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결국, 아이트라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해요. 잠깐 자리 좀 비워도 될까요.”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난 아이트라는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노아는 단둘이 남게 되자 알버스에게 사과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어….”
“아니야, 아니야.”
알버스는 결코 그렇지 않다며 힘주어 말했다.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야기를 그대와 나눌 수 있어서 아주 기쁘고.”
“장군님….”
“아마 아이트라는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거다.”
알버스는 응접실에 장식된 시계를 봤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도 안 오는군.”
“아마 레토가 일부러 잡아두고 있을지 몰라요.”
“미리 부탁했었나?”
“아니요. 하지만 저희가 이런 대화를 나눌지도 모른단 걸 눈치챘을 거예요.”
“하여튼 옛날부터 눈치만 더럽게 빨랐다니까.”
못마땅하단 듯이 혀를 찬 알버스가 일어났다.
그는 노아에게 복도에 걸린 명화를 소개해 주겠단 핑계를 대며 가벼운 산책을 권했다. 노아는 기꺼이 권유에 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먼저 운을 뗀 것은 알버스였다.
“난 레토를 입양하는 것을 반대했단다.”
알버스는 도무지 그 새끼의 핏줄을 제 저택에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도 어디 좋은 시설에 맡기고 지원해 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었다.
딸이 지닌 죄책감은 어떻게든 덜어내 주고 싶었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당장 내 눈에 가장 중요했던 건 바로 내 딸과,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난 손주였어.”
그런 알버스가 끝내 아이트라의 고집을 꺾지 못했던 건, 어린 레토의 끔찍한 상태 때문이었다.
“난….”
그에게도 어린 레토의 모습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결국 알버스마저 말을 잠시 멈추고 심호흡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느 정도 진정된 뒤에야 그는 말을 이었다.
“…어쨌건, 결국 데려와 양자로 입적시켰지.”
“레토의 신분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대의 할머니가 여기서 등장하네.”
“할머니가요?”
알버스의 짓궂은 미소에 노아가 깜짝 놀랐다.
“아드벨로가 레토의 신분을 감춰 준 건가요?”
아, 그래서!
노아는 피니치 구역에서 자신들을 데리러 왔던 아스의 전언을 떠올렸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닥치고 돌아와. 이 불효자식 새끼야. 네 엄마 가슴에 비수 꽂을 생각 말고.’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글로리아는 레토에게 저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도 결혼 반대를 하지 않았다니….’
노아는 아드벨로의 열린 마음에 새삼 감탄했다.
“레토는 아드벨로가 후원하는 어느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로 되어 있단다.”
“그래서 닉스 소장이….”
“아드벨로의 신변 보호 제도는 상당히 유명하단다.”
그래서 지금껏 레토의 정체가 닉스 소장에게 들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레토의 정보를 제공하고, 아이의 신분을 바꿔 달라고 한 거야.”
“그랬군요.”
노아는 쉽게 수긍했다. 왜냐하면 저와 클라레도 그런 식으로 위장보호 중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야.”
어흠.
알버스가 헛기침을 콜록거리며 노아를 힐끔거렸다.
“혹시 우리 손주며느리는, 알고 있느냐?”
“무엇을요?”
“왜 내가 백사자라고 불리는지.”
“훌륭하게 단련된 신체와 새하얀 머리칼 때문이지 않습니까?”
알버스는 해군의 영웅이고, 해군 출신 중 최초로 국방부 장관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러니 노아도 군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건 뒤늦게 붙여진 이유란다.”
별명을 지어준 건 바로 레토였다.
“큰 꼬맹이가 저택에 들어오고 몇 달이 지났을 때였지….”
알버스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나 주눅이 들어 있던 아이가, 이상하게도 알버스만 보면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당연히 그걸 모를 리가 없었던 알버스가 뒤를 휙 돌아보면 깜짝 놀라 도망쳤지만, 그가 다시 걸어가면 또 쫓아다녔다.
알버스는 기분이 묘했었다.
분명 불쾌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닉스 소장의 사생아가 제 뒤를 따라다니는 게 뭐 좋은 일이라고.
하지만 알버스는 저도 모르게 걷는 속도를 늦추곤 했고, 어린 레토가 어쩌다 제 바로 뒤까지 쫓아와도 돌아보지 않았다.
괜히 또 도망치다 넘어질 수 있었으니까.
그런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술래잡기가 이어지던 중.
“아….”
레토는 처음으로 알버스를 불렀다.
할아버지나 후작님이란 호칭은 감히 쓰지도 못했다.
눈치가 빠른 아이는 자신이 이 저택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꽤 안쓰러웠지만, 알버스는 일단 모르는 척하며 레토에게 물었다.
“왜 불렀느냐?”
“…….”
“응? 뭐라고?”
“…이, 이거.”
아이가 보여 준 건, 동화책에 그려진 새하얀 사자였다.
“이거….”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로 중얼거리던 아이를 보는 순간, 알버스는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달았다.
“…늙으면 미련해진다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니었던 게야.”
그제야 알버스는 눈앞에 있는 아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제 주제를 알기에 말 한마디 함부로 하지 않는 아이.
사람을 부르는 것도 눈치 보여 함부로 하지 않는 아이.
무엇이든 함부로 하지 않는 아이.
“아이트라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지만, 아니란다. 결국 이 모든 건 내 잘못이었어.”
닉스 소장의 불륜을 조사했던 건 알버스였다.
그에게 사생아가 있단 것을 알아낸 것도 알버스였다.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그 두 사람도 망할 개자식의 피해자였단 사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장군님….”
“그런데도 난 그 어린 것을 미워하고 싫어했단다. 자세히 보면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아이였는데….”
죽은 저의 손자처럼.
제 아빠가 얼마나 끔찍한지 모르는 채 죽었던 그 불쌍한 아이처럼.
“…….”
“…….”
알버스는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날의 후회가 불러일으킨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커다란 한 손으로 얼굴을 하염없이 쓸었다.
노아는 그에게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그가 자신의 후회와 죄책감을 견딜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감정을 추스른 알버스가 숨을 깊이 내쉬고는, 끊어졌던 뒷말을 이어 갔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수염을 길렀지. 생각보다 아주 잘 어울리더구나. 레토도 사자 같다고 좋아하고.”
말하는 알버스는 은근히 기뻐했다.
“거 참! 어린 게 머리도 좋고 똘똘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이놈은 우리 오케아누스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인재였던 거야!”
이후의 나날은 알버스에게 무척 즐거운 추억이었다.
“일단 맛있는 걸 많이 먹였지. 쉬는 날에는 유명 요리사를 초청해서 달콤한 간식을 먹이고, 저녁에는 항상 고기를 먹였다.”
많이 먹인 뒤에는 많이 움직이게 했다.
운동도 자신이 직접 가르쳤고, 어떻게 해야 멋진 남자가 되는지도 직접 알려 줬다.
그때마다 레토는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알버스의 가르침을 배웠다.
조금 더 자라서는 말을 타는 법을 가르쳐줬고, 사관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방학 때 몰래 차를 운전하는 법도 가르쳤다.
“그때는 아이트라한테 엄청 혼났어. 운전면허도 없는 애한테 벌써 그런 걸 가르쳐서 어쩌냐고 말이야.”
“부럽네요. 저도 그때의 레토가 보고 싶어요.”
“사진이 있단다. 레토는 부끄러워할지 모르니까, 나중에 몰래 보여 주마.”
알버스의 은밀한 약속에 노아가 싱긋 웃었다.
“그렇게 잘 지냈으면 좋았으련만….”
조금 어색하긴 해도, 세 사람이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가는 행복한 나날이 점차 일상으로 자리 잡던 어느 날.
비극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4학년 여름방학이었다.”
해군 생도들은 4학년 2학기가 되면 전원 함선에 올라, 한 학기 내내 배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때 오케아누스 일가는 방계 쪽 일가가 목숨을 잃은 큰 사고를 처리하기 위해 수도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게 바로 카리나였지.”
당시 오케아누스 원로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레토보다, 혈연인 갓난아기를 입양해 후계로 키우라고 압박하던 중이었다.
“사실 우린 레토를 후계로 내세울 생각이었단다.”
이미 그때도 레토는 미래가 유망한 사관생도였다.
알버스는 그런 레토를 자랑스러워했다. 자신이 키운 손자라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부족한 점 없는 완벽한 후계자였다.
그래서 원로들과 틈만 나면 으르렁댔었다.
요즘 시대에 핏줄이 무슨 상관이냐며 원로들 멱살 잡아 뜯어 수집하기 바빴다.
“레토에겐 방학 중에는 잠시 남부에 있으라고 말해 뒀지. 일이 끝나면 녀석에게 후계 자리를 줄 생각이었거든.”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바로 연합국의 전쟁 선포였다.
연합국은 아들라보르 왕국의 남부 지역에 공격을 퍼부었는데, 하필 그곳이 오케아누스 영지였다.
때마침 방학이었던 사관생도들은 서둘러 집으로 보내졌다. 레토 역시 수도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수도 저택에 도착한 그 날.
“들어 버린 게다.”
알버스의 목소리가 침통했다.
“…뭐라고? 이번 군 작전 지휘를 그 새끼한테 맡긴다고?”
“국왕 전하의 결정이라고 해요.”
“노망 든 새끼가!”
“아버지, 괜한 걱정이겠지만….”
“걱정 마라!”
“…….”
“레토는 우리 자식이다! 찢어 죽일 디모네 닉스와는 아무 상관없어!”
앞서 알버스는 몇 번이고 말했다.
레토는 눈치가 좋다고.
“…연합국을 향한 역공전을 계획하는 중, 선대 국왕이 디모네 닉스를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뽑았지.”
그 때문에 각 군이며 기사단이며 난리도 아니었는데, 특히 알버스가 당시 대장으로 있었던 해군이 가장 크게 반발했었다.
어이가 없어진 알버스가 아이트라와 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하필 레토가 그걸 엿듣고 만 것이다.
“그 뒤로는, 이제 손주며느리 그대도 아는 이야기일 거다.”
“…….”
노아는 눈앞이 아찔했다.
“수상하게 장수하는 스켈레로 3세 성왕, 당시 만년 대위였던 디모네 닉스 소장, 지금은 뒤지고 없는 무능한 선왕.”
“이게, 전쟁을 일으킨 진짜 원흉들이야.”
빌어먹을 작자들의 농간으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먼 피해를 보고 상처를 입은 것인가.
노아는 무거운 무기를 몸에 매달고 바다를 달렸을 레토를 상상해 봤다.
죽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18살의 어린 레토.
“…장군님.”
차오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킨 노아가 말했다.
이제, 물어볼 것은 다 물어봤다.
그러니 이젠, 노아가 말할 차례였다.
“저는 피에타 가문의 생존자입니다.”