
이상한 점을 느낀 노아가 물었다.
“아미 넌 언제부터 성녀로 살았던 거야?”
보아하니 갓난아기 시절부터 신성청에서 살았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노아의 예상대로, 아미는 좀 자란 뒤에 신성청에 발견되어 성녀로 살았다고 대답했다.
“여섯 살 때 부모님이 돈 받고 팔았어.”
물론 그 과정은 노아의 예상을 뛰어넘었지만.
“좀 못 사는 집이었는데, 그런 거 있잖아.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애는 또 엄청 많이 낳는 무책임한 부모들.”
“어이구야.”
얼떨결에 들어 버린 레토가 넌지시 탄식했다.
“내가 성녀로 발탁되어 신성청에 갔을 때가 여섯 살? 그즈음이었는데, 밑에 동생만 네다섯은 있었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부모의 모습은, 절 데려가려고 온 신성청 사람들이 건네는 돈꾸러미를 받고 활짝 미소짓는 얼굴이었다.
“돈이 그렇게 좋아서 자식까지 팔아먹나, 싶더라고.”
“…….”
“…….”
아미의 과거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무도 섣불리 반응하지 않는 와중에, 레토가 슬그머니 물어봤다.
“나중에 찾아가 본 적은 없나?”
“…아드벨로에 수소문을 한 번 요청해 본 적은 있었습니다.”
신성청에서 도망쳐 아드벨로에 의탁하던 날, 호기심에 한 번 조사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리워서는 아니었다.
자식 팔아 받은 돈으로 얼마나 잘살고 있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여전히 구질구질 살던 중이라고 했습니다.”
신성청이 준 돈은 제법 큰 액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 돈을 자식을 위해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술이랑 도박으로 다 쓴 뒤에, 아예 빚까지 졌답니다.”
오히려 큰딸을 팔아넘기기 전보다 훨씬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동생들은?”
노아가 물었다.
“지금쯤 아드벨로가 후원하는 고아원에 있을걸?”
아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남 일처럼 말했다.
“동생들은 그래도 불쌍해서 부탁 좀 드렸거든.”
“잘했어.”
“글쎄, 잘한 건지 모르겠다….”
동생들이라곤 해도 남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나마 어릴 적 동생들을 돌봐주던 기억이 남아,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드는 것뿐이었다.
“…내 이야기는 이 정도야.”
시시껄렁하고 재미없지.
아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마쳤다.
“잘 견뎠네.”
노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늘 밝고 쾌활한 모습만 봐서 잘 몰랐을 뿐이지, 아미도 누구보다 힘들고 처절한 삶을 살아왔다.
자신의 힘든 과거를 밝힌다는 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중위도 고생이 많았군.”
레토 역시 진심을 담아 나름의 유감을 표했다.
정작 아미는 대수롭지 않단 듯이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사람은 제각각 자신들만의 고생을 겪으며 사니까,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아니, 그거 엄청 대단한 일인데요….”
락소는 아미의 과거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쨌건 일은 다 끝났으니까….”
더 이상 제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진 아미가 말을 돌렸다.
“…부디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돈도 좀 주고.
엄지와 검지 끝을 살살 비비며 탐욕스럽게 웃는 모습은, 어딜 보더라도 성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였다.
“형님! 형님!”
카리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형님! 형수님! 큰일 났어요!”
깜짝 놀란 노아와 레토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형님! 클라레가! 클라레가 위에!”
가쁜 숨을 내쉬던 카리나는 아예 두 사람의 손을 잡아끌었다.
덩달아 궁금해진 아미와 락소도 뒤를 슬그머니 따라갔다.
도착한 그곳엔….
“언니! 형부!”
클라레가 환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야!”
노아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 미친 것아!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헤헤! 올라갔지롱!”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린 건지 몰라도, 클라레는 말 그대로 높은 천장 구석에 거미처럼 팔다리를 뻗은 채로 매달려 있었다.
“푸하하하!”
“저게 뭐야! 하하!”
반면에 레토와 아미는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와….”
락소는 뭐 저런 애가 다 있느냔 듯한 시선으로 클라레를 바라봤다.
“형수님, 클라레가요….”
카리나가 천장 옆에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갑자기 저기 창문에 올라서, 커튼 붙잡고 올라갔어요.”
“올라갈 수 있다면, 올라가는 것이 바로 나란 여자지!”
클라레가 씩씩하게 외쳤다.
“으이구, 이 웬수야!”
정작 바라보는 노아는 속이 타들어 갔다.
“거기에서 어떻게 내려오려고 그래?”
“그거야 아까 올라온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클라레가 멈칫했다.
자신이 올라올 때 잡았던 커튼으로 손을 뻗으려니까 제법 거리가 있었다.
팔을 내리면 바로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
클라레가 노아를 힐끔거렸다.
“내려줘….”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진짜….”
결국 클라레는 노아의 팔에 안겨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이야, 너 참 대단하다?”
아미가 노아의 품에 안긴 클라레에게 엄지를 척 내밀었다.
“내가 좀 대단하지!”
클라레도 따라 조그만 엄지를 높이 세웠다.
“…….”
노아는 답답한 마음에 클라레의 엉덩이를 팡팡 두들겼다.
그래도 기분 좋은 클라레는 꺄르르 웃을 뿐이었다.
“…형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리나가 레토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저러다가 클라레, 나중에 큰 사고 쳐서 감옥 가면 어쩌죠?”
“이미 감옥 갔잖아.”
“아, 맞다.”
왕궁에서 사람 때려서 감옥 갔었지.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레토는 어째 제 남동생도 클라레와 조금 닮아가는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
수도 외곽에 지어진 아들라보르 구치소는 어느 때보다 삼엄한 감시가 이뤄지는 중이었다.
이곳에는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들이 구속되어 있었다.
당연히 세간의 화재인 플랜시 전 소장을 비롯한 관련자들도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 귀한 발걸음을 하신 국왕이 몰래 만나러 온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전하, 이쪽입니다.”
구치소장이 직접 안내한 면회실엔 단 한 명의 피고만이 국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용자 복장이 잘 어울리는군.”
카일리코 국왕이 방긋 웃었다.
“구치소 식사는 입에 맞던가, 닉스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