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245)

155.

국왕은 이번 작전에서 내심 찾던 것이 하나 있었다.

닉스 소장과 신성청을 압박할 증거와는 결이 다르지만, 세상에 드러났다가는 왕실의 존속마저 위태로운 무언가.

‘역시 제국에 있나?’

그렇다면 상당히 곤란했다.

“…일단은.”

고민을 서둘러 마친 국왕이 말했다.

“당장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게 됐으니, 다음을 논해 보자고.”

“다음이라면?”

“그대를 영입하는 문제?”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깍지 낀 손가락에 턱을 올린 국왕이 싱긋 웃었다.

아티도 눈웃음을 슬쩍 지었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는 두 사람 사이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일어났다.

“우리의 계획이 곧 끝날 것 같으니, 이후에 관해서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겠나.”

“전하께선 제가 탐나는 모양이시군요.”

“인재가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당연히 탐나지.”

국왕이 솔직히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에 의해 맺어진 계약 관계였다.

아티는 불법 사병 단체의 완벽한 소탕과 관련자 처벌을, 그리고 국왕은 7년 전 전쟁과 관련된 모든 비밀을 파헤치는 것을 돕기로 약속했다.

서로의 목표가 겹쳤기 때문에 가능한 계약이었지만, 국왕은 아티를 이대로 보내는 것이 아까웠다.

“그대는 정말 일을 잘해 줬거든.”

“후한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서 어떤가? 아예 본격적으로 나와 일해 보는 게?”

충성을 약속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요직에 앉힐 수도 있었다.

“글쎄요….”

하지만 아티는 모호하게 답했다.

“매혹적인 대답이긴 합니다만, 당장 말씀드리긴 곤란하군요.”

“요구사항이라도 있나?”

“그런 건 없습니다. 전 생각보다 욕심이 없거든요.”

“한번 잘 생각해 보게.”

국왕이 말했다.

“어차피 가주 자리도 여동생한테 밀렸다면서?”

“제가 여동생한테 준 거죠. 하기 싫어서 말입니다.”

“사람이 말이야, 멀쩡한 직장이라도 있어야 가족들한테 잔소리 안 듣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전 이미 늙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사재가 따로 있습니다. 제 명의로 낸 특허도 있고요.”

아티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저의 부유함을 자랑했다.

재능과 재산.

아드벨로 출신의 적장자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대도 나만큼 재수가 없군.”

국왕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아티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아직, 완전히 다 끝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군.”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는 건, 겨우 시작이란 뜻이기도 했다.

***

다음 날 아침.

노아와 레토는 드물게 늦잠을 잤다.

비밀 작전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와 레토의 숨겨진 과거를 공유하는 데서 온 정신적 피로가 단단히 쌓인 탓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둘은 아침 겸 점심까지 얻어먹은 뒤에야 아드벨로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운전은 아이트라가 직접 해 줬다.

“카리나도 오늘 여기서 하룻밤 묵고 올 거지?”

“네! 형님이 수영 가르쳐 준다고 했어요.”

“피곤할 텐데 괜찮겠니?”

“동생이랑 놀아주는 게 뭐 피곤한 일이라고요.”

레토의 말에 카리나가 빵긋 웃었다. 운전하는 아이트라의 얼굴에 웃음이 잔잔히 그려졌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아도 따라 웃었다.

노아는 오케아누스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 이후엔 관련된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저녁을 먹고, 소소한 일상 대화를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트라는 늦게 일어난 둘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먼저 출근한 알버스도 딱히 남긴 말은 없었다.

노아는 그마저도 저들 나름의 배려로 느껴졌다.

만약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레토의 과거를 한 번 더 언급해야 했다.

아이트라와 알버스는 큰 용기를 낸 레토를 생각해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었다.

‘정말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구나.’

그래서 이들 가족이 참 안타까웠다.

노아는 카리나와 이야기 중인 레토를 바라봤다.

그래도 어제 비밀을 고백한 후로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어린 동생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한결 자연스러웠다.

서먹하던 분위기도 상당히 많이 풀어졌다.

이젠 레토가 먼저 카리나에게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노아는 그 모습이 새삼 기적처럼 느껴졌다.

저런 시시껄렁한 농담 하나를 어린 동생에게 건넬 수 있을 때까지, 레토는 얼마나 무거운 죄책감으로 동생을 바라봤을까.

어떤 마음으로 ‘오케아누스’로 살았을까.

“…응?”

시선을 느낀 레토가 노아를 불렀다.

“왜 그래? 뭐 묻었어?”

“아니.”

노아가 별일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부럽다, 싶어서.”

“뭐가?”

“이렇게 착하고 멋진 동생이 있잖아.”

칭찬받은 카리나가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숫기 없는 도련님을 바라보는 형수님의 마음은 절로 푸근해졌다. 그래서 더욱 제 여동생의 괄괄함이 조금 슬펐다.

“반면 내 동생은 엉덩이춤으로 박물관을 뒤집어 놓았는데….”

“이씨, 내가 뭐!”

조수석에 떡하니 혼자 앉은 클라레가 휙 뒤를 돌아봤다.

아이의 두 팔에는 어린이 과학 박물관에서 받은 장기자랑 1등상과 인기상 트로피가 야무지게 들려 있었다.

“나도 착하고 멋지거든?”

“정말로?”

“당연하지! 가지고 온 방학 숙제도 벌써 다 했는걸?”

“오, 그건 대단한데?”

노아가 칭찬하자, 클라레가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꼭 살찐 비둘기 같았기에, 레토는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아드벨로 저택에 도착하니,

“오셨습니까?”

마중 나온 베닝이 싱긋 웃었다.

“아스 아가씨와 치티아 중위님, 베네딕토 씨는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다들 군기가 빠졌구만.”

여전히 트로피를 양팔에 낀 채로 클라레가 고개를 흔들었다.

“할머니가 그랬는데, 군기가 빠진 것들은 연병장을 뺑뺑 돌린 뒤에 바다에 빠트려서 전투 수영시켜야 한다고 했어.”

“얘가 끔찍한 소리 하고 있어!”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은 노아가 떽, 하고 주의를 줬다.

“형님.”

카리나가 그새 또 언니와 투닥거리는 클라레를 가리켰다.

“조금 전에 클라레가 한 말이 무슨 뜻이에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해진다는 뜻이야.”

“그렇구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카리나는 이내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레토의 손을 꼭 쥐며 씩씩하게 외쳤다.

“그러면 형님도…!”

어, 어어.

카리나는 조금 전 클라레가 했던 말을 더듬더듬 떠올렸다.

하지만 다다다 튀어나온 클라레의 말들이 대부분 처음 듣는 단어라서 기억력에 오류가 살짝 발생했다.

그래도 똘똘한 아이라서, 중요한 단어는 확실하게 기억해 냈다.

“염병 도세요!”

형님을 향한 우애 어린 진심이 아드벨로 저택을 가득 채웠다.

“…어?”

레토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풉!”

“크흐흐….”

“…….”

다른 어른들은 황급히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그날 저녁.

아이트라는 집으로 돌아온 알버스에게 카리나의 귀여운 실수를 들려줬다.

그리고 여태 본 레토의 얼굴 중 가장 멍청하고 귀여운 표정을 봤다고 자랑까지 했다.

“난 왜 그 자리에 없었던 거냐!”

알버스는 테이블을 치며 아쉬워했다.

“그거야 일하러 가셨으니까요.”

“사진은 찍어 뒀냐?”

“아쉽게도 못 찍었어요.”

“으으…!”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통스러워하던 알버스는 마지막엔 맥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진짜 형제 같구나.”

아이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레토가 카리나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듣고 당황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 뒤, 늘 자신들에게 벽을 치며 한발 물러서던 아이였다.

혹여 제 존재가 오케아누스에게 피해가 될지 모른다고 지레 겁먹으며 항상 거리를 두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그래서 알버스는 레토의 변화가 무척 기뻤다.

“손주며느리 덕이야.”

“레토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아이트라는 노아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저 부탁하고 싶어요. 무엇을 알게 되든, 그냥 그 아이를 안아 주고 사랑해 달라고.”

노아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그녀가 제 아들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아이들이 이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딸아.”

알버스가 아이트라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너도 행복해야지.”

“전 충분히 행복해요, 아버지.”

아이트라의 목소리엔 진심이 가득했다.

결혼으로 인한 상처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들이 제게 주는 기쁨은 다음 날을 웃으며 기다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줬다.

“그러니 전 마지막까지 지켜볼 거예요.”

아이트라가 단호히 말했다.

“그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그래.”

알버스가 마침 오늘 국방부에 긴급으로 올라온 의제 하나를 아이트라에게 알려 줬다.

“지금 엠바고로 묶인 사건이 하나 있단다.”

바로 디모네 닉스 소장의 직위해제였다.

“현재 임의동행으로 국왕이 보낸 조사대와 함께 수도로 내려오는 중이지만, 육군이 조금 전 막 그를 직위해제했다고 성명을 냈단다.”

이유는 그가 앞으로 받게 될 혐의 때문이었다.

“수도에 도착하는 즉시, 그는 내란죄로 체포될 거다.”

***

이틀 뒤.

증거 적부심 재심사가 열렸다.

이번 심사 역시 전과 마찬가지로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쟁점은 이번에도 피고 측이 주장한 증언에 대한 신빙성이었다.

노아와 레토는 차를 몰아 법원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법원 앞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노아와 레토는 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운 뒤,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저택에서 기다렸어도 되었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오나 본데?”

창밖을 살피던 레토가 본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이 열리면서 변호인단들이 나타났다. 기자들이 서둘러 다가가 사진을 찍으며 심사 결과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차를 두드렸다.

“검사님.”

노아는 로세카 검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레토가 차창을 내리자, 검사가 심사 결과를 말했다.

“피고 측 증언이 기각되었어요!”

피니치 구역에서 가져온 증거들을 토대로, 이번 사건의 배후는 디모네 닉스 소장이란 검사 측의 반박이 인정되었다.

거기다 신성청과 닉스 소장의 교착 상대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변호인단이 전원 사퇴했다.

흥분한 로세카 검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들은 건데, 어제저녁에 부장 판사가 영장을 발부했대요.”

“무슨 영장이요?”

“디모네 닉스 소장의 체포 영장이요.”

그리고 현재, 닉스 소장은 구치소에 감금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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