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245)

154.

“…응?”

알버스는 날 선 눈매를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판단한 노아는 이번에도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조그맣게 고인 푸른 오러가 잔망스럽게 반짝거렸다.

“……!”

알버스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 이! 이이…!”

그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놀라서 굳어 버린 혀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네, 오러입니다.”

다행히 알아들은 노아가 대신 답했다.

“아이고! 아이고야!”

그제야 혀가 풀린 알버스가 거구를 폴짝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노아는 괜히 말했나, 싶어서 조금 무안해졌다.

“어로잖아!”

혀가 덜 풀렸는지, 알버스는 이상한 발음으로 노아의 오러를 외쳤다.

노아는 일단 손바닥에 있던 오러를 서둘러 치웠다.

‘어로’가 아니라 ‘오러’라고 구태여 정정하지 않는 눈치도 발휘했다.

“이제는 믿으시나요?”

“세상, 아이고, 세상에 이럴 수가….”

알버스는 커다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오러’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그는 놀라서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노아가 부축하려 했지만, 다행히 알버스는 빠르게 균형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한 번 더!”

“네?”

“한 번만 더 보여 다오!”

“…….”

기세에 눌린 노아가 다시 엉거주춤 손을 내밀어, 오러를 한 번 더 보여 줬다.

“…….”

오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빛이 번뜩였다.

“이게, 전설의 오러….”

무인으로서의 피가 마구 들끓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무인의 궁극,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오러는 오랫동안 무인으로 살아온 그를 매혹했다.

“그, 그러니까…!”

하지만 알버스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어흠! 그, 시스토 제국의 피에타 가문, 말하는 거냐?”

“네.”

노아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대답했다.

“…그렇군.”

도로 침착해진 알버스는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그제야 올여름 간첩 체포 작전 때 노아가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나섰던 이유를 알아챘다.

자기 자신이 최강의 무기이니까,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피에타 가문의 명예는 왕국에서도 유명하지. 무인이라면 누구나 칭송하고, 귀족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이상의 귀족.”

알버스는 자세를 고쳐 공손히 예를 갖췄다.

“알버스 오케아누스, 피에타 가문의 생존자께 찬사를 보냅니다. 이렇게 뵈어 영광입니다.”

순간, 노아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알버스가 저에게 보여 주는 예의는, 피에타 가문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긍지와 명예가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다시는 받아 보지 못할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시할아버지가 해 주시다니.

“…고개를 들어주세요.”

노아는 어릴 적에 부모님께 배운 예법을 떠올렸다.

허리는 곧게 펴고, 가슴 쪽으로 턱을 살짝 당기고.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말 것.

“피에타 가문의 여식이 긍지 높은 오케아누스 가문에 인사 올립니다. 이렇게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나눈 노아는 눈가가 살짝 시큰거렸다.

“그래서….”

노아가 감정을 잠시 갈무리할 때까지 기다려 준 알버스가 말했다.

“그 중대한 비밀을 내게 알려 준 이유가 무엇인가?”

“대충 짐작하실 겁니다.”

“또 디모네 닉스, 그 새끼인가….”

알버스는 이제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그 개자식은 안 끼어든 곳이 없고, 언급만 되면 항상 최악을 몰고 왔다.

그의 예상대로, 노아는 최악을 말했다.

“피에타 가문을 멸문시킨 원흉이 디모네 닉스입니다.”

알버스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더 나아가, 선대 국왕과 신성청도 얽혔을지 모릅니다.”

“그에 대해선 이번에 국왕 전하께 조금 들었다.”

7년 전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 바로 그들이었고, 카일리코 국왕은 그것들을 처벌하기 위해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알버스를 남부로 보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간첩을 붙잡아 증거와 증언을 확보하고, 덩달아 안보국도 탈탈 털어 선대 국왕과의 연계점을 찾는 것.

‘역시 얕볼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아드벨로도.

‘망할 할망구,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 제 눈앞에 피에타 가문의 생존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장군님.”

노아는 알버스에게 약속했다.

“저와 레토는 결혼식 당일, 갑작스러운 해적단 소탕 때문에 피로연에서 부부 공동 작업을 못 했었는데….”

마침 딱이지 않으냐며 노아가 싱긋 웃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살벌하고 냉혹한지, 알버스는 실로 오랜만에 두려움이란 것을 느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수북한 수염 사이로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우리 두 사람에게 마침 공통의 적이 있었네요.”

“…….”

“첫 부부 공동 작업으로, 케이크 자르기 대신에 그 자식의 목을 처형대 위에 올리겠습니다.”

***

그날 저녁.

입궁한 아티는 곧장 카일리코 국왕을 찾았다.

그는 피니치 구역에서 가져온 증거들을 국왕에게 보여 줬다.

“…이야.”

국왕은 책상 위에 올려진 증거들을 보며 감탄했다.

“이 미친 새끼들이 나라를 아주 가지고 놀았군.”

X발.

보자마자 욕이 튀어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로니타 검사는 어디 있습니까?”

“옆방에서 대기 중이야. 그리고 로니타가 아니고 로세카야.”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증거를 하나, 하나 살피는 국왕의 얼굴은 점점 싸늘해졌다.

‘빌어먹을 새끼들.’

증거를 살피던 국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도 결국엔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 국왕은 지난 시간을 잠깐 돌이켜봤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난제였다.

그가 즉위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선왕의 흔적을 싸그리 지우는 것이었다.

아들라보르에는 전쟁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부정부패와 비리가 가득이었다.

선왕의 간신들을 쳐내고, 사리사욕을 채우던 반역자들은 솎아내 처벌하던 중.

카일리코 국왕은 우연히 전쟁의 비밀을 알아 버렸다.

선대 국왕과 신성청, 그리고 닉스 소장은 7년 전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작정하고 온갖 비열한 수를 치밀하게 준비해 뒀다.

전쟁은 왕국이 주도한 범죄였다.

그들은 전쟁 여론을 키우기 위해 불법 사병을 만들어 간첩 사건으로 위조하고, 제국과 내통까지 하며 침략을 부추겼다.

‘망할 새끼.’

능력이 없으면 가만히라도 있지.

선대 국왕은 특출난 재목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력이라도 하던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나 말 것이지.

왜 전쟁이라는 최악의 패를 사용한 것인가.

선왕은 자신의 지지율을 위해 닉스 소장, 신성청과 결탁했다. 거기다 은밀하게 나서기까지 했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못하니, 안보국을 이용해 비리 자금을 모으고 불법을 자행했다.

이번에 체포된 안보국 국장은 당시 선대 국왕을 대신해 움직였던 세력 중 하나였다.

‘…이 짓도 이젠 다 끝이야.’

드디어 이 모든 비밀을 처벌할 수 있는 증거가 손에 들어왔다.

플랜시 전 소장의 재판에 느닷없이 나타난 신성청을 압박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육군을 수색할 명분이 생겼다.

“조사대원은 언제 보낼 겁니까?”

때마침 아티가 물었다.

“이미 보냈지.”

국왕의 한쪽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갔다.

“전투는 역시 일어났었지?”

“그렇습니다.”

“시간대는?”

“새벽 2시 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육군은 연락 하나 없네.”

이번 작전에서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투입된 대원들에게 살생용 무기까지 지원했었다.

하지만 육군은 어떤 전보도 없었다.

국방부 장관인 오케아누스 장군은 물론이거니와, 최고 군통수권자인 국왕에게도.

“만약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주 당당하게 연락했겠지. 간첩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체포했다고 말이야.”

육군이 조용하단 건, 대원들의 작전이 성공했단 뜻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함부로 알렸다간, 육군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국왕은 작전에 투입한 일원들이 돌아올 예정이었던 오늘 새벽에 국방부 직속 조사대를 보냈다.

“수색영장은 어찌하시고?”

아티가 재밌단 표정으로 또 물었다.

“체포하러 보낸 게 아니고, 조사대원을 보낸 거잖아.”

국왕이 능청스레 말했다.

“당장은 그자들이 도망치지 않도록 발을 묶어 두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체포와 수색은….”

따르릉-.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티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고, 국왕은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지?”

수화기 너머로 흐릿한 소음이 들렸다.

잠자코 듣고 있던 국왕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참고인 조사로 동행하라고 해야지. 만약 협조해 주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면 이렇게 말하면 돼.”

베스페라.

국왕이 책상 위 증거를 보며 말했다.

“친애하는 베스페라, 편지를 쓸 땐 시가를 피우지 말라고. 그렇게 전해 주게.”

그러면 알아들을 거라며 국왕이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오, 협력해 주기로 했나?”

역시 훌륭한 군인이야.

국왕은 만족스럽단 듯이 싱긋 웃으며 다른 지시도 내렸다.

닉스 소장만을 비롯해 임의동행해야 할 참고인 몇 명을 같이 데려오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대기하라고.

“친절하게 대해 주도록. 아주 중요한 손님들이니까.”

무사히 데려오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끝났다.

“일찍 도착했군요?”

“수도에서 북부는 남부만큼 멀지 않으니까.”

“그런 것치고도 이른 것 같군요.”

“국방부 조사대가 성실하거든.”

아티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저 능구렁이.’

새벽이 아니라 작전 중에 아예 조사대를 미리 파견했었군.

“어쨌건 잘되지 않았나.”

국왕이 말했다.

“닉스 소장이 수도로 오고 있으니까.”

“다행입니다.”

“하지만 다 다행인 건 아니야.”

아쉽단 듯이 입술을 쩝쩝 다지는 국왕의 시선은 책상에 놓인 증거들을 찬찬히 살폈다.

필요한 증거들은 다 모였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이 빠져 있었다.

“제국과 내통한 증거가 없군.”

국왕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제국으로 사람을 보내야 하는 건가….”

“위험요소가 너무 크군요. 제 동생은 보내지 마십시오.”

“보내라고 해도 안 보내.”

그로서도 왕국이 한 번 더 전쟁을 치르는 건 지나친 부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겨우 전쟁의 아픔에서 벗어나 성장 중인데, 제동을 걸 필요가 없었다.

저는 선왕과 같은 실수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국왕은 망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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